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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종관, 〈이빨, 다리, 깃발, 폭탄〉: 미소한 사적 자리로부터
    REVIEW/Movie 2025. 11. 4. 22:02


    백종관 감독의 〈이빨, 다리, 깃발, 폭탄〉(이하 〈깃발〉)은 감독 자신이 모은 라디오 방송 아카이브와 영상들에서 각각 추출한 사운드와 이미지를 결합해 만든 작업으로, 그 둘은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데, 이는 라디오를 듣는 이의 시점에서 그 앞에 펼쳐진 것들에 결부되려는 어떤 시도로서 그 이미지들을 눈여겨보게 하지만, 그 간극은 라디오가 가진 본래적 장소성, ‘보이는 라디오’가 아닌, 듣는 이의 고유한, 특정한 장소성으로 환원되는 그 장소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상기시킨다. 더 정확히는 전혀 뒤늦지 않은, 동시적으로 합성되는 이 이미지의 자의성이 필연적인 가운데, 그 목소리는 그와 상관없이 명확하게 보존된다라는 라디오의 하나의 장소와 두 개의 몸―들리는 몸과 보이지 않는 몸―을 〈깃발〉은 따라간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몸이 감독에 대한 자기 지시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명확한 목소리와 대조적으로 〈깃발〉의 흐릿함은 현재의 이미지들의 몫으로, 주로 진행자와 참여자의 대화로 진행되는 장소의 떠오르는 형상은 그것들을 밟고 그것들에 지지되어 자신을 더 명확하게 드러내는 듯하다. 이는 진행자와 대담자가 특정되지 않은―그것은 필연적이다 또는 합목적적이다.―, 라디오를 녹음하는 작은 스튜디오 공간의 이미지가 삽입됨으로써 단순히 상상적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지지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이 부분들의 총체 속에서 유기적인 조각을 완성한다, 유기적이지 않은 영화의 지속 아래. 그리고 아마도 그렇게 듣기를 마주하려는 〈깃발〉의 흐릿한 몸은 그 말에 들러붙는 것들을 향하는 보이지 않는 몸이 향한 것들이다. 말은 일종의 이미지에 대한 단서이며, 그 이미지를 완수함에 따라 그 이미지에 대한 필연성을 선취한다. 곧 말이 공명하는 자리를 만듦으로써 〈깃발〉은 그 말이 가진 힘을 그 말에 되돌려주고자 하는 작업이다. 

    작업의 제목은 라디오 방송에 나온 브라질의 음악가 까에따노 벨로주(Caetano Veloso)의 노래 〈기쁨, 기쁨(Alegria, Alegria)〉에 대한 특정한 번역 판본의 가사 일부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그 뒤에 “브리짓 바르도”가 하나 더 있는데, 이를 제외한 네 개의 단어는 주로 후반 ‘깃발’의 이미지로 부상하며 정치적 이미지를 획득하는 가운데, 그 네 개의 단어의 관계성을 새롭게 압축하는 듯하다. 

    여기서 그 나머지 세 개의 단어에 상응하는 이미지를 찾아내거나 그 관계성을 분명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그다지 소용없는 일에 가깝다는 것은, 〈깃발〉이 말하는 바를 그 제목이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제목이 말하는 바가 곧 〈깃발〉이기 때문이다. 이 우연한 것들로서 단어들, 개념들의 (잠재성을 보존하는 차원에서의) 나열로서의 형식은 이 영화의 전개 방식 자체로 자리 잡는다. 그것은 이빨, 다리, 깃발, 폭탄에 대한 각각의 지칭이라기보다 또는 그 특수화라기보다 그 사이의 무한함에 대한, 그 거리를 봉쇄하는 그 우연한 것들의 부상에 대한 것이다. 

    한편으로, 이 우연한 것들은 의미보다는 의도를 향한다. 곧 〈깃발〉은 무언가를 바꾸는 대신에 무언가를 인용하는 차원에서만 쓰인다. 단어들은 그 듣기의 보전, 듣기의 숭고함 자체를 수용하는 방식, 수용될 수밖에 없으며, 기꺼이 수용한다는 적극적인 수동적 듣기의 자세로 지지되며, 또 그 듣기의 방식이나 자세 그 자체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깃발〉이 라디오가 주로, 주요하게 상대하는 음악이라는 매체의 심부를 향함을 가리킨다. 라디오는 내용이지만, 그것은 계속 잘려나가는 파편이다. 맥락으로 매끄럽게 확장되지 않는, 문장 속에 발견되는 단어들이다. 영화의 전개 방식은 인용으로만 가능한 그 단어들과 음악들을 뒤섞는 일종의 디제잉에 가깝다. 

    그럼에도 깃발들이 펼쳐진 시위 현장은 뚜렷하게 무의식적 왜상을 남기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것이 설명의 차원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제목이 지닌 예언성을 따라, 이후 폭탄에 대응하는 몇 가지 징후들, 가령 특정 시간에 다다르기 전의 카운트다운되는 시계음에 고착되는 반복, 거울에 이미지들, 가령 픽셀로 드러나는 완전히 ‘흐릿한’ (비)현실의 이미지, 곧 현실의 뭉개짐, 실재하는, 두드러지는, 현실의 마지막 이미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언어의 마지막 행렬이기도 하고, 그 개념이 갖고 있는 현격한 차이에 다가선 것이기도 하다. 

    다소 수동적인 방식으로서 대응, 곧 청취를 통한 계시적 차원의 추출, 그리고 거기에 목적(시나리오) 없는 현장에 대한 촬영들이 결부되는 방식은 그 둘의 정합적이지 않은 차원에서 우연적이고 즉흥적으로 맞물린다. 어떤 시간 안에 우연히 존재했던 것, 그 자의적인 기호들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던 카메라-작가의 무의식적 제스처는 언어라는 질서가 아니라면, 또 다른 자의적인 언어와의 간격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간극 자체의 시간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리라는 점에서, 라디오는, 곧 언어는 이미지를 엮는 매듭점으로 의미인 양 자리한다, 그 이미지와의 간격 안에서 이미지를 보존하면서. 

    단어들은 실은 머뭇거리며 덜컹거리는데, 그것이 하나의 장들로 연장됨으로써 그 유격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 의미(의 연결성) 역시도 분명해진다. 마치 이 단어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재료와 매체적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빨(말), 다리(연결), 깃발(저곳에서의 전언, 송신), 폭탄(저곳의 존재가 가한 이곳 안의 충격, 또는 그 반대의 연결). 그리고 그것은 라디오의 매체적 속성에 조응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저곳으로부터 이곳에 맺히는 이미지, 또는 이곳이 지닌 다른 이미지라는 그 장소성의 연결은, 〈깃발〉에서 자의적인 언어와 이미지의 결속의 형태로 응결되는 가운데, 이곳과 저곳의 ‘간격’ 자체를 드러내는 데 가깝다. 그러니까 깃발의 현장이 유령의 배회로 나타나는 건 일정한 거리로서 저곳에 대한 관찰, 무엇보다 유보하며 가닿는 주체의 충동 때문이다. 

    작가의 아카이브의 두 경로, 작가의 의미 없는 분투로서 카메라, 유예되는 라디오 녹음은 그 고유한 시간의 지층을 펼쳐놓는 지점에서 저 먼 곳으로부터 현상되며, 거대한 시간에 대한 사적 컬렉션은 발화를 유예한 채 미시사적 차원에 대한 무의식적 제스처로서 손짓한다. 홈비디오의 기억, 오래된 필름의 현상과 같은 것들 속에서, 잔재와 파편의 헤집음 속에서 작가는 언어의 성사와 필연성의 자리를 수호하려 한다. 그것은 결국 역사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개인의 미소한 자리를 확인시킨다. 필연적인 걸 도출하기 위해 반드시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자리를.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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