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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란 <지신은 불완전하게 올라온다>, '지신(地神)의 리듬'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4. 5. 05:24

    '서영란 인상 비평'



    서영란, 「업신여기다」


    긴 얼굴에 강한 인상을 주는 광대, 확실히 남방계는 아니다. 단순히 얼굴 타입만은 아니다. 좀 더 나아가면 왠지 처용과 같은 이국적 느낌도 안긴다. 하지만 이 얼굴은 서영란이 평소 관심 있어 하고 선보이는 북방 샤머니즘과 무속을 탐문하는 것에서부터 유랑하며 노마드와 같은 삶을 구가하는 것까지 어느 정도 역사 인류학적 궤적이 어렴풋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묘하게 그에 들어맞는다. 


    또 다른 인상은 큰 키다. 이 큰 키는 꽤나 어정쩡하다. 뭔가 단단하지 않다. 그러니 도무지 어떤 짜인 안무의 실천을 다부지게 해내야 하는 틀 안에서는 그 역량을 온전히 다 발휘할 수 없다. 치열한 군무라든가 동작-기계가 된다든가 하는. 그러나 무엇이든 주어 담을 수 있는 용기가 되는데, 그래서 몸으로 분출만 하는 대신 리서치도 가능해지고 온갖 삼라만상의 신들과 사유 단편들이 그녀의 몸에 고이는 것 같다.


    이러한 ‘생각을 담는 리서치’는 이성의 작업만이 아닌데 일종의 바보 같은 억척스러움이 가능케 하는 매개의 지점 그 자체로, 몸이 작용하는 그러한 방식의 리서치라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 담기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가져볼 때다.


    아무튼 이 어정쩡한 몸의 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 그 리서치의 결과도.


    어정쩡함의 용기


    일견 그 어정쩡함은 대나무 같이 뻣뻣한 몸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그녀는 일종의 잠재성의 영토로 그 어정쩡함의 용기(容器)인 몸을 드러낸다. 이는 곧 그녀가 이전에 선보인 <곡 오페라>의 오마주격 단편으로, 올라가지도 않는 노래를 기어이 해낸다. 


    아니 이 말은 충분치 않다. 못 올라가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가청 주파수를 뛰어넘는 차원에서 그녀가 부르는 높디높은 목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녀는 리서치와 상관없는 성격의 단편을 처음 제시하고 시작한다. 


    이는 어쩌면 그녀의 이국적 외모가 남방의 소리들을 탐문할 때 발생하는 기묘한 뒤섞임과 같이 동서양의 문화가 시차적으로 불완전하게 절합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이와 같은 시작은 어쩌면 그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숨길 수 없는 지표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마지막까지 봤을 때 단편들의 병치라는 문법을 통해서도 왜 이 오페라 형식의 창 아닌 창이 들어갔을지의 의문은 해소할 수 없기는 하다. 그렇다면 그 평행선상의 시차를 좇아 그녀는 불가능성에 빠지는 셈인가.


    지신은 올라온다, 불완전하게


    ‘지신(地神)은 꿈틀꿈틀 올라온다.’ 이는 꽤나 적절한 표현 같다. 그런데 이 표현은 실제 극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공연을 보며 ‘지신은 불완전하게 올라온다’가 공연 전반의 리듬 구문의 놀이에 대한 해석 차원에서 무의식적인 환청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불완전’은 뭔가 그 쓰임 자체가 불완전하기만 하다. 이는 (불완전한 주체의) 형태를 말함인가, (예측 불가한 지점에서 올라오는) 정신분석적 징후를 가리키는가. 


    이 ‘불완전’은 ‘완전’의 쓰임을 가정하며 쓰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완전함’의 개념 자체를 애초에 상정하지 않는 전복적 개념의 일환으로의 쓰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바로 그 점에서 ‘불완전’이라는 말 자체는 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표상할 수 없는 주체로서 잠재성을 가진 이 불완전한 존재’는 어떻게든 올라온다. 그리고 이 ‘불완전’을 공연의 리듬 구문에 따라 ‘꿈틀꿈틀’로 구체화한 게 개인적인 동시에 신체적인 해석의 지점일 것이다.


    사실 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 신의 땅으로부터의 출현을 이야기한다. 서구화된 사고방식으로는 이를 옮기자면 원시종교에서 자연에 깃드는 정령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곧 신이란 관념은 마치 누군가가 애국가를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로 읽어 내고야 마는 또는 이미 그렇게 인지하는 치졸하거나 무지한 관념처럼 그와 같이 하나의 신만이 권력을 가져야 하는, 어떤 그런 세계 속 신만이 신으로 여겨지게 된 가운데, 다양한 신이라는 게 인식 불가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곧 이 다양한 신은 곧 미신(迷信)이자 미신(未-神)일 뿐이다.


    지신의 리듬


    그런데 이 지신은 꿈틀꿈틀 올라온다(이제 이 명제를 일단 의심없이 다시 출현시킨다). 이는 아련한 게 아닌 뭔가 그 자신의 리듬을 가진 것이다. 들뢰즈의 ‘애벌레 주체’로도 읽히는 이와 같은 리듬-신체는 땅을 기며 접었다 몸을 편다 한다. 그리고 여기서 서영란의 도약이 생긴다. 곧 지신과 우리 소리 그리고 그에 결부되는 몸짓들이 어떤 리듬으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계된다는 것이다. 이 리듬은 신 곧 하늘에게서 왔다고 스크린 속 렉처는 가르치지만 이 하늘을 일방적인 전달로 굳이 해석할 필요만은 없다(다만 여기에 대한 종교적인 관점 그리고 철학적인 관점에서 서영란을 옹호하거나 아니면 이견들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인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은 후기 포스트모던의 사조 이후에 의거한다면 아무래도 대립한다).


    지신은 곧 삶 속에서 발현 가능한 리듬이자 체화된 종교이며 천상의 신명(=신의 명)과 일치하는 삶-예술의 리듬이라는 게 서영란이 결국 내세우는 바인 것이 아닐까


    신명은 흥에서도 나지만 신들림에서도 나온다. 그녀는 아이-되기(이는 들뢰즈의 개념이라면)라기보다 ‘아이 신’이 들린 상태에서 창자(唱者)와 문답을 주고받기도 한다(이는 트랜스에 가깝다) 곧 영매, 트릭스터가 되는 것이고 자아 대신 무아의 경지에서 그저 노님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백치-되기와는 다르다.


    문화인류학적 리서치


    사실 그녀는 완전한 극 형태의 환영을 만들기보다는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식으로 작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메타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즉흥의 구문으로 이를 감행하기도 한다.


    가령 전자가 전화를 받으며 보험 가입 권유를 하는 상담원의 말이 앵앵거리는 타악의 맥놀이로 번져가고(크지 않지만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거기에 고수가 되어 분절된 리듬으로 활기를 지펴 올리는 것으로 바꾼다거나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눈 먼 장사에서 간혹 아이 신 들림으로 문답을 주고받는 경우라 하겠다. 동시에 이 즉흥의 구문은 그녀가 아이들을 평소 가르치며 얻은 말이 되지 않는 유희적 차원의 자유로운 말들이 또한 아닐까.


    그녀는 움직임이라기보다 작은 몸짓들 내지는 제스처들을 렉처에 실어 냈는데, 아마도 으뜸은 곱사등이춤으로 등 뒤 어깻죽지에 마이크를 대고 소리를 딸깍 딸깍 내기 시작해서 보여준 두 사람이 결합되어 걷는 듯한 착시를 주는 춤일 것이다.


    무속의 종교적인 차원을 입고 우리 문명에 슴배어 있는 리듬의 구문들을 전국 판소리 명창과 춤꾼들을 찾아다니며 꼼꼼히 기록하고 습득하여 연결시켜 펼치는 작업은 문화인류학적이고도 몸으로 살리고 새기는 우리 문화의 한 단편이자 생생한 몸의 대화가 기록되는 작업이다. 


    P.S. 그런 몸의 주파수로 더듬어가며 만난 문화적 원형의 체화된 기억을 무대에 다시 쓰는 차원에서 서영란의 리서치 공연은 할머니들의 몸-춤을 아카이빙하고 그들을 무대로 소환하는(곧 아카이빙-스크린이 원본에 대한 무상함의 아우라를 내세웠다면 무대는 일종의 시뮬라크르의 닿을 수 없는 향연이었다) 동시에 역사의 몸-춤을 무용수의 팔딱거리는 생명력으로 재전유하고 시차를 통해 의도적으로 분절시킨 이후 인위적인 혼돈의 합치를 만든, 곧 현재와 리서치가 분절의 시차를 낳는 안은미의 리서치 작업보다 오히려 더 정답고 또 소중하게 느껴진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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