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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동현 <줄 수 있는것, 팔 수 있는 것, 주거나 팔 수 없지만 보존해야 하는 것> : '불가능한 소통의 묘연한 길 찾기'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4. 7. 22:27

    '양이 사는 환경을 껴안기'


    지난 1월 26일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남동현 <줄 수 있는것, 팔 수 있는 것, 주거나 팔 수 없지만 보존해야 하는 것>: 얼마 전 페스티벌 봄 <양의 침묵>으로 새롭게 찾아왔다.

     

    우리는 잠이 안 오면 양을 센다고 들어왔다. 실제 꿈으로 양이 우리를 이끄는 데 성공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양은 의식과 무의식을 경계를 잇는 트릭스터 같은 존재임을 상정할 수 있다.


    양 한 마리와 동거함은 곧 무의식으로 인도하는 나아가 양이 가진 신화적 지위에 걸맞은 세계로 나아감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양이 사는 환경, 양의 유전학적으로 내재된 환경에 적응하는 잠재된 것들이 발현되는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를 함께 맞는 것을 의미한다.


    불가능한 소통의 가능성


    남동현은 양의 말을 번역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트릭이 있다. 한편 뻔뻔하다 싶으면서도 속아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양의 말을 직접 들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어는 분절이 의미를 만드는 격이지만, 양의 “메~”는 차이화되지 않는 어떤 단순한 울음에 가깝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다만 어떤 높낮이 면에서나 현재의 상태를 반영한 정서를 담은 차이를 지닐 것이다. 이 유사한 언어를 감별하는 것은 실은 이 양을 나와 너 사이에 끼워 넣기 위한 불가능한 대화의 시도이다. 그 불가능성을 가능함으로 믿는 가운데 대화의 가능성은 열린다. 


    가령 우리가 사자를 맞닥뜨릴 때 사자에게 우리는 ‘살려달라! 제발 멈춰달라!’는 말을 뱉을 것이다. 이성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다만 우리는 말을 건네고 사자는 사자 나름의 말을 건넬 뿐인 것이다. 그래서 남동현의 언어 구사는 실상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양이 남양이 되기까지 지나온 삶의 과정과 그에 대한 선택이 공연 전체를 앞지르고 있는 형국이기에, 다시 말해 곧 양 한 마리와 동거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연의 모든 과정의 어설픈 형국을 감싸고 또 정당화시키며 소위 수행성이 진정성과 합치되는 순간을 보여주기에 ‘남양’의 언어가 남동현을 향함을, 그리고 남동현을 거쳐 우리에게도 이어질 수 있음을 믿어 주리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트릭의 문제 이전에 삶과 이어진 예술의 수행적 차원과 결부된 문제라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적 차용


    왜 양은 남씨가 되어야 했던 것일까. 이 남동현과 양의 합치된 존재의 탄생을 이 이름이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가. 가인의 뮤직비디오에 나온 양을 그저 남양이라고 구분 짓는 식의 공연의 맥락을 따르자면, 이 남양은 ‘남양유업’의 ‘남양’일수도 있겠다. 충분히(한편 양은 실제 우리가 흑인을 볼 때 외모적으로 잘 구별 못하는 것과 같이 그 외모들이 거의 유사해 보인다. 이 차이를 남동현은 넌지시 알려주기도 한다.).


    곧 이러한 측면은 이 공연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전유와 패러디의 방식으로 설명되는, 많은 하이퍼텍스트적 차용으로서 내러티브의 단편들로 공연 외적인 요소들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러한 교란적인 것 외에, 양이 가진 대초원의 세계, 문명 바깥의 세계에 대한 환유적 감각들을 공연 안에 더 끌고 들어오지 못한 것은 아쉬울 따름이다.


    묘연한 질문을 따라가기


    이 공연에 대한 글은 (얼마 전 페스티벌 봄에서 열린 <양의 침묵>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실은 문래예술공장에서 본 공연을 판본으로 하고 있는데, 그 지난 공연에서는 다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또한 아쉬울 따름인데 페스티벌 봄에서는 마지막에 맨 몸으로 양을 껴안기가 있었나 보다. 이것이 주는 감응은 감동과 숭고함이 따르지 않았을까 같은 공연이라 생각하고 부러 글을 미뤄 두었다. 뒤늦게 뱉어놓는 셈인데, 보지 않아서 아쉬울 따름이다. 공연은 항상 어디서든 동등해야만 한다.


    어쨌거나 자신의 양과 동거하기의 기록을 렉처식으로 펼치는 대신 이상한 우문과 탐문의 과정에서 관객에게 대부분의 책임과 사유를 방기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공연은 그 길이 묘연해진 측면이 컸다. 


    그렇다면 양이든 고양이든 큰 차이가 없었을 것도 같다.


    어쩌면 양이 정말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 믿게 하는 기대감의 인트로가 실은 그 신화적이고 초현실적인 양의 어떤 시뮬라크르의 모습으로 시차적으로 빚어질 때 얻는 허망함이 그 안에 숨겨 있는지도 모른다. 곧 신화적 세계의 트랜스나 변용의 동력이 작품 안에서 일어났는가를 역으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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