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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알이 춤뵈기] '안은미컴퍼니 신인안무가전'
    REVIEW/Dance 2013. 1. 23. 23:47

     

    지난 17~18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2013 두산아트랩(주최: 두산아트센터) 두 번째 프로그램인 '안은미컴퍼니 신진안무가전 <김혜경 김기범 정완영> 편을 찾았다.


    안은미컴퍼니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 온 3명의 젊은 안무가들이 각자의 공연을 펼치고, 무료로 관객이 사전 신청해 볼 수 있는 형태로 진행됐다.

     

    김혜경의 '밥풀'은 그야말로 맨몸으로 현존하기, 동시에 콘텍스트 만들기다. ‘밥풀과 뒤엉켜 한 몸 되기’로 축약 가능한 김혜경의 ‘밥풀’은 무모한데, 밥에서 구르다 밥을 떼어 먹기에 이른다. 처음 음악은 단속적으로 끊겼다 시작되며 배경이라기보다 인터액션적인 측면에서 춤과 맞물리는 측면이 있고, 등장 이후 포즈들은 모델 포스를 방불케 한다. 보자기를 뭉치고, 의식儀式적인 마음가짐을 다잡은 이후 일견 스티로폼으로 느껴지는 하얀 터전에 들어서면, 달라붙음의 점도로 밥풀임을 증명한다.

     

    밥 속에 파고드는 건 땅으로의 하강 모티브, 곧 차가운 도시가 아닌 땅과 섞인다는 지점이 분명 있는데, 오히려 상승적 도약으로 하강하는 탄력적인 움직임은 그저 구른다기보다 몸이 곧 밥이 되며, 축제의 장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몸을 입고 생성될 수 있다는 것에 가깝다. 곧 현존이라는 키워드는 실존이라는 단편적인 내면과 위태로운 세계의 측면을 전복하는 무無와의 마주함의 측면에서 벗어나 오히려 풍성한 우리만의 콘텍스트가 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조명이 닫히며 어둠의 제어할 수 없는 것을 전제하고, 끝나지 않음, 슬픈 삶의 운명 같은 어둠을 맞았다.

     

    김기범의 '오빠 믿어!!'는 오토바이 정비소에서 분해한 오토바이 조립이란 현실을 안무로 마감한 것인데, 극적 현실의 시간은 현재적이고 안무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여기저기 널린 오토바이 부품들은 일견 디스토피아 세계를 상기시키는 부분도 있는데, 등장하는 배우들(이 공연의 경우 무용수라는 말보다 더 타당해 보인다)의 움직임이 꽤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라 곧 이는 깨지고 만다.

     

    써니 데이즈 ‘가져가’란 노래에 맞춰 춤추기는 안무가 아닌 극 속의 한 현실이다. 극적 시간의 연속된 시간은 현재의 시간으로 동일하게 흐른다. 연체동물의 움직임에 매끈한 바디를 드러내며 예컨대 ‘비’와 같은 대중문화 속 움직임을 전유하기도 한다. 이덕화가 ‘트라이’ 광고를 할 때 벽을 때리는 것과 같이, 스킨을 ‘착’ 하고 바를 때 느낌의 뒤를 잇는 주먹을 꽉 쥐는 동작도 재미를 준다.

     

    더운 여름 기후에 샤워를 하는 남자, 사다리를 가져와 위에서 물을 뿌리자 뭔가 달라진 시간대와 만나게 된다. 이런 외부성의 요소는 극의 느슨한 네트워크와 협업의 횡단임을 직감케 하는 부분이 있는데, 같은 사람이 다른 작품에도 끼어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이후 다룰 ‘꽃좀비’).

     

    끝으로 무대 위 오토바이 엔진소리가 이 밀도를 넘친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고 무대는 텅텅 비는데, 극에 일상의 시간으로 여겨지는 환영적 시간의 도입, 그리고 프라모델 조립기와 같은 욕망이 투영된 오토바이 조립, 매끈한 대중 전유물의 바디 등이 꽤 우스꽝스러운 극을 도출한다.

     

    정완영의 ‘꽃좀비’는 영화 ‘링’ 시리즈물의 비디오테이프로 전염되는 미디어가 매개하는 가상의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를 패러디하면 시작한다. 기울어진 텔레비전 영상에 나오는 다수의 사람들이 좀비를 전유한다.

     

    조명이 꺼졌다 켜지며 좀비가 다수 늘어나 있는 진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필시 이들은 관객을 침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좀비가 아니니.

     

    좀비의 춤은 지향하는 바가 없다. 특히 그 방향 없는, 정위할 수 없는 시선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않는다. 역으로 이 시선으로부터 춤은 출발한다. 그 지점을 보여주는 게 마지막 부분이다.

     

    ‘꽃좀비’는 슬렁거리며 춤의 현존의 의미를 현대인의 지친, 영혼 없는 세계에 은유하며 절묘하게 결합한다. Lascia chio Pianga(울게 하소서)가 나오자 그 굉음에 좀비들은 예술에 감화된다. 이들을 퇴치하러 온 자들은 이들을 죽이려는 목적밖에 없지만, 좀비야말로 예술가가 아닌가 싶다. 또 관객이 어둠 속에서 받은 탁구공으로 좀비를 맞춰서 이들의 난입을 막아야 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은 좀비는 시선 없는 춤을 추면서도 이를 피하며 웃음을 준다.

     

    앞선 마지막 부분에 좀비는 공허한 눈빛을 전하는데, 어둠에서 어둠을 진정 빛으로 바꾸는 어둠으로서의 눈, 표범과 같은 검디검은 동물의 눈, 실재의 눈이다. 이 눈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 없는 좀비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처럼(또는 읽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이 전체로 확대된 눈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뒤 두 작품 모두 부담 없이 볼 수 있었고, 김혜경의 삶으로의 맨 몸 투신, 김기범의 일상을 무대로 전이하기, 정완영의 좀비의 무대 난입은 어떤 가상적인 부분의 상상력이 충만했다. 어떤 동작을 만들기보다 어떤 맥락을 몸과 결합할 것인가의 물음에 긴장을 뺀 모습들이 긍정적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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