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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경애 <MARSⅡ>: '잠재된 것들의 수행과 리듬, 그리고 시차'
    REVIEW/Dance 2013. 4. 3. 15:58

    프롤로그: '이상한 과학 실험'


    ▲ 노경애 <MARSⅡ> [사진 제공=페스티벌 봄]

    순차적으로 탄성·마찰력 등의, 물체가 맺는 현실 구조 속에서의 힘이 작용하는 과정을 몸으로 나타내는 작업은 추상적 지표가 작용할 여지 대신 오로지 실행을 위한 움직임, 표현에 대한 표현을 감행할 뿐이다.

    곧 기의와 기표의 불완전한 결합에서 오는 저 너머의 기의 찾기 대신 기표의 단편들만의 결합만이 있다. 그리고 기의는 단지 이것이 물리 법칙에 대한 수행이 있을 것이라는 짧은 렉처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물론 음악이라는 정서의 흐름을 가져가는 매체와 결합되어 이전의 표현들이 병치될 때 다른 양상을 가져가게 된다.

    음악 없이 흰색 우주복을 입고 앙다문 입술과 무미건조한 표정의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면 과학 실험의 구문들로 놓이는 이 상황이 과연 그 자체로만 소구될 수 있는가의 회의가 들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의 기의는 앞서 실행을 예고하는, 그리고 과학 공식으로 설명하는 전 단계의 무미건조한 내레이션이 아닌 오히려 이것들을 굳이 펼쳐 놓는 안무가의 불가해한 의도로만 파악 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어쩌면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잠재된 것들의 수행'

    우선 주목할 것은 감정 없는 실험-기계로서 자유롭지 않은 무용수들의 고행(?)은 실은 일종의 기본적으로 통통 튀는 스텝 아래 움직임의 시차를 갖는 리듬의 구문의 요소들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 무용수들은 실험의 결과를 드러내며 물리법칙의 구문에 관한 실험 대상의 언표가 될 뿐이므로 물 자체 내지 어떤 사물의 속성을 보여주는 데 더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 명확한 법칙으로서 말의 구문을 몸으로 실행하는 데는 전도가 발생한다.

    이 사유 없는 신체들, 말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들의 ‘탄성의 작용을 이렇게 표현한다’는 실은 ‘이미 몸은 힘(탄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튀어나오는지가 곧 표현의 양상을 이룬다’에 가깝다.

    이에 따라 몸은 말의 명령을 수행하는 오브젝트가 아닌, 말이 갖는 힘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순수한 힘의 예비적 실행의 지점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 몸 자체가 수행적 구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에 따른 움직임이 아닌 무의식적인 몸의 활용들은 안무에 있어 그 힘의 잠재성을 우발적인 표현으로 드러내는(이러한 부분은 그의 전작, '불특정한 언어'에서 두드러졌다) 데 초점을 맞춘 채 의식의 영토를 벗어나 하나의 무의식적 기억으로 말이 배어드는 데까지로 훈련이 이뤄지지 않았을까.

    그와 동시에 앞선 말이 곧 실행이 되는 수행적 발화라는 측면은 실은 이 단편들의 궤적을 구분 짓는 하나의 분절적 리듬의 구문이자 사운드라는 표현으로 용해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패러다임의 전환'

    ▲ 노경애 <MARSⅡ> [사진 제공=페스티벌 봄]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의미 없는 물리법칙의 재현’이자 ‘객체로서의 부자유한 신체 활용’이라는 식의 혐의를 둔 해석에서는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작업은 물리적 실행인가, 감정과 같은 추상적 특질의 표현인가. 전자는 객체가 재현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이미 그러한 추상의 기의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두 불확실하다.

    분명한 것은 이들 무용수들이 일종의 실험대상과 같은 순수한 힘이 될 때만 주체로 자리하며(그 바깥의 지점을 상상할 수 없다) 그 힘을 물리법칙으로 모두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몸 자체가 갖고 있는 그 자신의 무늬들과 절합되어 드러날 때의 무의식적이고 무의지적이며 무의도적인 표현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차적 움직임'

    대략 한 명의 무용수가 먼저 움직이고 다음 무용수가 그 끝에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무용수가 삼분의 이 정도의 움직임을 선취했을 때 다음 무용수는 바로 같은 움직임을 가져간다.

    이러한 말미를 안는 한 박, 또 다른 한 박이 될 것 같지만 곧 이은 움직임에 반 정도 중첩되는 반 박, 앞선 움직임에 중첩되며 다른 움직임을 예고하는 가운데 산화되는 반박은 ‘힘의 감속’(=움직임의 가속)을 그 자체로 나타내며 전체적인 리듬의 구문을 만든다. 내지는 후반에 이르면 반박, 반박, 한 박의 가속(=속도의 감속)을 가하기도 한다.

    마지막 클래식 요한 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도나우'가 나오자, 무용수들은 앞서 힘들을 순차적이고 단계적으로 펼쳐 놓던 것에서 그 음악에 맞춰 개별 동작들을 응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음악과의 단순한 합치를 꿈꾸는 것과는 다르다(음악이 배경이 되거나 움직임이 음악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곧 음악에 내재적인 몸의 구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음악은 몸과 대위법적으로 사용되며 오히려 갖고 있는 몸의 무늬들을 그 음악에 적용시키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개별 움직임들을 그것에 적용하는 데서 적응하는 차원의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이는 그저 잠재된 힘을 드러내는 무미건조한 표정의 무용수들이 마치 음악이라는 새로운 힘이 제시된 이후 그것과 갖는 긴장에 순진하거나 당혹한 표정을 드러내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음악에 따라 우리가 그들의 움직임을 어떤 음악과 조화를 이룬 것으로 보는 감응의 수용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철저히 그 음악에 따른 것이 아닌 앞선 움직임들의 펼침이라는 점에서 균열이 빚어지는 것을 함께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에필로그, '가상의 공간'

    마지막에 음악과 함께 영상에서 우주선이 날아가며 폭발하는 장면으로 물체의 에너지가 완전히 연소될 때 힘은 색채라는 시각적 장으로 바뀐다. 결국 이들 흰 옷은 실험복이 아닌 우주복이었다는 말인가 그리고 지구의 중력이 아닌 다른 우주 어느 곳에서 작용하는 중력과 불편한 움직임을 기의로서 담고 있었다는 말인가.

    물리법칙의 구문으로 제한한 움직임의 단계적 적용과 함께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인간의 신체가 갖는 주름들과의 절합, 한편 이 몸들의 리듬 어린 출현과 배치, 단편들의 순차적인 진행과 이 단편들로서 움직임을 음악과 충돌·접합 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가상의 상상력을 벌려 놓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어떤 잉여적인 구문으로 부착되며 도저히 설명할 수도 없는 움직임들에 감상적인 차원에서의 시차를 생산하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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