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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 파드미니 체투 : 「아름다운 것 2」 ‘이 안에 있다’, 현존의 조건
    카테고리 없음 2011. 5. 14. 07:54


     

    보는 게 아닌 엄밀히 시공간 속에서 시공간을 감지하고, 어떤 순간의 지점들을 찾는 것, 변화 내지 시공간의 변화를 뒤늦게 몸으로 감지하는 것.

    작품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실 같은 허위를 직시하는 것이자 최소한의 정보가 제공될 때 더 큰 몰입을 이끌어내는 맥루한의 차가운 매체 속성을 띠는 것도 같다. 움직임이 최소화된 이 시공간은 너무 가득 차 있어 실제 그 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다고 뭘 본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분명 움직임을 그런 순간에서도 놓치거나 잔상 같은 지난 움직임을 지금과 관련짓거나 또는 뒤늦게 감지하는 신체 감각들로부터의 인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지 움직임만이, 움직이지 않는 움직임.


     천천히 이동하는 무대에서 홀연히 그녀는 존재한다.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간 자체를 성립시킨다. 이른바 공간 안에 그녀가 등장하는 것이 아닌 그녀가 있음은 공간이 상정된다는 사실과 등가 한다. 그 공간 자체를 변화시키는 움직임은 움직임을 움직임 자체로 발산하는 게 아닌, 움직이고 있다는 아주 미세한 차이만을 느리게 좇는 데 가깝다. 거의 잡히지 않는 느릿하고도 지루한 움직임은 춤의 표현 자체에 대한 일련의 고정관념들에서 탈피하여 작동된다.

    본다는 것의 개념 또한 다른 식으로 정의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공간에서의 차이들의 분절적 조합과 꿈틀거림, 반복의 쌓아 감은 지향 없는, 메시지 없는, 기의 없는 기표들의 생성이고, 움직임을 특정하게 만드는 게 아닌 공간 자체의 틈을 찾고 균열을 내며 공간을 새로이 직조하는 것에 가까운데, 이른바 움직임이 최소화된 움직임의 시공간의 구축은 일련의 실험처럼 만들어졌다 분쇄된다.

    단지 흘러간, 이미 없었던 것과 같이 그녀는 움직임을 멈추고 다른 판을 짠다.
    이것은 어떤 완성이나 표현을 위한 표현이 아니다.
    표현 전 단계적인 것을 찾아나가는 과정 자체에 가깝고, 공간과 일체화된 움직임의 과정을 쌓아나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명과 사운드는 그 안에서 일체화되어 있고 최소화되어 있다.
    마치 환영의 일부였던 것처럼 동작이 판이 끝나고 날 때 조명이 앞을 비추기도 한다. 빛은 기억을 망각하고 새로 기억을 지우는 것 같다.

    보통의 무대의 어둠은 마치 그 암전 상황에서의 자취를 더듬어가는 것과 같다면 오히려 표현으로서 조명은 그 암전의 상황을 대신해 판타지로서 시간을 지우고 어둠의 공간을 어둠 속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다.
    사운드 또한 최소화되는데, 그녀는 움직이면서 발을 비틀거나 해서 포즈 잡기에서 공간을 선회하거나 할 때 발로 무대를 비틀어 끼익 소리를 내는데, 공간을 사운드로 치환하며 공간의 울림을 전한다.

    사운드는 감정을 만들어 내거나 움직임에 맞춰지는 게 아니라 움직임으로부터 파생된, 그래서 공간과 연결되는 것으로 전유되는 것이다.


    반면 후반에 어떤 유연한 움직임의 흐름을 만들 것이라는 일련의 기대감은 여전한 굼벵이 같은 느린 움직임, 아니 포즈 잡기 내지 포즈들의 구축, 시공간을 이전과 같은 움직임 아닌 움직임이 어떤 음악 같은 사운드들의 증폭으로 거세지는데 이는 진공 같은 시간의 원시성의 분위기 자체를 흘려내는 것 자체로, 그 이상을 넘어가지는 않는다. 이 안에 있다, 이 안에 선행하고 있음의 하나의 원칙 같은 메타 레이어는 솔직하고도 투박하게 있다.

    어떤 규칙을 만들고 미니멀한 시공간, 그렇지만 에너지로 가득한 무대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표현의 전단계적인 표현을 보는 것, 보는 것이 아닌 시공간을 재전유하는 것의 움직임이다.

    [사진 제공=페스티벌 봄]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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