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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의 경계를 뚫는 변성 공간의 체험 – 김도희, 《빛선소리》REVIEW/Visual arts 2024. 8. 6. 12:28
도병훈(작가·비평)
Ⅰ.현대미술은 고정 관념과 기존의 의미망을 깨트리며, 명사적 ‘의미’가 아닌 동사형 ‘사건’으로 확장되어왔다. 이러한 국면에서는 ‘X란 무엇인가’ 대신 ‘무엇을 X라고 하는가?’라는 질문, 또는 자문이 요구된다. 따라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는 ‘무엇을 예술이라고 하는가?’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폴 세잔(Paul Cézanne)의 자문은 “이것이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것인가?”였다. 그는 치밀한 관찰과 함께 색채의 차이와 한 번의 터치가 화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점에 고심하며 화면 부분마다 긴 시간을 소요해 천천히 작업했다. 세잔의 후기 원작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러한 머뭇거림이 생생하다. 세잔의 이러한 태도와 유례없는 회화의 특성은 ‘멜랑콜리아(melancholia)’, ‘히스테리적 주체’라는 심리적 증상에서부터, 선사시대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채색 원료인 황토색 출토지 발견자로서 이 시기 벽화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문명화된 존재’ 및 근대 교육에 대해 회의와 의문을 가졌던 것과도 연결된다. ‘일획론’으로 알려진 중국 청대 석도(石濤)는 화어록에 “내가 나 됨은 내가 있음으로부터이다(我之爲我 自有我在)”라는 구절을 남겼다. 이 말은 세상이 강요하는 인습적 시대 상황에 대한 각성에 따른 ‘무엇을 일획(一畫)이라 하는가?’라는 자문에서 나왔다. 동시대 팔대산인(八大山人)의 기이하고도 자유로운 정신이 담긴 수묵화도 떠오른다. 또한, 현대미술도 각 시대 주류 미술에 대해 스스로 ‘회의’하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수용적 감상보다 공감각적 체험에 방점을 두며 예술의 경계와 그 이면에 대한 사유의 길을 열어왔다.
Ⅱ.성북구립미술관 기획으로 성북예술창작터에서 열린 김도희 개인전 《빛선소리》는 신작 ‘벽면 사운드 드로잉 설치’ 〈빛선소리〉(2024)와 이 작품의 맥락을 보여주는 초기 작업인 〈손톱산수〉(2024)부터 사진, 퍼포먼스, 설치, 영상, 출판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룬 지난 20년간의 전시 이력을 보여주는 아카이브 자료, 실물 및 기록영상, 그리고 관객 체험 작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채널 영상으로는 〈미친나무〉(2005), 퍼포먼스 기록 영상으로는 〈하울링〉(2015), 〈물새의 깃털처럼〉(2020) 등이 있다. 마치 극기 체험처럼 맹렬히 세상과 ‘접촉’하며 ‘실감’하고자 하는 김도희 작업의 일관된 추이에서 예술가의 창조력과 그 동기, 그리고 지속성에 대해 새삼 느끼고 생각하게 된다.
김도희 작가가 해온 작업은 ‘미친나무’, ‘혀뿌리’, ‘살갗 아래의 리듬’, ‘몸의 소실점’, ‘씨가 말랐대’, ‘배꼽불’등과 같은 타이틀에서도 그 일관된 지향이 드러난다. 이러한 언어가 함의하는 체험적 단일성은 감정, 또는 감응(affect)이라고 일컫는 충동(drive), 동기(motivation), 정서, 느낌 등을 인간성의 중심으로 보는 것으로, ‘신체가 정신의 대상일 동안 정신은 언제나 신체의 어떤 관념’이라고 한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생각과도 상통한다.이번 개인전의 주제이자 주된 작품은 신작 〈빛선소리〉이다. 엄청난 양의 구불구불한 선 드로잉이 벽면을 따라 그려져 있고 전시공간에 촉각적인 사운드가 설치되어 있다. 전시장 1층에서부터 계단을 거쳐 2층까지 나선형으로 돌아 들어가는 공간에서 처음 시작할 때는 느슨하고 성긴 선들이 점점 더 반복적으로 겹쳐져 벽면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벽면 목탄 드로잉이 전개된다. 2층에서는 목탄 냄새로 추정되는 향이 쿰쿰할 정도다. 이 나선형 동선은 물의 소용돌이, 앵무조개, 달팽이, 해바라기 씨앗, 그리고 은하에서도 발견되는 무한히 감아 돌아 들어가는 형상으로서 고대 이래 수학적 탐구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빅터 샤우버거(Victor Schauberger)는 운동의 형태를 ‘파형 – 나선형 – 공간상의 곡선 운동’으로 표현한 바 있다.
“생명은 진동하는 회전체이며, 삶은 물질을 기반으로 겪은 마찰과 경험을 해석하여 표면적을 넓히는 기회”라고 말한 바 있는 작가는 이번 작업에서 자신의 손바닥에 목탄 가루를 묻혀 벽면을 천천히 마찰함으로써 이 촉각적 소리에 감응(感應, 대개 ‘정동’으로도 번역되는 ‘affect’의 의미로 이해하나, 《주역》의 ‘함괘’, 원효가 주석한 《대승기신론소·별기》 등 동양의 고전에 빈번히 나오는 용어이다)한 움직임을 드로잉으로 이어지게 했다. 그리고 이 드로잉을 소리(음파)와 연동시켰다. 쳐다보는 눈은 남성적 양(陽)이라면 귀를 기울이는 귀는 여성적 음(陰)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소리파동은 고막뿐 아니라 신체 전체를 울리고 닿는다는 점에서 시각보다 훨씬 체험적이다. 나선형 공간 속에서 드로잉을 경청(傾聽, Listening)할 때 신체 내부 공간과 몸이 이 곡벽 사이의 파동 속에서 같이 공명하는 것을 느끼면 이러한 소리의 체험성과 에너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작가는 작업을 하면서 느낀 에너지 체험을 방파제를 만난 큰 파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진동하며 확장 상승하는 나선축의 중앙(소실점)은 비어있다. 나선 에너지 자체는 바깥으로 기울어지는 표면을 가진다. 물리적 표면은 ‘형’일 뿐”(김도희, 〈빛선소리〉 작가노트)
〈빛선소리〉가 물리적 거리 이상으로 체험을 확장하는 장소가 된 것은 휘감겨 들어가는 운동의 형태로 확산되는 곡률을 따라 에너지가 발현되는 나선형 공간 구조에 기인한다. 우리 문화유산 중에서도 심도(深度) 있는 공간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으니, 담양의 소쇄원이 한 예다. 이곳은 피보나치수열, 또는 황금분할 비를 유지하면서 그 값을 늘려가는 동시에 직경들 사이 각도를 일정하게 변화, 바깥(자연)쪽으로 기울어지는 경사도를 가진 나선형 동선으로 조성되었다. 실제로는 작은 공간인데 대(台), 당(堂), 각(閣)도 소규모여서 몸이 직접 닿는 마루나 온돌방을 거쳐 작은 계곡 바로 옆의 편평한 바위까지 감아 돌아 들어가며 체험을 증폭시킨다. 이곳을 조성한 양산보(梁山甫)의 행적이 입증하듯, 소쇄원은 정치적 파란(波瀾) 속에서 은일(隱逸, 시대적 여건과 저마다의 삶의 태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복합적 함의를 가진 용어)의 삶을 지향한 별서(別墅)다. 이처럼 소쇄원이 시대적 억압과 사회적 강요에서 벗어나 심리적 해방감을 추구하고자 자연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세파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씻어내며 자기 회복을 열망한 곳이라면 김도희의 경우 〈빛선소리〉의 나선공간을 지어놓고 물질과 치열하게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밀도 높은 시간을 통해 ‘새 몸’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빛선소리〉는 벽을 더듬는 순간순간의 점이 시간성의 개입으로 선으로 변모한 흔적이다. 작가는 눈을 감은 대신 귀를 기울인 상태에서 몸을 벽에 가까이 붙이고 캔버스보다 견고한 벽의 요철(凹凸)의 표면을 손끝과 손바닥으로 더듬고 밀며 그 순간순간의 즐거움을 따라갔다. 앞서 그은 선을 촉각으로 발견하고 흩날리며 놀 듯이 움직이기도 하고 귀의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기울이며 양손이 만들어내는 율동의 리듬을 즐겼다고 한다. 쉴 때를 제외하고는 손을 벽에서 떼지 않은 채 수 시간을 움직였다고 하니 뭉친 곡선으로 보이는 대부분이 1획이다. 리드미컬한 무수한 선의 궤적은 공간에서의 촉각과 소리로 대표되는 표면 경험이 몸 전체에 전달된 율동과 흐름을 담고 있다. 작가는 소형 마이크를 벽과 손가락에 부착하여 선과 자신의 몸이 벽과 공간 속에서 이끌리는(draw) 소리를 녹음했다. 그리고 나선공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극한의 밀도로 어두워지는 드로잉과 대응되도록 공간 곳곳에 드로잉에서 녹음된 다양한 밀도의 선소리를 사운드 설치했다. 또 공간 가장 안쪽의 빈 공간에는 드로잉 소리 대신 심장 소리를 배치하였는데 이는 본인이 말한 ’진동하며 확장 상승하는 나선축의 중앙(소실점)은 비어있다‘라는 체험을 공간으로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표면감각을 증폭하는 대신 가운데를 비움으로 오히려 에너지를 크게 확장 시키고 움직이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번 신작의 표면감각과 관련하여 영감을 준 사건으로 작가의 일본 나가노 젠코지(善光寺) 암흑터널 체험이 있다.
“대웅전 아래 있는 터널(오카이단메구리, お戒壇めぐり)은, 승려들이 몸을 숨기는 터널로, 안내자가 반드시 오른손만을 써서 벽을 더듬고 나아가야 하며, 그러다 보면 천국의 문고리를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완전한 암전의 장소에서의 체험으로, 양손이 아니라 한 손만 쓰면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한다. 그뿐 아니라 오른손바닥이 느끼는 벽의 표면 외에 모든 방향의 감각이 상실됨과 동시에 신비롭게도 내 몸의 표면, 즉 신체가 어떤 부피나 형태로 공간을 점유하는지를 알 수 없는 상태, 다시 말해 내 몸의 표면이 사라지면서 반대로 내 몸과 공간이 통합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나의 의식과 정신인데, 매우 놀랍도록 영롱하고 선명한 상태의 빛과 같은 존재로 느껴진다 (중략) 동시에, 오른손 벽을 더듬는 내 손바닥은 매우 대조적으로 사물의 ‘표면’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스쳐 가는 시간을 손바닥이 만나고 발견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2020년 6월 1일, 작가노트)
김도희 작가는 이 체험으로부터 손바닥이라는 신체 피부의 표면과 사물의 표면 사이 – 시간 – 을 말하면서 일본에 거주한 현대미술가 곽인식의 ‘표면’에 대해 재인식하게 되었음을 윗글 말미에서 밝혔다. 또한 자신이 시공을 점유하며 ‘있는’ 상태를 의식하고 자각하는 상황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깨달으며 경이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러한 경험은 예술 인류학에서 말하는,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면 시신경이 저절로 진동하여 어둠 속인데도 눈 안쪽에서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내안(內眼)’, 또는 ‘내부시각(Entopic)’ 현상과 관련된 측면이 있어 보인다.감각신경 중에서도 피부감각인 촉각, 청각, 압각, 통각을 출발점으로 삼는 김도희 작업의 특성은 이번 개인전에 함께 출품된 〈손톱산수〉(2004)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금강산) 〈만폭동도(萬瀑洞圖)〉를 손톱을 갈아 커다랗게 이어붙인 사포 위에 확대해 그린 것이다(겸재의 원작은 A4 종이 크기보다 작다).
작가가 〈손톱산수〉로 모사한 〈만폭동도(萬瀑洞圖)〉의 금강산(내금강) 만폭동은 조선 후기부터 말기까지 사대부들에게 당시 교조주의적 지배체계였던 성리학 중심의 규범적 예속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이자 숨통을 열어주는 ‘자궁회귀’적 공간이었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현장감 있는 필치로 썼듯, 만폭동은 금강산 권역 중, 두 계곡의 합수 지점으로 탐승자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씻어주는 주요 장소였다. 겸재의 후기 산수화들에서 특유의 거침없이 죽죽 그은 감흥 넘치는 촉각적 필치도 이런 시원함을 전한다. 이런 마음은 조선 시대 옛 서간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체험하거나 서찰, 그림 등을 본 느낌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기쁘고 쏟아지는 듯 후련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우절흔사, 又切欣瀉)’ ‘위안되고 후련한 마음이 끝이 없다(위사무이, 慰瀉無已)’, 또는 ‘위로받고 씻기는 마음이 진실로 지극하다(위완양지, 慰浣良至)’, ‘위로되어서 궁금한 마음이 툭 터지는 것이 갑절이나 되었다(위할일배, 慰割一倍)’라고 하는 식이다. 핵심어인 ‘사(瀉)’와 ‘완(浣)’은 각각 ‘쏟아내다’, ‘씻는다’라는 촉각적 어원을 가진다. 이번 〈빛선소리〉 공간에 서 있으며 촉각적 입자가 끝없는 파동으로 공간을 넘실거려 몸을 타고 흐르는 듯한 묘한 시원함을 느꼈다. 〈만폭동도〉와 동일하지는 않지만 〈손톱산수〉에도 ‘손톱’이라는 매체, 그리고 촉각과 청각에서 파생되는 후련함이 있다.
〈손톱산수〉는 당시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던 작가가 미술계 및 미술교육에 대해 회의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 상황에 자신의 신체 말단이자 각질로써 사물(사포)과 직접 접촉하는 행위를 할큄 소리로 증폭하고 자국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촉각과 소리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히스테릭한 방식이다. 촉감은 사물의 표면, 또는 신체 경계와의 접촉 감각이다. 임모 산수화임에도 손톱이라는 신체 표피적 각질을 붓과 표면 매체로 삼은 어법은 단지 빛이 전달하는 광자의 패턴에 반응하는 망막의 특수한 세포 중심의 단일시각을 옮긴 것이 아니다. 원작이 그러하듯, 〈손톱산수〉는 만폭동에서는 보이지도 않은 비로봉까지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는 광경을 신체 일부를 마모시키며 신경증적 감각을 동원하는 촉각적 이미지로 구현함으로써 귀 안쪽의 달팽이 기관 등이 함께 작동하는 신체성과 저항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질문’ 없는 대학원 실기실에 모종의 물리적이고 실질적 사건을 일으키고자 했다는 작가는 〈손톱산수〉를 그리는 동안 ‘쏟아내고’ ‘씻는’ 후련함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빛선소리〉의 원초적이며 시청각적인 공간에서 선사시대 동굴 벽화가 떠올랐다. 동굴 벽화들은 인간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하나 같이 불을 밝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조차 없는 틈새 공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드로잉적 요소와 촉각성이 두드러지는데 동물들의 놀라운 구상성과 인간의 형상이 기호화된 추상성이 공존한다. 그려진 그림 위에 다시 겹쳐 그려 마치 유동적 층상(層狀)을 이루는 현대 드로잉처럼 동적인 흐름까지 느낄 수 있다. (쇼베-퐁다르크 동굴 벽화에 이러한 겹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처럼 선사시대 벽화가 누대에 걸친 지속된 행위의 소산이라는 점은 ‘수렵과 채집’이라는 생존을 위한 일상적 노동과 달리 비일상적 동굴 공간에서의 마음의 작용에 따른 ‘그리는 행위’ 자체에 대한몰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상은 동굴벽화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방증한다.
동굴 속에서 암흑과 빛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은 빛과 어둠 사이에서 횃불의 흔들림 따라 일렁이며 출현한다. 칠흑 같은 공간 속에서는 어둠도 나의 피부, 나의 신체와 같다. 이러한 어둠 속에서의 나는 자신을 응시하는 것 안에 있으므로, 외부 세계의 지각이 아닌 내부 세계의 정동으로 교감하며 내면의 세계가 확장되는 장이 된다.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에 의하면 선사시대 벽화를 그리는 행위는 노동의 질서를 침범하는 낭비이지, 동물성, 또는 자연으로의 회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프리미티브한 행위에서 그가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간파한 것은 아름다운 형태나 색채의 제시가 아닌, 눈앞에 있는 대상의 지지체를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조작성이었다. 그림에 의해 벽면은 이전의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변질된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변질의 출현, 조작을 단서로 삼아, 예술의 기원을 탐색했고, 훗날 이것이 예술 인류학으로 이어졌다. 즉, 동굴 속에서만 가능했던 – 동기는 외적 체험에 기인하나 동굴 속에서 손으로 실현하는 순간 법열의 상태라 할 수 있는 – 새롭고도 놀라운 내적 체험, 또는 ‘인식의 유동성’을 예술의 기원 및 인류사적 전환점을 이루는 사건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드로잉처럼 보이는 느린 접촉 행위를 통해 공간을 소리파동이 울리고 반사되는 공간으로 전환시켜 김도희 작가가 밀도 높게 유지하려던 체험은 보이는 몸 경계를 넘어 몸 내부공간을 바깥과 잇고 시각 밖 더 넓은 차원에서 함께 공명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오랜 수행적 노동을 거친 미지의 선과 소리의 흐름으로 기존의 벽으로 둘러싼 공간이 변모되어 그 속 감상자의 살갗 경계를 두드리고 마찰하는 유기적인 예술적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신경과학에서 이미지는 단지 ‘시각 이미지’만이 아닌, 시각, 청각, 촉각, 내장감각 등 주요 감각통로에 의해 생성되는 모든 패턴을 뜻한다. 우리의 뇌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과 사건에 대한 뇌 신경패턴과 그에 대응하는 심적 이미지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촉발된 자극으로 인해 생성된, 신경전달물질이라고 하는 분자 차원의 활동에 의존하는 중추신경과 뇌의 창조물이다. 외부 세계에 대한 어떤 ‘느낌’도 유기체로서의 우리 몸의 내수용 감각과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인 ‘쌍방향 지각(interactive perception)’이라는 이중성을 갖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전통 서예가나 수묵화가 중 벼루 밑창이 뚫리도록 먹을 갈고, 몽당붓이 무덤에 이르도록 작업했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서예와 그림에 나타난 궤적과 강도에서 촉각적 감각과 함께 이를 지속시키는 ‘소리’에 대한 반응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뾰족한 연필이나 도구 끝을 이용해 매끈하게 물감이나 회반죽을 바른 캔버스 표면에 상처를 내거나 훼손, 긁거나 찌르는 기법의 현대 드로잉도 지각의 이중성과 관계한다. 즉, 감각체험을 통해 그들의 마음은 시각 너머로 확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손톱산수〉에서부터 이번 〈빛선소리〉에 이르기까지 김도희의 작업은 원초적 야성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한 생명력의 발현과 함께 몸과 마음이 깨어나는 창조적인 물질경험을 통해 현실을 넘어서는 예술가의 존재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Ⅲ.
최근 국내외 미술계는 특정 경향 및 작가의 상품화 현상과 더불어 패스티시, 또는 유사 미술 현상이 성행하는 추세다. 기후 변화, 전쟁과 테러, 젠더 문제, AI 시대 등 현시대의 온갖 사회적 이슈를 주제로 한 전시회들만이 넘쳐나니, 자본의 힘을 빌린 소모적 행사의 반복으로 보일 지경이다. 이에 역설적으로 세상의 몰이해 상황에서도 개별적 감수성과 체험에 근거한 자발적 탐구 정신으로 성립해온 현대미술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김도희 작가는 ‘사회적 함의’나 시각 중심의 의식적 명시성에 머물지 않고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자신의 체험을 확장하거나 재료를 육화하는 방식으로 제시해왔다. 이번 개인전에서도 작가는 비지(非知)의 세계인, 피부에 와 닿는 정서가(valence)에 초점을 두면서도 최대한 감각을 지연시키는 곡률을 가진 공간에서 참된 지(智)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나’란 존재는 무엇보다 우리 몸(유기체) 내부의 화학적 활동으로 생존하고, 외부 세계나 행동에 대한 지각은 우리 몸의 말단에 위치한 신경 장치(피부 내 촉각소체)에 의해서 촉발(발생)되는 중이라는 것. 또 이로부터 ‘나’와 ‘우리들’ 각자의 존재를, 나아가 ‘지금 무엇이 예술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의 피부(표면)와 물질 표면 사이의 소리(울림)로 묻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세상과 더불어 생성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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