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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번째 차세대안무가클래스 쇼케이스 리뷰
    REVIEW/Dance 2013. 2. 5. 17:06

     

     

    유희주 <BLOW-UP> : '환영 속에 허덕이는 신체'

     

     

    환영으로서의 몸을 포함해 세 개의 프레임이 있다. 스크린, 내레이션이 나오는 다림질 방, 나방이 불빛에 퍼덕이는 것을 연상시키는 춤의 사각 프레임이 그것이다.

     

    무용과 연극, 그리고 무용과 영상 드라마의 접합은 이 몸이 환영화될 수 있는가의 기술적·매체적 물음을 낳는다. 곧 이 접합이 합치를 지향할 때, 이 합치는 가능한지의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물음은 늘 상존한다. 말 없는 무용의 신체에 말하는 주체의 등장에 이 몸의 불일치에도 일치를 지향해야 하는지의 수용의 태도에 있어 생겨나는 물음이다.

     

    조명의 달라짐은 세계의 변환 내지 심상의 전환을 꾀하며 이 말들이 지닌 삶에 대한 흔적들의 언어, 곧 흔적을 따라가는 나만의 언어가 음악 장 속에 기입됐지만, 여기 신체는 이 혼란의 장에 걸쳐 있는 것이다. 무성적 존재로, 메시지도 정확치 못하고 그 구성도 정치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주목할 만한 몸짓 또한 없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인상 깊게 차용코자 했다면, 그것이 신체적으로 어떻게 발견되는가에 대한 리서치가 철저하게 필요한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시적 정념과 음악의 차용에 기댄 불투명하고 모호한 공연, 몸은 여기서 이 분위기에 완전히 용해되거나 이 분위기를 재현하는 두 가지 귀결 밖에는 없다. 그 점에서 이미 공연은 그 합치의 방식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는 뚜렷한 개체로 존재하는 데 있어 그 몸이 자리하기에는 충분치 않았던 것 같다.

     

    배경의 달라짐, 곧 세계의 변환 내지 심상의 전환을 꾀하며 이 말들이 지닌 삶에 대한 흔적들로서 언어, 곧 흔적을 따라가는 낭만의 언어가 음악 장 속에 기입됐지만, 여기 신체는 (용해되지 않고) 이 혼란의 장에 걸쳐 있는 것이다.

     

    장혜림 <152440’ 1”>, 표현에 언어적 기표를 삽입하다

     

     

    시간의 상징물로서 명확히 등장하는 모래시계, 직사각형 프레임은 운명(제한되어 있다는 결정적 특징)에의 비유이다. 곧 반복되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은유)에의 인식을 드러낸 것인데, 움직임을 지정하는 메타한 층위 아래 신비한 분위기와 함께 시작되는 군무는 구문론적 분절들의 접합으로 이어진다. 곧 시작되고 끊기고 또 시작된다.

     

    이는 신비스러운 동양적 춤사위에 언어적 유사성을 지시적 언표로 드러내는 가운데, 그 움직임을 명확한 개념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다. 이른바 명확하지 않았던, 일부로 드러내지 않았던 의미에 다가서며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무엇으로 재창안하는 데 움직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말 이후 따르는 반응만이 사라지고 나서, 분절되고 발산되는 어떻게 보면 숨의 흔적과 움직임에 따라붙는 숨의 이어짐으로 현존을 증명하는 춤은 긴장의 밀도를 내장한 전체로서 부분이 된다. 그렇지만 최종 마감에 있어 구성의 에너지 총량은 그 분절된 덩어리들이 큰 차이가 없다.

     

    이러한 지나 감들의 이음은 근원에 대한 추동함의 물음을 지우지만, 이 단단한 흐름이 갖는 긴장의 대치에 어떤 작품에의 탐문은 찾기 힘들다. 이 긴장은 밀도에 의한 것이지만, 한편 쇳소리와 같은 음향의 마감이 존재한다. 많은 움직임은 파편적인 발산으로서 몸의 통로를 만드는 가운데 예리한 신체 감각을 촉발시키며 출현하는 것이라 하겠다. 앞선 시계라는 상징물이 나왔듯 작품은 시간이라는 경계에 서사를 복속시킨다.

     

    권령은 <꽃, 미영이란 이름의 편지들>, '발랄한 생명력을 현상하다'

     

     

    “상수”에서 “하수”까지, 오체투지로 이동하며 바닥에 바닥의 위치 내지 근처에 있는 것들을 지정하는 글자를 초크(분필)로 쓴다. 이는 단순 사물을 지정하는 언표적 기능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현존을 지시하는 자리를 새긴다는 점에서 자기 지시적 기능을 가진다.

     

    몸과 땅의 접촉을 일치시키는 방식에 이어 이름을 쓰고 분필 묻은 돌을 몸에 문대는 것 역시 가령 앞의 공연에서 시간의 상징물이 쓰인 데 반해, 여기 돌은 돌 얹고 춤추기, 돌에 입 맞추기 등을 통해 상징이 아닌 실재의 사물로 쓰인다. 곧 ‘오브젝트로 신체화하기’, 내지 ‘오브젝트 되기’ 라 하겠다.

     

    그러니 이 명명과 영역 잣기는 뒤섞임일 뿐 일종의 하릴없는 현실의 어떤 상징적 제스처와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언어를 몸짓으로 번역하기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고 발랄한 상상력은 흉내 내는 것이 아닌, 물든 20대가 아닌 정말 20대의 생명력이 무엇인지 증명하는 듯했다.

     

    물고기처럼 잡고 팔딱거리는 생명력을 구현해 보거나 상관없는 의미들의 단어를 명확하면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몸짓들로 기워 낸다. 관객이 보고 입은 시간, 소리 모두 그 시선의 긴장을 온통 입은 채 알 수 없는 수신호로서의 몸(상형문자), 게다가 철자들도 다 틀린 괴발개발 언어의 외적의 서툰 말하기가 부르는 번역에 명확한 몸들의 번역기로서 몸짓을 펼치는 것이다.

     

    “미룡”이었던가, 없는 단어에 움직이지 못함은 곧 결정적 소통 내지 언어의 장애에서 불가능성의 통로가 극적인 방식으로 생겨난다. 표현할 수 없음을 말할 수 없음으로 치환한 것이다. 이러한 단절은 곧 나를 찌르는 것, 곧 푼크툼을 무대에서 현시한 것일 것이다.

     

    외국인과의 협업에서 갖는 많은 사례들의 메타 차원에서 그 과정들을 가져가는 것을 유사하게 도출해내기도 하며, 가볍게 소통의 불가능성에의 도전을 구현하는 측면에서도 꽤 신선한 작품이었다.

     

    정정아 <당신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참여 미학에서 환영으로 가는 한계'

     

     

    무용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한다. 보편자와 특수한 자의 구분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 곧 우리는 미리 지정해 놓은 무용수들과 약간의 현장 참여자들 안에 속해 있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들 중 한 명이 ‘내’ 움직임을 구현하고 그들이 또 수많은 공통의 것들에서 차이를 도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춤은 메타적으로는 하나의 물결에 휩쓸리는 가운데 몸의 무늬를 확인하는 것이 된다. 이들은 엉뚱한 듯 자신들만의 안무를 어떤 극적 지점의 고양된 순간으로(당연히 음악이 그에 따른다) 만들며 자연스레 만들어진 움직임이 그 몸에 묻은 것으로 표상하려 한다.

     

    곧 현재가 환영으로 바뀌는 순간. 아쉽게도 그 움직임들이 곧 삶 속에 예술이 있다 라는 명제를 구현하는 측면에서 임팩트가 덜하다. 뭔가 어정쩡한 움직임은 이 변환의 과정을 진화론적으로 가져가는 측면에서 자연스레 의도한 것이라 보인다. 그럼에도 하나의 순간으로 수렴되기 위한 길었던 시간의 무게에 비해 한 점의 짧은 순간은 정녕 하나의 환영이 되어야만 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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