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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현대무용단 <벽오금학> : '내러티브의 단편들과 내재적 존재들'
    REVIEW/Dance 2013. 4. 7. 23:46

    상징 이미지들을 통한 문학과의 연결



    ▲ 국립현대무용단, <벽오금학> [사진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 당연함이 허락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벽오금학>은 『벽오금학도』의 재현일 수 없다. <벽오금학>을 보며 『벽오금학도』를 읽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책에서 느꼈던 이미지들을 고스란히 떠올리는 데 아마 실패할지도 모른다. 책이 구체적 언어로 쓰였다면, 홍승엽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의 안무작인 국립현대무용단의 <벽오금학>은 단 하나의 언어도 없이 비-언어의 추상적인 표현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만 책이 갖는 힌트는 춤의 순수 표현의 부분에서보다는 무대 중간 중간 설치되는 상징 이미지들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집단 무의식으로의 초대



    빨간 실을 타자의 몸에 휘감기 시작한다. 이 타자의 피부에 닿는 매체를 거친 행위에는 분명히 어떤 명령이 있다. 이 휘감음에 대한 용인과 수행은 타자라는 외부에 대한 인식을 지운다. 서로에 대한 인지는 하나의 제의적 공동체로 거듭나게 된다. 


    이러한 행위는 수행적이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의 무의식이 전달하는 지점에 속한다. 내러티브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 빨간 실은 객석 통로를 따라 길게 뻗쳐 있고 무용수들은 이 실을 감으며 관객과 마주하게 된다. 이 낯섦의 시공간적 체험은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곧 낯선 시간이 현재에 현상될 때의 역설, 이는 일종의 관객의 참여도를 높이는 의미가 부여되지만, 어쩌면 그 참여의 의미를 지나치게 부여하는 가운데 벌어진다.


    이 빨간 실이 모두를 실제 엮어 상징적 표식을 갖춘 공동체를 만들며 탄생을 연다는 점에서 환유를, 그리고 인생의 흘러감이라는 은유를 성립시키며, 그리고 객석으로까지의 연장선상의 행위를 통해 관객의 의식을 깨우는 작은 이벤트까지를 만들며 <벽오금학>의 세계에 초대한다.


    이 이미지의 발생은 춤 이전에 벌어진다. 그래서 잉여의 부분은 실제 춤으로 이어지며 불확실한 무엇으로 분배된다. 이야기는 기이한 존재들의 춤 속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내재적 움직임의 출현



    이 빨간 실의 시퀀스에서 무대 양 옆으로 나무를 세우고 다시 빨간 실을 늘어뜨려 놓는 시퀀스까지는 극의 배경이 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하나의 구멍이 뚫려 버린 것처럼 은근한 소음이 내파되고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노는 존재들이 이야기의 단편을 구성하는 전체적인 이미지 안에서 비로소 그 자체로 생기를 띠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좌우로 살랑거리며 메트로놈 박자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어떤 의지 없이 빨간 실을 감기 시작했던 이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자동 기계 인형처럼 움직인다. 이것의 물꼬가 트이는 것은 이들이 이 똑같은 박자에 같은 움직임을 반복하는 가운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옆으로 미끄러져 뒤뚱뒤뚱 걸어오다 다시 그 박자에 합치된 움직임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짧은 순간이다.


    통일된 박자에 맞춘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넘어갈 때 그로 인한 간극과 리듬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리듬체조를 상기시키는, 온몸을 균형 있게 조율하며 투명하게 동작들을 펼쳐놓는다. 표현하는 동작의 이미지들이 그리는 궤적의 큼직한 전개에서 시각적 조화를 두며 현상될 때 동안에만 춤은 성립한다. 그전까지 멈춰 있음, 말하지 않음, 잉여, 의미 없는 분절은 하나의 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선취하는 표현들, 서사를 집약시켜 놓은 전체 이미지와 그 속의 무의식적 움직임들을 통한 단편들의 구현에서 어느 순간 움직임은 그 자체의 약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 기계 같은 움직임의 언캐니함(움직임은 고정되어 있지만 표정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는)은 세계에서 존재로 옮겨가며 마치 이야기의 배경 묘사에서 인물들의 이야기로 옮겨가는 도식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실상 움직임은 한편으로 그 자체로 내재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미지 속 존재가 춤이 되는 순간은.



    옷은 처음에 어떤 표식이 없는 가벼운 의상에서, 거의 살색과도 같은 배경에 검은 불꽃 내지는 덩굴식물의 가지들이 피어 올라오는 듯한 형상의 무늬들로 장식된 상의 옷으로, 이어 나중에는 검은 바지를 하의에 입어, 완전히 그 검은 무늬가 응고된 형상으로 전환되게 된다.


    이 검은 무늬(옷)가 처음 등장하며, 그 자체의 하나의 움직임처럼 보이는 경우는 실상 그것이 몸 자체에 그려진 것이 아니므로(실은 그것의 구현을 의도한 것이지만) 몸과 일체가 돼서 보이는 것은 아닌데, 처음 머리로 몸을 받치고 물구나무 자세를 하고 있을 때 이 검은 무늬는 불꽃처럼 마치 피어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줄 때이다. 


    곧 이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원본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기괴한 존재들의 차원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 이야기라는 차원이 선취하고 있는 존재의 근거들을 이 표현 자체로만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면, 어쩌면 이 기괴한 존재들은 단지 그 자체의 내재적인 내지는 자족적인 구문에서 벗어나 어떤 폭발의 지점이나 혼돈의 지점을 발생시켜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 부분에서 여러 다양한 이미지들의 제시는 실은 이야기를 충분히 발생시킨 것이 아닐 뿐더러 그 내재적인 움직임을 완성시키는 어떤 하나의 당위로서 존재하지만(존재한다고 믿어질 수 있지만) 실은 맥거핀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을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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