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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 리뷰 : ‘비와 술 사이’, 안은미 유형학적 아카이브 시리즈 대단락
    REVIEW/Dance 2013. 3. 19. 03:55

    그간의 작품들은?


    ▲ 2월 28일 열린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 프레스 리허설 장면(이하 상동)


    안은미 안무가의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쓰>는 그녀의 특정 세대 집단의 춤을 아카이브하고 이를 무대 위에 펼쳐 놓는 식의 유형학적 시리즈의 세 번째, 곧 대단원이다. 그래서인지 이 춤은 다시 지난 춤들과의 비교를 어쩔 수 없이 요구하게끔 한다.


    할머니의 춤은 일종의 아키타입, 곧 원형으로의 접근과도 같았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비치는 그 원형의 시뮬라르크적인 가상 현존이었다. 곧 원형이 있는 것처럼 현재 보는 것을 그렇게 믿으며 거기에서 감응을 얻는 것, 시간을 뛰어넘었다는 초월과 그저 형용할 수 없어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 사이에서 판단이 흔들렸다. 


    여기서 할머니들의 몸은 일종의 역사와 삶을 고스란히 투과시키는 투명한 매개체로 드러났는데, 여기에는 문화적인 영향 외에도 오히려 리듬을 갖고 있는 생래적 몸의 본질을 조금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다.



    할머니들의 삶이 무대 위에 잠재적으로 꿈틀거리는 것이 미약하게 느껴졌던 ‘뽕~필(feel)’ 나는 희한한 광경에 도취되었었던 그 무대에 비해, 두 번째는 천사 같은 학생들의 생명력이 꽃 피우는 학예회 같은 느낌으로부터 어떤 세대와 세대의 교감 같은, 조금 더 생체적인 나이를 문화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가령 ‘내가 이들의 삼촌이나 오빠 정도의 사이에 있겠구나!’라는 식의 감응을 선사했다. 


    요즘 들어 “아빠 미소”, “딸 바보” 같은 개념의 사용은 그저 그 하나의 감응을 주는 개념으로 주파수가 맞춰지며, 모든 판단이 무화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와 유사한 경험일 것이다.


    그렇게 매우 강력한 첫 번째 경험에서 뭔가 잡힐 것 같았던 느낌이 덧없게 반짝 하고 지나갔다.


    물이란 과잉 기폭 장치



    그러다 세 번째 경험을 맞았다. 이 잡히지 않는 내지는 그저 지나가 버리는 무대의 경험은 이번에 거의 무화된 단계로 끝났다. 


    우선 무용수들은 프롤로그와 같은 전초전의 무대를 연다. 이어 영상의 지루한 아카이브, 이어 아저씨들의 독무대 그리고 모두가 뒤섞인 빗속의 난장, 무대 뒤에는 막걸리 병들이 뒤집혀 흰색 장식물의 물질적인, 그러나 동시에 비어 있는 벽을 구축했다.


    이 벽은 더 정확히는 중년 남성을 아카이브 대상으로 삼은 만큼 그들의 사회적 애환이나 사회적 관계 맺음에서 무한하게 들이켰던 술들의 헤아릴 수 없는 양을 측정하는 그런 것이었는데, 쏟아지는 비는 그 술의 환유이자 모든 것을 씻어 내려가는 배설적 기능 나아가 기계 장치의 기능적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작위적 장치의 일환이었다.



    이 미끄러운 바닥에서는 제대로 된 이동이 힘들었는데 이 미끄러움에 움츠러든 움직임들은 중년 남성의 굳어버린 신체의 부조리함(마음은 그렇지 않은)을 어쩔 수 없이 상기시켰다. 곧 이들이 가진 축적된 억압과 애환의 깊이의 탈승화적 장치로서 물이 무대 위의 공포나 수치심 따위를 나중에는 다 감싸 마구 표출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대승적 차원에서 승화적 장치로 재설정되는 데 작품의 초점이 있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앞선 움츠러든 몸의 불편함, 그리고 영상에서는 카메라와 일치된, 다른 말로는 카메라의 시선을 끌어당기던 할머니들의 춤에 비해 어떤 무의미한 제스처를 날리거나 카메라를 벗어나서 혼자 노는 것 같은 춤들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춤은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연 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래도 아저씨들의 탐구는 전적인 탐구 대신 아저씨들의 자아 확장 외에는 별반 춤적으로는 흥미를 끌어당기는 부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배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작품이 그것을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그리고 완벽한 작품의 성취라 이를 봐야 할까.

     

    팔딱거리는 생명력(춤)과 프레젠테이션(발화) 사이



    욕망의 소소한 덩어리들을 늘어뜨려 놓는 프로필들이 흰 벽의 스크린에 흘러가는 가운데 양동이로 물을 퍼내고 들어가거나 발로 물을 차며 등장하는 동작을 비(非)-춤이라고 말하는 폭력을 감행하지 않더라도 그저 거기에는 별 흥미가 안 당기는 것이다.


    이번 아저씨들의 춤에서 따온, 그리고 새롭게 전유한 무용수들의 팔딱거리는 춤은 디스코와 테크노의 뜀박질 리듬과 일치하며 매우 흥겨움을 줬는데 그 외에는 다소 허무했다. 아저씨들은 비를 푸거나 미끄러운 바닥을 발로 헤집고 갔다면, 무용수들은 처음 등장부터 바닥이 아닌 점프로, 땅에 붙어있기보다 그야말로 유목적으로 놀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상반신은 이미 발보다 더 앞선 지점을 향하고 있고 발은 달리고 있는 식의 마치 반인반마의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지점이 있었다. 그리고 빗속에서는 질주를 펼쳤고 물에 몸 담금질을 했다. 


    할머니들이 그저 관객 생각 안 하고 자신들의 주파수 내에서 움직이는 인상을 철저히 줬다면, 소녀들은 아예 관객들에게 대놓고 보여주는 춤을 췄다. 그리고 아저씨들은 술에 취한 듯 자아도취에 빠져 또는 술독에 올라 비틀거리는 춤을 췄다. 


    무엇이 제일 자연스러운가의 물음은 여기서 부질없어 보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것일지 모른다. 관객과 만나는 접면 자체가 첫 번째에는 기묘하게도 성립되지 않았다면, 두 번째는 그저 아이돌 춤의 재현과 전유에 가까웠고, 세 번째는 독무대를 통해 개별적인 만남의 실존을 조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과의 인터페이스 형성의 차원은 세 번째가 제일 낫다고 할까. 춤이 자기  만족에서 추는 춤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이 마지막 유형학적 춤은 자아 표출이 동시에 관객을 향해 열려 있었다는 점에서 모순적인데, 이는 곧 환영적인 느낌을 낳았다. 이 춤이 결코 온전한 대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와 술 사이에서 내지는 정화와 배설 사이에서 물의 기능은 일종의 ‘비술’(祕術)의 작용을 일으켰던 것일까. 비가 오면 설레는 느낌, 술을 마시고 몽롱한 상태의 여러 환영적 도취의 감상이 관객석까지 전달됐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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