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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스티벌 봄] <와의와의과의과 같이>: '재현과 표현의 시차'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4. 21. 04:28


    재현과 표현의 시차


    <와의와의과의과 같이>(공동 연출: 이강일, 최승윤, 위성희, 장현준ⓒ 장현준 


     세 명은 삼각형 구도를 이뤄 하나·둘·셋의 순번으로 앞 사람을 모방한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는 개성 없는 불특정한 현대인, 가령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고와 디디의 변주로도 볼 수 있을 듯하다. 


    동작과 단어는 하나의 단위를 이루는데 순서대로 반복하여 일정한 단위를 또한 이룬다. 문장을 혹은 단어를 전환하는 과정에서 그 문장(단어)이 지닌 속도와 제한된 시간의 제약 내지 규칙에 좌우된다. 


    이는 재현이 얼마나 원본(선후 관계의 앞)을 똑같이 재현하느냐의 문제 이전에 그 만큼의 발생된 시간과 어렴풋한 형태에 대한 강박적 집착에 의해 이 발화가 추동되고 있음을, 나아가 그 발화되고 있음에 더 크게 초점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방의 규칙과 모방에 대한 강박의 코드가 전달 과정에서 무의식적 구문들과의 절합 내지는 무의식적 구문의 호출을 발생시키며 이 시차는 재현이 아닌 표현의 영역이 된다. 규칙적이면서 실상 무규칙적인, 곧 모종의 발화에 대한 시뮬라크르가 됨은 그것을 똑같이 모방 내지 재현하는 데서 똑같아지기보다, 오히려 이미 잠재된 앞과 닮은 구문들을 주워대며 순전히 그 형태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


    차연의 존재론


    여기서 각자는 서로에게 있어, 가령 나는 내가 바라보는 내지는 감지하는 너로 인해 존재할 뿐인 것처럼, 다시 너의 행위에 대한 모방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 기의 없는 기표, 의미 없는 행위의 원환적 연쇄 과정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임의 의미 대신 이 순간의 우연성으로서만, 시뮬라크르의 시뮬라크르로만 의미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앞이 촉발된 것일 뿐인 무엇으로 긴밀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정의되며 ‘이 이후의 것’은 앞서의 기표를 그대로 전달하는 대신 또 다른 기표로서, 그리고 모방의 규약(곧 보이지 않는 형식)과 이미 지나간 것일 뿐인 곧 앞의 것으로 만드는 현재의 행위로 인해 가능하다.


    그 무상성으로 인해, 그리고 덧없이 사라질, 일종의 의미 없음의 의미들은 재료로 응축될 것인 뿐인 것으로 발화되며 일정한 반복 없는 반복으로서 계속함은 (순간에 종속된) 그 무상함의 생성, 시뮬라크르 되기의 (일종의 모방-전달 기계로서) 수행적 장치, 잠재된 것의 내지는 리서치한 것들의 현재적 발현(이미 문장들은 리서치를 통해 아카이브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모방하기, 순간일 뿐인 선행하는(선행했던) 것, 그리고 바라보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줄곧 새로움으로 남는다. 이 끝없는 일련의 ‘차이’들은 앞과 뒤의 차이를 가정하는 동시에 원본과 시뮬라크르의 차이(위계) 역시 지운다. 


    오차 발생


    전달 과정에서 노이즈가 섞인 채 고스란히 전달되는 오차가 큰 커뮤니케이션으로 변형되는 중간 중간 문장들은 동작을 지정하며 그와 결부된 의미로 드러나며 동시에 그럼에도 의미 없는 기표의 형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또는 이 놀이 자체를 메타적으로 성찰하는 (것 같은) 기표로 튀어나오는데, 가령 상황을 전환하거나 환기시키는 기능을 한다(내지는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극이 유희적으로 흘러가고 있음(‘텅 빈 형식’)을 드러내는 것인데 극 자체가 되지 않는 (재현 텍스트를 하는 형식의) 상황에 대한 ‘재현’에서 해석 자체로 드러내는 간극을 만드는 것인데, 결코 짜이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는 이 마네킹 같은 오차 어린 재현 기계가 아님을 지정하며.


     기본적으로 세 번째 순서인 장현준의 오차는 유독 두드러지고 이는 장을 변전시키는 역할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최승윤은 그나마 이성적이고 또는 합리적인 규칙 그 자체의 실행 가능성을 축약해 버리며 정상처럼 보이는데, 첫 번째 위성희는 실재와 환영의 간극에서 곤란함을 특히 더 드러낸다.


    외부 효과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마이크를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는데 이 마이크가 실제 오브제로 쓰이지만 목소리를 확장하는 또는 단순한 사물로 또는 처치 곤란한 문자적인 도구로서 기능하는 것 외에, 바깥에서 일종의 또 다른 ‘마이크’가 사운드 효과로서 인위적으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고와 디디의 극으로서의 허구성을 지정하며 그들을 둘러싼 우화를 만드는 시스템을 지정하는 은유적인 측면에서의 신호로 기능하지만, 그리고 물론 이들의 순환적 원환을 만드는 전환의 규칙 자체로 기능하지만, 이미 텅 빈 형식으로서 말과 움직임으로 묶인, 그리고 세 사람의 오차 발생의 순환으로 묶인 덩어리들의 변형 과정, 그 새로움에 잉여의 차원으로 부착된다. 


    어쩌면, 구조를 벗어나는 형식으로서 순서(이 순서는 1.2.3의 순서가 아닌, 말은 한번-한 사람-에 한번-한 순간-만 허용됨에서 찾을 수 있다)에 따른 규칙이 구조였다면 구조였지만, 그래서 시작과 끝을 상정할 수 없었지만, 무대의 사운드 규칙은 그 끝을 인위적으로 가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별다른 무대 효과는 없고, 또 그것이 끝을 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현준이 나가면서 그 직전에 잠시 갖던 침묵이 일종의 암전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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