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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숨은 존재들〉: 존재의 용출로서 세계 또는 한계적 신체를 향하여PREVIEW/Dance 2026. 11. 6. 14:47
망으로서 표면

김보라, 〈숨은 존재들〉©윤관희 [사진 제공=아트프로젝트보라](이하 상동). 〈숨은 존재들〉은 역설적으로/필연적으로 숨은 존재들의 현시됨을 보여주는데, 이는 지나치게 긴 첫 등장 장면 이전에 이들의 숨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극장 자체를 현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곧 극장 무대를 전유하여 회전 무대 바깥으로 4면의 객석이 X자로 교차하여 마주 보는 구조 아래, 하수와 상수의 날개 위아래로 이 ‘숨은 존재들’이 등장하기까지 약간의 지연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공연의 의도적인 지연이 부재의 공간과 그것의 식역이 발생하는 공간의 틈을 현상한다. 시간의 간격은 곧 공간의 간격이다. 프로시니엄 아치의 하수 무대 가, 객석 끝에 맞물리는, 주로 털실 뭉치로 이뤄진 패치워크 망이 무대 바깥으로 흘러내리듯 위치하여 공간의 경계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무대의 몸과 공간의 식역을 통과하는 관객의 몸이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는 무대의 내장 같은 기호의 유출을 피하는 게 아니라 수용하며 또는 함입하며 들어가야 함을 무의식적 차원에서 상기시킨다.
이 사물-공간, 구멍-구덩이(의 외화) 같은 장소는 이제 누더기를 걸친 듯한 퍼포머들로 연장된다. 단정한 니트 직물에 가깝지만 삼베와 같은 색상과 결로 언뜻 비치는 이 겉감은 의도적으로 안감을 뒤집어 구성한 것이며, “버섯”의 균망 같은 느낌으로 몸체를 싸고 있는 표면, 일종의 주머니에 쌓인 신체의 차원으로 합성된다. 곧 몸에 부속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몸의, 독립적인 신체 형상으로서 몸을 함축한다.
중후반의 몸을 접고 또 접는 방식으로 움츠러들 때 그것은 몸을 싸고 있는 싸개로서 몸의 근육과 뼈가 꿈틀거리고 꾸불거리며 유동하는 신체의 형상이 비치고 반향되는 얇고 연약한 막 혹은 피부가 된다. 그것은 이때 몸을 투명하게 가시화하고 몸의 영향을 입지만 독립적인 막으로서 자신의 구조를 지켜낸다.
바깥에 대한 서사 그리고 집단성의 소리

옷의 ‘사이’에 움직임이 있듯, 망과 존재 사이에, 나아가 존재와 존재 사이에 움직임이 있다. 그것은 지배적 관계가 아니라, 유격과 틈을 조율하는 예민하고 섬세한 접촉의 방식이며, 특히 망과 존재의 관계에서는 사물을 존재화하고 존재를 사물화하며 대등해지는 과정에 가깝다. 사실 존재들은 인격적 차원이 소거된 비체에 가깝다. 이는 머리부터 상체 전반으로 내려온 누더기에 가까운 착장으로부터 연극적 차원에서의 일단의 서사를 상기시키는 바 있다.
존재를 감추고 바람을 막는 이 옷으로부터 곧 사회 바깥의 존재들이라는 위상, 추방된 황야라는 장소성, 주연이 아닌 코러스로서 역할이 그려진다. 이들은 또한 발화 대신에 신음이나 단말마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비언어, 전-언어적 차원의 소리만을 가진다. 일종의 연극적 차원의 이미지가 거둬지는 건 이 세계가 전체이며, 이 모든 것이 그 자체의 형식으로 연장되고 있음이 체감될 때이다.
사실 움직임뿐만 아니라 소리 역시 안무적 배치의 산물인데, 자의적이고 불연속적인 치찰음이나 파찰음은 일종의 커다란 공동(空洞)의 장소를 불연속적인 연속성으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 곧 각자의 리듬이 개체 스스로에게는 불연속적인 것이라면, 전체의 장에서 그것의 독립적인 격발은 겹치지 않는 차원에서 순차적이고 연속적으로 이행된다―하지만 이 순서는 고정되기보다 다양성과 무작위성의 차원을 띤다는 점에서 물리적 차원의 불연속성을 전제한다.
이러한 의도치 않은 (불협)화음의 집단적 제스처는 근래 황수현의 〈싱크 디 싱크〉를 상기시키는 바 있는데1, 〈싱크 디 싱크〉가 화음으로서 형식 자체를 밀어붙인다면―그러니까 신체는 화음-기계가 된다면―, 〈숨은 존재들〉은 전의식적, 무의식적 차원의 신체성이 사물과의 경계가 무화된 지점에서, 비말처럼 터져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체 연장의 측면을 기입하는 데 가깝다. 그러니까 일종의 형식 이전에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과 같고, 결과적으로 형식이 겹쳐지는 바다―황수현의 퍼포머가 투명한 매체를 상정한다면, 김보라의 퍼포머는 불투명한 인격을 상정한다.
균사 네트워크적 생성

이는 따라서 표면적으로는 이윤정의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의 호흡 기술에 조금 더 조응되는 듯 보이는데2, 그것은 주체가 형식 이전에 형식이 주체에 함입되고 담지되는 형태로 나타나며, 일종의 “중간”으로서 소리가 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숨은 존재들〉에서 소리는 움직임이 극단에 이르는, 점진적인 과정에서의 움직임의 격발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는 그 자체로 예리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호흡 기술이기도 하지만, 언어가 아닌 것의 발화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곧 발화와 생체 신호의 어느 사이에 있다.
일종의 눈치 게임의 일환으로, 맞물림 없이 빈칸을 차지하여 전체가 촘촘하게 짜이는 형국은, 실은 창발성의 교신-네트워크를 전제하며, 일종의 균사 네트워크의 알레고리 역시 지닌다―곧 통기성의 옷, 곧 균망을 공통으로 취하는 개인들이 형성한 커다란 또 하나의 균망으로서 집단.
여기서 연약한 피부, 독립된 피부로서 옷의 특질이 그것을 잡고 지지하고 지탱되며 그것과 엮이고 연루되는 과정으로서 네트(-)워크(Net·work) 자체임을, 또한 그러한 독립적 지각들의 합산이 하나의 네트워크 안의 연루임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헐겁고 느슨한 동시에 진득하면서도 강도 높인 잣기의 기술은, 다른 신체성 간의 접촉과 전이, 어떤 부산물 혹은 잔여의 산출을 유도한다. 그리고 이는 중반 이후 망을 무대로 펼치며 천천히 이동할 때, 주황빛 비닐이 중간중간 드러나며 마치 그것 안에 담긴 망과 포장 용지가 분별없이 뒤섞이는 이미지, 곧 피부 안쪽이 드러나고, 겉감이 피부 자체로서 전이되는 오염의 연루가 이뤄지는 것에서 좀 더 파괴적이고 해체적인 심상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것은 중층의 피부, 각기 다른 피부로서 여러 재료들이 합선되어 있는 오브제층의 속살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데, 그것의 휩쓸려감은 무대 중앙부에 처음부터 놓인 구불거리는 흰 천 위에 흙에 심어진 초록색 풀들도 포함한다. 이러한 휩쓸림은 무대 자체를 오염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는 균사 네트워크 과정에서 포자를 옮기는 과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오염된 것과 생태가 뒤섞인 파괴되고 어지러운 환경 자체의 영토를 육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접성의 가시화

이 신음들이 점차 하수에서부터 상수로 향해 오면서 회전 무대의 반경을 이루게 되었을 때, 회전 무대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따라서 객석 가까이 스쳐 지나가기에 이르는데, 퍼포머는 관객을 의도적으로 향하(여 움직이)지 않은 채 관객과 근접해진다. 관객은 본의 아니게 관음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사실 이로써 연장되는 건, 클로즈업되는 건 지난 김보라의 작업, 〈내가 물에서 본 것〉의 비의식적 집단의 사물과의3 또 존재 간4의 얽힘 또는 엉킴이다.
어쩌면/아마도 〈숨은 존재들〉은 〈내가 물에서 본 것〉의 이머시브 버전에 가깝다고도 할 것인데, 프로시니엄 아치가 일종의 블랙박스로 바뀌며, 관객이 무대 바깥에서 무대로 옮겨지며, 조망되던 윤곽이 실체적 진실로서, 과잉된 이미지로서 부상하게 된다. 파란 비닐을 뜯던 손길은 옷을 기우는, 옷에 기워지는 신체적 경험으로 이전된다.
의료 시스템 내에서 버려진, 소거된 존재의 자리5를 재형상화함은 이제 지구적인, 거시적인 차원으로, 원시-미래의 차원에서의 불특정한 다수의 존재, 생태와 쓰레기가 혼합된, 자연과 인공이 뒤섞인 환경으로 확장한다. 이로써 인류의 새로운 관계의 발생―주황색 비닐봉투로부터의 미세 플라스틱이 함유된 신체―, 새로운 관계에 대한 탐침―사물과의 적극적인 연루 작용―의 자세 모두를 가시화한다.
호흡 특정적 신체들

〈숨은 존재들〉은 침묵 속에서 등장하며 극단적으로 공간 전체를 뒤덮은 사운드 스케이프의 정점에서 다시 무대로 회귀하며, 단말마 같은 소음을 내는 것들에서 종료된다. 사실, 처음의 침묵은 침묵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임을 감축시키는 것에서 오지만, 근본적으로는 침묵의 연장선상에서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침묵을 위한 움직임은 침묵이 지탱하는 움직임이다. 침묵을 초과하지 못하는 신체는 실은 신체를 초과하는 침묵의 반향, 잔음 같은 것이다.
마지막 침묵의 반대편은 실은 무대 위의 소리를 소거하는 환상적 장치로서 가시화되며, 그것이 단지 지워지기 위한 차원에서 곧 사라지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극단적인 자신의 자리를 (암전에 이름과 함께) 내세웠음이 드러난다. 곧 무대 위에서 존재는 계속되며, 계속되고 있었다. 침묵과 소음은 공통되게 두 개가 하나의 지배적 기호로서 현전한다는 점에서 기실 다르지 않다. 침묵은 부재를 듣는 것이며, 그것 속에서 아우성치는 몸들을 자각하는 일이 된다.
침묵의 신체들은 침묵 아래 있는 게 아니라, 침묵 그 자체를 체현한다. 이는 시각적 도상이 아니라 시간적 차원의 지속을 담보한다. 곧 침묵의 차원에 이르는 신체성을 시각적으로 정위하기 힘든 것은, 그것이 호흡으로 묶여 있는 탓에, 그것을 보는 이는 그 호흡을 가시화하기 힘든 탓에, 어쩌면 그만큼의 숨을 참아야 하는 탓에, 이 신체들은 실은 청각적 단위로써만 (제대로) 파지가 가능하다.
신체는 느슨해지지 않고 어떤 강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의 긴 시간성으로 지속된다. 그것이 곧 보이지 않지만 지속되는 호흡의 단위에 묶여 있는 신체이다. 〈숨은 존재들〉의 후반에 두드러지는 움직임은 꼬고 비트는 것이다. 무릎을 접고 고개를 거기에 파묻고 수그러든다. 하지만 튀어나온 신체, 가령 척추와 발가락은 곧추서고, 온 힘이 가해진다. 어쩌면 이런 몸짓은 정형 행동의 고착이나 부토를 소매틱으로써 (탈)승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내부라는 세계

신체가 사물성을 드러낼 때, 〈숨은 존재들〉은 원형의 회전판 위의 가를 둘러싸고 (이제는 수동으로) 이동하게 함으로써 그것의 강도를 거의 해부학적 차원으로 연장하며 이미지화한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지향적 가까움이 아니라 가까움을 배치적으로 수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것의 의도성을 갖지 않음으로 인해 또한 가까운 사물, 오브제가 된다.
퍼포머는 관객이 아니라 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것은 일종의 사물에 입각한 자기 반향이다. 커튼콜에서는 원형의 대열을 이뤄 양 옆 사람의 등/허리에 손을 갖다대서 관객 이전에 서로를 마주하고 반향하는 것으로써 그것을 극적으로 연장한다. 그것은 우정과 연대의 차원이 가설한 공동체적 반향 공간으로서 앞선 시간을 갈음한다. 그렇다면 바깥은 있는가.
〈숨은 존재들〉은 관객이 세계의 내부를 경계 바깥에서 보는 것과 같다. 그 세계 자체는 경계 바깥이 의식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관객이 무대에 공존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그 세계의 단일성과 자족성, 그와 동시에 그것과의 격차를 선명하게 확인하는 것이 된다―제4의 벽은 두꺼워진다. 이는 관객과의 소통과 퍼포먼스의 강렬한/강력한 현전이 그 자체로 같지 않음을 보여주며, 퍼포머의 내재적인/고유한/즉자적인 존재 방식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러니까 그들은 바깥으로 발화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발화하는 것을 우리가 숨어서 목격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구조가 있다면 오직 그 내부에서 성립하고, 집단성의 상호 연루를 전제하는 것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며―앞서 말한 것처럼 교신하는 일종의 네트워크망으로서―, 그것은 통약 가능한 차원의 발화로 바깥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전한 하나의 표현으로 전달되며, 그 외양을 살피고 식별하는 것에 가깝다―이것이 곧 〈숨은 존재들〉을 보는/감각하는 일이다.
신체를 정형함으로써 세계를 구성하는 법

〈숨은 존재들〉은 퍼포머가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방식을 의도치 않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은 집단적으로 각축하지만, 실은 퍼포머의 고유성은 유지된다. 어떤 하나의 강도를 지속하는 몸짓의 방식은 그것이 신체성을 마디마디 분절해 힘을 투출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각자의 다른 신체성에 의존되어 그 힘이 발현되게 된다. 몸의 경로와 몸에의 경로는 다르다. 그런데 관객은 그의 호흡 경로로서 신체를 본다.
그의 발화를 듣지만 또한 보며, 듣는다기보다 본다. 몸의 궤적을 따라 가며, 몸의 궤적은 호흡의 연장이며, 그것이 그런 방식으로 생존하고 있음을, 자신을 지탱하면서 지지되는, 바닥과 옷과 섞이며 반죽되는, 비정형의, 유체의, 용해되는 기이한 몸덩어리로 구가되고 있음을, 그러니까 그의 내부에의 압력이 세계 자체의 경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그것이 곧 하나의 생존의 양태임을 보는 것과 같다.
몸은 내재적이며, 또한 자신은 그 자신의 몸에 부속적인 한편, 자기 몸을 세계로 만든다. 그것은 마치 자기를 이탈하려는 몸짓이면서, 결코 이탈할 수 없이 붙잡히는 몸짓이다. 〈숨은 존재들〉은 몸의 한계를 가시화하면서 몸이 어떻게 내재적으로 깎이며 더듬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등뼈의 외곽과 솟아오름의 형상, 단말마의 숨/소리와 격발되는 신체, 발화가 아닌 발화의 희미한 틈새를 지시하는 그 숨/소리 이 모든 것은 미시 지각의 차원이 고도화된 것이다.
신체 내재적 연장에서 힘겹게 구성되어 가는 어떤 지연된 표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숨은 존재들〉은 존재들의 숨어 있음(에 대한 맥락)을 서사화하기보다는 존재의 숨어 있는 존재성 자체를 드러내며, 따라서 존재들(의 외부로의 숨겨짐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 존재들 안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낸다. 존재들은 자신의 비밀을 용출한다. 그런데 그것은 숨김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숨음이 전체화되는 것 자체(로서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 2026.10.03 ~ 2026.10.04 토요일 19:00 / 일요일 15:00, 19:00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예술감독 및 안무 / 김보라
리서치 및 퍼포먼스 / 박상미, 최소영, 윤태준, 이규헌, 손승리, 최민선, 김윤지, 고유진
사운드 컴포지션 및 디자인 / 장재호
텍스타일 시노그라피 / 김은경
조명 디자인 / 김병구
무대감독 / 김인성
음향감독 / 허선영
사진 / 윤관희
영상 / 김창구
그래픽 디자인 / 홍의택
콘텐츠 커뮤니케이션 및 아카이브/ 박정희, 임지우
프로젝트 매니저/ 이현미
프로듀서 / 이미진
공동기획 / 아르코, 대학로 예술극장
주최, 주관 / 아트프로젝트보라
- 1. “이는 타동적인 언어-신체의 양상을 가시화한다. 그 외에도 모두는 주도적이지만, 일종의 화음 기계의 일부로서 기능하는 차원에서 그러하며, 이러한 불균질한 명확한, 공정한 비매끄러운 조합은 중심된 주체의 자리를 파지한다.”, 김민관, 「황수현, 〈싱크 디 싱크〉: 언어라는 신체성, 그리고 신체성으로서 언어」 ,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356. [본문으로]
- 2. “(중략) 〈아닌 것이 아닌〉은 소리의 가시화 자체가 표현의 완수가 아니라, 움직임의 통로로서 이전되는 (중략) 이윤정의 작업에서 소리는 오로지 몸의 중간 과정으로서만 획득되는 무엇이다.”, 김민관, 「이윤정, 〈아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비기능적인, 비의도적인 움직임」,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032. [본문으로]
- 3. “이 사물들은 독립적이지 않으며, 행위의 근거가 되는 동시에 그 행위와 결속된 차원에서 그 사물이 갖는 의미를 행위가 갖는 의미와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며, 사실상 그 의미(의 부재)를 은폐하고 망각하게 한다.”, 김민관, 「국립현대무용단, 〈내가 물에서 본 것〉(안무 김보라): 아직 말해지지 않은 신체를 던져놓기」 , 《아트신》, https://www.artscene.co.kr/2332. [본문으로]
- 4. “엄밀히 뒤섞임이 아니라 분별의 차원을 만드는 이 집단의 차원은 서로를 비켜나며 자리한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정합적이며, 그러면서도 일정한 대형을 일정 시간 동안 유지한다는 점에서 자의적이고 우연적이다.”, 위의 웹 페이지. [본문으로]
- 5. “이때 몸의 정상 기준을 밑도는 저하된 몸, 갖은 화학 공정의 투여로써 재결정되는 몸, 불순물과 잉여가 침범하며 잠식하는 몸, 온갖 증상과 상상으로써 탈구되고 괴리되는 몸”, 위의 웹 페이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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