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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리뷰 : '스펙터클·정념·과잉의 미학'
    REVIEW/Theater 2011. 11. 27. 23:15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사진 제공=엘지아트센터]

    무대의 삼면의 막과 거대한 석상들, 세 시간이 넘는 시간에 펼쳐지는 스펙터클 이미지는 그것을 품을 수 있는 우렁찬 신체 발성의 공명에 의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삼 면의 막은 스펙터클에 앞서 오히려 울림 판 역할로 유효하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간 사랑은 짧고 강렬하게 표출되는 환영적 순간을 낳는 반면, 이 둘의 사랑은 주변 정치적 세력의 암투와 전쟁의 소용돌이에 좌우되는 국면을 보인다.

    클레오파트라는 더욱 강력한 왕과의 관계를 모색하는(사실 이는 안토니를 더욱 권위‧위엄 있는 자의 자리로 두게 하려는, 사랑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지향점이 실은 사랑을 가능케 하는 욕망의 지점이라는 것에서 그 자리바꿈은 변절이나 변질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회주의적 성격이 안토니와의 사랑을 상대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반면, 안토니는 사랑 바깥에 어떤 현실도 두지 않는다.

    그는 마치 패배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것에서 절망‧체념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한 여자라는 세계의 바깥에 자신을 둘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인다. 한편 이는 국가의 안위를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윤리의식 역시 부재‧망각한 듯 보인다.
    사실상 사랑을 하는 순간에 이 모든 것은 해체‧해제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하강은 치욕이자 죽음이며 실제 바깥의 현실을 그리지 못 한다.

    곧 안토니나 클레오파트라는 상징계의 질서, 초자아의 명령 따위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인물들이다. 유희적인 행동들에 드러나는 유아적인 면모는 한편 신과 교통하는(신의 뜻과 운명을 결부 짓는 여러 수사학적 비유들이 자연스럽게 전유되는, 이른바 전근대적인 시공간이 작품의 시공간을 이룬다) 신화적 세계에서 신적 지위를 갖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다.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사진 제공=엘지아트센터]

    그렇지만 안토니가 신의 담대한 가슴과 제멋대로 행동하는 신화적 인물로 자리하는 가운데 영원불멸한 생명 또는 천상계와 바로 직결되는(그렇게 인식‧비유되는) 죽음의 형태를 띤 생명은 그것을 스스로 끊고자 하는 안토니의 행동에서 미약한 신체의 인간성이 드러난다. 곧 죽음을 부인하고 죽음이 부재하는 신화적 세계의 신념은 해체된다.

    헐떡이는 숨으로 클레오파트라의 품에 안기기까지 그의 죽음은 유예되는 가운데 위대한 영웅의 죽음은 비극의 고양과 절정을 향해 준비되는 셈이지만 실은 인간의 미약한 (죽음이 결부된) 삶의 자리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 한다.

    반면 이 스펙터클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삶은 로마와 이집트의 한 시공간을 그 둘의 비극적 이야기의 초상을 비극으로서 온전히 완성시키는 데 이른다.

    셰익스피어의 또한 로마‧이집트의 한 시공간을 이 작품은 재현하는 대신 완성하고 또한 새롭게 드러낸다. 반면 이 스펙터클의 미학, 일본의(동양적) 정서와 미적 지향, 독특하고도 확고한 신체 발성의 표현의 온전함과 완성은 재현과의 차이를 낳지만(조금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서양 원작의 동양적 전유), 동시에 극적 범주 안에서 비극이 재현되던 시기에의 비극이라는 또 하나의 재현을 이룬다.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사진 제공=엘지아트센터]

    과잉의 연극이자 스펙터클한 무대, 그리고 그를 지배하는 신체 발성은 각각 환영과 실재를 묘하게 교차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안토니에 대한 애도, 그리고 그 스스로의 죽음에 대한 쓸쓸한 애도 의식은 그에 대한 직접적 몰입 대신 그 바깥에서 그들의 주변인의 지위로서 성립된다. 곧 우리는 애도하는 그들의 행위에 동조하기보다(함께 비극을 맞기보다) 애도되는 그들을 애도의 눈길로 바라봐야 한다. 곧 이들의 죽음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관객의 상태를 만들어 일종의 숭고의 미학(칸트)에 관객을 자리하게 한다.

    이는 영리하게도 극이 끝나자마자 극의 시작에서 단체로 일렬로 서서 관객에게 인사를 하며 역할과 배우를 중첩시키던 이들이 죽음 뒤에 다시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또 하나의 극(현실로)의 도입부를 만들고 있고, 정서를 고양하는 음악은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대신 죽음의 자리에서부터 스멀스멀 배어나오기 시작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이어짐으로써 역할에서 배우로 돌아오는 일종의 통과의례적 시간을 극의 연장선상으로 벌려 놓고 있다. 그래서 관객이 이 연극에 치는 박수는 매우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것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는 하강이 파멸인, 하강을 모르는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 주변의 마치 맥베스에서 광대와 같은 역할의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내지는 클레오파트라를 희극적(유아적 행태‧언어‧글에서 나타나는)으로 묘사함으로써 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를 걸어 놓았는데, 이들의 죽음이 그려지고 그 바깥의 인물들의 진술을 덧붙임으로써 이 죽음에 대한 해설(죽음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동시에)과 함께 고결한 죽음으로서 이들의 죽음과 사랑을 격상시킨다.

    ▲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사진 제공=엘지아트센터]

    실상 파토스가 마구 솟구치는 그리고 위엄과 권위가 지배하는 신체 발성의 1부(인터미션 이전의)는 사건들의 나열과 전개에 가까웠다면, 그리고 둘의 사랑의 환영성을 각인시키는, 또 이후 그것을 추억케 만드는 예비 작업의 무대였다면, 2부는 시작 이후 안토니의 전쟁의 실패가 파국의 그림자를 띄울 때, 들릴 듯 말 듯 들려오는 음악은 신적 지위와 담대함을 잃은, 초자아의 권능을 상실한,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인 탄식을 내뱉는 나약한 인간으로 자리할 때와 맞물리며 안토니가 신화의 인물이 아닌 모습으로 관객의 곁에 긴밀하게 다가오는 명확하게 대별되는 순간을 안고 있다.

    전면을 향해 꼿꼿이 선 클레오파트라의 권능과 동시에 자리하는 마력이 안토니의 권위를 오히려 상회할 정도라면, 그럼으로써 둘은 하강/땅/현실을 모르는 나르시시즘적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면, 안토니가 죽음 이전에 유일하게 땅에 부착되고 그래서 주변의 인물들에 따스한 온기 어린 손길을 보내는 것 역시 여기서부터 이 순간만 해당된다.

    과연 이 신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셰익스피어가 갖는 인물들에 대한 객관적 시선과 교훈의 가미를 넘어 이 연극은 정념의 연극(실상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이 드러나는 가운데 로미오와 줄리엣에서의 초자아로서 가문의 명령이 자리하는 것 대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운명이라는 신의 뜻이 이들의 삶에 가로 놓이는 이야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으로서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달려온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 고전의 현대적 변용과 재해석이라기보다는 고전의 완벽한 현대적 재현(결국 고전의 재현)이 아닐까.

    [공연 개요]
    일 시 11/24(목) ~ 11/27(일) – 총 5회
    평일 오후 7:30 / (토) 오후 1:30 & 7:30 / (일) 오후 3:00
    주최/장소 LG아트센터 (지하철2호선 역삼역 7번 출구)
    입 장 권 R석 70,000 / S석 50,000 / A석 30,000원
    문의/예매 LG아트센터 (02)2005-0114
    www.lgart.com
    연 출 니나가와 유키오(蜷川幸雄)
    제 작 일본 Saitama Ars Foundation, HoriPro Inc.
    출 연 요시다 고타로(吉田鋼太郞), 아란 케이(安蘭けい), 이케우치 히로유키(池内博之), 하시모토 준(橋本じゅん), 나카가와 안나(中川安奈), 쿠마가이 마미(熊谷真実) 외

    * 일본어 공연, 한국어 자막 제공
    * 공연시간: 총 3시간 20분 (중간휴식 15분 포함)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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