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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승엽의 댄스살롱] 안영준 <카니발(Carnival), 카니발(Cannibal)>, '아크로바틱-카니발'
    REVIEW/Dance 2013. 4. 2. 12:01

    ‘홍승엽의 댄스살롱’이란...



    ▲ 지난 3월 28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안영준 안무가의 <카니발(Carnival), 카니발(Cannibal)> 리허설 (이하 상동)


    국립현대무용단의 2013년을 맞아 선보이는 첫 공연은 오는 4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리는 ‘홍승엽의 댄스살롱’이다. 


    '살롱'은 프랑스어로 응접실을 가리키며, 17세기·18세기, 활발했던 프랑스 살롱 문화는 궁정 귀족의 사교계 모임이자 그 속에서 다양한 지식들이 오가는 교류의 장이 됐다. 


    네 명의 국내 안무가의 신작들을 초청한 이번 공연에서는, '댄스살롱'이라는 타이틀과 같이, 국립현대무용단의 예술감독인 홍승엽은 공연 중간 중간 관객을 만나며 함께 안무가를 공연 전에 짧게 만나보는 시간도 갖는다. 또한 공연 전후에는 극장 로비에서 4 작품의 연습실 사진 전시 및 다과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도 마련된다. 실제 극장을 찾았을 때는 네 명의 안무가들도 로비에 나와 관객을 맞는 모습이었다. 


    한편 이번 공연은 무용 공연으로는 이례적으로, 6일간이나 진행된다. 네 개의 작품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지 않고, 안무가 제 각각의 창조성이 발현된 작품들이다.


    '아크로바틱-카니발'


    안영준 안무가는 아크로바틱적 고난이도의 동작들의 긴장감과 역동성으로 지난 작품에서 촘촘하고도 생생한 엮음과 짜임의 안무를 펼쳐냈었는데 이러한 형식을 ‘카니발(Carnival), 카니발(Cannibal)’이라는 개념에 맞춰 내용화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이런 위태위태한 동작들을 카니발의 혼란스런 광경과 동물적이고 공격적인 존재자들의 본능으로 재출현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코트를 걸치고 얼이 빠져 바보 같은 표정의 ‘고고’와 ‘디디’의 다른 이름들을 지닌 현대인들이 네 명이나 된다. 이는 광대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자가 그 네 의지를 잃은 현대인(이는 곧 반전의 도약을 직접적으로 예고한다고 할 것이다)의 가운데로 끼어들고 그 그룹에서 철저히 소외받는 상황이 펼쳐진다. 뒤돌아 선 남자들과 팔을 교차시켜 (뒤돌아 있는 남자들의) 손을 움직이며 짓는 도도한 눈빛은 냉소적인 태도에 대한 빛나는 도약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외설이다. 반면 이 외설은 두려움에 의한 것 대신 그저 무의미하게 희생양으로 치환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네 발로 뛰며 무대를 하수에서 상수로 건너질러가는 모습들은 동물-되기의 일환이다. 이 거칠고 어두운 동물적 본능의 변태를 벗고 무대 뒤에서 나타난 입방체 위에 여자는 슈퍼맨 복장을 하고 서 있는데 냉소적 현대인과 동물, 그리고 성녀-희생양에서 초자아적 명령에 충실한 슈퍼맨의 도약은 꽤 기괴한 병치의 혼란스런 맥락을 엮어 낸다.


    '외설'과 '병치'



    여기에 딱딱한 제식의 상징적 제스처가 출현하며(히틀러 당시 독일군의 몸짓을 연상케 하는) 그 가운데 종의 환유가 중세 교회의 세속적 삶의 거리를 연상케 한다. 남자들은 엉덩이를 정면으로 향하고 손을 엉덩이 사이에서 빼서 도발하는 식의 또 다른 외설의 차원을 감행한다. 


    곧 육욕은 팔딱거리는 고독한 생명력에서, 스스로에게 외설이 되는 여자라는 존재에 대한 폭력으로, 다시 권력의 직선적 날카로움의 몸짓으로, 마치 배설물과 같은 점착물로 그 자리에서 응고되는 과정으로 변환을 겪는다. 이 여러 이미지들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정위 짓기는 거의 불가능한데 그저 이러한 이미지들이 치환적 도식 과정이자 병치의 연장선상에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Cannibal을 경유한 Carnival'



    이는 안무가가 카니발(Carnival)과 카니발(Cannibal)의 발음의 상동성에 힘입어 발음에 따른 인접성을, 곧 의미의 인접성으로 바꾸는 도약을 감행한 것처럼, 어떻게 보면 별 상관없는 것들의 유사성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일종의 ‘도약’과도 같은 차원으로 옮겨가기가 감행됐기 때문일 것이다.


    성당의 종소리에 이어 시계소리는 환상성을 띤 채 환유 차원의 또 다른 세계로 옮겨 놓으며 혼돈의 상태를 만든다. 내용 차원에서 인간의 동물성을 철학적으로 탐문한다거나 형식 차원에서 형태를 만드는 방식 가운데 동물-되기의 과정들을 가져갔다거나 하는 것 외에 인간과 동물의 뒤섞임과 그 배분이 그저 혼란스러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카니발(Cannibal)을 표현한 카니발(Carnival)이 아니었을까. 


    ▲ 안영준 안무가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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