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페스티벌 봄] <가곡실격: 나흘 밤>: 가곡의 해체적 전유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4. 6. 22:45

    도래할 비-텍스트에 관해



    ▲ [이미지 제공=페스티벌 봄] 


    입장 전 하나의 텍스트를 받아 든다. 가사가 실려 있다. 애초 예술에 관한 레퍼런스가 사전에 제시될 때 이는 사전 이해를 돕는 차원이라기보다는, 혹시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에 대한 감상의 측면이 공연 중에는 가능하며 공연 후에는 지식을 통한 해석의 차원에서 이해의 측면이 가능해질 수 있다는 혐의를 둔다. 


    앞선 텍스트에 적힌 시는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하다. 자동기술법에 따라 쓴 무의식적 서술의 무분별한 분기(分岐)로도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몇몇 단어들과 그 흐름이 환유의 기법에 닿아 있고 주체의 입장이 아닌 3자의 입장에서 모호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노래로 하면 코러스에 가까운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에 대한 메타 기술을 하는 이유는 이 텍스트가 공연 중에서는 그다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미 없음의 텍스트는 곧 음악이 내지는 소리가 그 자체의 기표일 뿐, 기의를 담은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상응한다는 점을 미리 밝히기 위해서다. 그리고 굳이 그 가사를 해석해서 문학적으로 내지는 연극적으로 주석을 붙이는 것을 회피하고자 함을 미리 전하기 위해서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형식을 위한 형식으로만 이 작품을 대하고자 한다.


    얼굴 없는 목소리


    극은 네 개의 소리-극으로 나뉘어 있다. 이 네 개가 어떤 내용적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의문에 부친다. 다만 어떤 하나의 공통점 정도는 추출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첫 번째 밤에서 퍼포머들은 각자의 소리-리듬과 문장의 단편들을 가지고 우발적 튀어나옴으로 보일 만큼의 ‘먼 간격’을 가지고 조응하며 끝없이 지속하는, 일종의 파편적 모나드들로서 배치(Assemblage)되었다.


    두 번째 밤에서는 전신주에 올라 처음으로 박민희가 하나의 주체로 출현하는데, 이는 단독의 아리아가 아니라, 단지 숲 속 주변의 정령들이 구가하는 소리(스피커를 통한 속삭임이지만 이는 환유적으로 그렇게 읽힌다)의 입체적 타점의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다. 


    세 번째 밤은 세 퍼포머들이 핸드벨을 들고 각자 묘하게·뽕가게·탐나게 “아름다운 남자를”+“보았·만났·만-”+“다네”라는 하나의 문장들을 저마다 시차를 두고 발생시키는 가운데 누구도 우위를 점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네 번째 밤에서는 두 사람의 궁중 악례 같은 몸짓들을 반복하는 가운데 점차 외부의 타점들이 관객을 조였다 풀었다 하며 사라졌다 움직임을 펼치는 두 사람으로 모여들며 마친다. 


    이러한 네 밤은 일종의 쉽게 말하면 어떤 주인공도 내세우지 않는 가운데, 그래서 무미건조하게 사운드의 파편들을 수행하는 모나드들을 공간적으로(입체적으로 거리를 확장하며) 내지는 시간적으로(각자의 서로에 대한 우발적 끼어듦이 가능하게 하며) 배치하고 절합하는 것 자체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 주인공의 어떤 체험 그리고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한 원본(알 수 없이 쓰인 텍스트)에 대한 정의할 수 없는 체험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외설의 향연


    ▲ [이미지 제공=페스티벌 봄] 


    첫 번째 주어진 숲에 대한 환유적 감각은 이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이 들려오는 소리들에 닿는 감각만으로 존재하는 식으로 무대 자체가 해체되고 있다. 외곽 틀이 있는 직사각형의 작은 스크린의 형태로 제시된 무대는 이미 그 속에서 얼굴이 앞에 선 두 사람 정도를 제하고는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미 외설을 감행한다.


    <가곡실격: 나흘 밤>에서 소리의 외설은 어떠한 특질을 나타내는가. 


    또 다른 외설의 판본으로, 오디세우스를 실험에 들게 하고(실은 그가 스스로 귀를 막지 않아 실험을 기획한 것이지만) 그와 같이 배에 탄 모든 선원들을 광란과 환각의 상태로 몰아넣은 ‘세이렌의 소리’가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종의 외설인 이 소리는 곧 이성을 끝까지 고수한 위대한 오디세이의 승리로 끝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분명 여기 있지만 저기 도달할 수 없는 곳에서 향락을 누린다. 이는 자기의 밖에(ek) 서 있다(stasis)는 ‘황홀경(ekstasis)’이다. 오디세우스는 소리에 대한 응전만을 감행한 것일까, 오히려 보이지 않는 존재 그렇지만 끊임없이 그 곳으로 이끌던 소리의 발화점 곧 그것을 주체화(시각화)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반면 <가곡실격>에서 소리의 발화자는 이미 극장의 규칙에 따라 더 이상 볼 수 없는 얼굴들로 기록된다. 위에 있는 박민희 역시 곧 분산되는 사운드의 단편이 되며 무미건조한 얼굴로 감정 없이 16박이라고 하는 박자에 맞춰 긴긴 대사들을 늘려 읊으며 단지 그 소리들의 늘임과 쪼갬에만 집중해 수행할 뿐이다. 


    우리를 옥죄는 정령들의 입체적인 위치는 우리를 유혹하기보다 또 확인에 대한 갈망을 부르기보다 그 자체로 감각의 조율을 가할 뿐이다. 일종의 움직이는 입체 서라운드로서.


    가곡의 아방가르드한 맛


    가곡의 특징대로 길게 박자를 쪼개, 가사를 늘려 부르는 것을 통해 그리고 이를 더욱 부각시켜 드러냄으로써 명확한 기표 자체들이 떠오르지 않고 실종될 때 앞서 텍스트의 무용성 담론은 다시 살아난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가곡을 아리아로 부르는 주체를 상정하는 대신 이들을 분산된 주체로 조합하며.


    또한 앞서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율로 드러냄으로써 가곡은 해체되고 산포(散布)된 부피로 체감되고, 혼란의 질서나 엔트로피적 구문으로 만들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이는 또한 무질서한 카오스의 상태로 정점을 만드는 대신 어디까지나 가곡의 부분적인 맛이라는 최소한의 덩어리는 유지한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과도 연관된다.


    이 가곡의 최소한의 덩어리를 나타내는 고유한 창법의 특질로는 아마도 이 창법이 대금 내지는 가야금과 같은 매체와 인접한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를 우리에게 익숙한 비브라토 혹은 바이브레이션과의 비교를 통해 차이의 특질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바이브레이션이 보통 간주 부분과 맞닿는 지점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활용의 시간이 허용되며 가사의 늘림을 통해 가능해지는 가운데 모음 위주의 의미를 갖지 못한 잉여 차원의 기표들의 일종이라고 볼 때, 이는 가사의 정확한 전달의 차원에서라도 사운드의 접합을 정교하게 가져가는 이전의 부분과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바이브레이션은 정박자에 맞춘 동일한 속도 위주의 진행에서 벗어나서 빠르게 속도를 가져가거나 자유자재로 높낮이를 조종하는 특징을 보여주게 된다. 동시에 이는 활기찬 약동과 주체의 자유로운 노님의 표피를 보여주는 측면이 크다.


    반면 <가곡실격>에서 대표적으로 박민희의 한 음을 길게 늘여 지속하는 일종의 유사하지만, 분명 다른 바이브레이션(?)은 대금의 그윽한 깊이의 지속을 닮은 모습으로 가져가며 갑작스레 다른 음의 지속으로 변화된다. 이러한 하릴없는 지속과 뜬금없음의 출현의 소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바이브레이션이 갖는 ‘더’라는 점층적인 상승의 쾌락, 그리고 주체의 자유와는 전연 상관이 없다.


    도대체 이 더딘 지속의 맥 빠진 긴장 어린 그윽함은 어떻게 다른 차원으로 돌연 점프가 가능한 것일까. 이는 아마도 또 다른 인접성의 매체로 이야기한 가야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현의 튕김, 그리고 가야금에도 적용되는 나아가 동양 악기의 연주 주법인 농현이 그것일 것이다. 곧 음의 떨림의 지속에서 갑작스런 변전의 양태를 만들어내는 것.


    적어도 박민희가 보여주는 가곡이 전하는 바는 노래 그 자체의 명확한 전달이 아닌 악기와도 같은, 그리고 그 악기의 고유한 주법에서 기인하는 사운드 매질에 대한 접근에 가까울 것이다. 


    P.S. 이로써 가격실격의 텍스트의 무용성을 내용적으로도(텍스트의 의미 없음) 형식적으로도(사운드 자체에 대한 이야기) 살펴본 셈이다. 조금 더 상세한 측면들에 대한 언급은 이 외설에 가까운 '아방가르드-필' 공연이 주는 낯섦과 불가해함의 특질에 상응하는 측면에서 이 정도로 그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