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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개막작] <칼리굴라_리믹스> : 말의 파국과 광기의 도주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5. 9. 10:54

    오케스트라-지배의 절합 구도


    ▲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개막작] <칼리굴라_리믹스> [사진 제공=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이하 상동)


    경사도를 가진 테이블, 원탁을 기하학적 배열화한 테이블에 인물들의 배치가 이뤄진다. 칼리굴라는 뒤로 돌아 있고 그의 일종의 지휘봉을 가지고 여기저기를 지정하는 행동부터 시작해 그는 일종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며 다른 이들은 오케스트라가 되는 동시에, 이는 그를 중심으로 도열한 일종의 지배‧피지배집단을 연상시킨다. 


    역으로 따져 본다면 오케스트라라는 것 역시 대표성을 띤 지휘자라는 엄격한 격식의 실천과 실질적인 이끌어감의 주체가 가로놓이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왕권을 지닌 국가의 정확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칼리굴라는 “흥”하고 자신을 경유해 그들 집단에 집중되는 분위기를 내차버린다. 이러한 조소적인 행위와 경멸의 태도는 그의 삶의 궤적을 일부 드러내는 측면이 있다.


    현재의 과거로의 누빔점을 형성하며



    일단 이 작품은 역사 자체를 재현의 관점에서 다소 벗어나 다룬다는 점에서 꽤나 메타-역사적인데, 이 속에 등장하는 칼리굴라는 자신이 벌인 행위를 어느 정도 알고 항변하는 것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코러스의 말은 칼리굴라의 있었던 일들을 집단적인 효과에 힘입어 서술하는데, 이는 극을 이끌어가고 동시에 칼리굴라의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명징함을 띠고 의식을 옭아매는 측면을 갖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미 선고된 말(칼리굴라의 과거)은 동시에 선고하는(칼리굴라로 하여금 각인되게 하는) 말이 된다. 과거는 운명처럼, 죄악처럼, 기피할 수 없는 삶으로 그를 지배한다. 곧 과거의 트라우마적 반복, 딜레마적 위치는 그의 무의식 속 지배인 동시에 이미 하나의 운명으로, 이미 칼리굴라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후대의 평가가 지속되어 온 현재의 시점이 입힌 상태에서 칼리굴라를 그리고 현재의 관객을 향하게 된다.


    칼리굴라의 아이러니함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역사에 대한 현재로부터의 서술의 측면에서 그리고 이어 그의 광기라는 그 스스로가 지닌 측면 자체에서 그렇다.


    옥죔의 대기 속에서



    코러스의 형태는 다양한 변주로 이뤄지는데 한 명이 말을 지정하면(이 작품에서 말은 이미 벌어진 것에 대한 것 그리고 벌어져서 어쩔 수 없음의 의미를 담으므로 일종의 강력한 예언이자 망각할 수 없는 무엇이라는 강력함을 지닌다) 또 다른 코러스는 이전처럼 웅성거림을 반복하기도 한다. 


    칼리굴라는 이 소리들의 존재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곧 이 사운드가 채우는 시공간에 칼리굴라의 숨 쉴 곳은 부재해 보인다. 그의 누나이자 그가 연인으로 사랑했던 드루실라가 죽었다. 그리고 폭발적인 사운드를 내재한 대기의 진동, 그 자장의 여운이 길게 지나간다. 


    일종의 목소리는 언어의 명령의 기능을 운명에 대한 피할 수 없음으로까지 끌어올리는 측면이 있는 가운데, 중첩된 기표로서 기의(뜻)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기표 자체로서 곧 사운드 자체로서 드러나게 된다. 코러스는 말 그대로 지휘자가 있는 가운데 음악에서의 코러스인 것이다.


    칼리굴라를 둘러싼 일종의 소음들, 그리고 지휘자로서 자신의 운명으로의 예속을 명명하는 코러스의 목소리들을 그가 지휘봉을 들어 지정하여 그것을 나오게 함은 꽤나 아이러니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디오니소스의 광기



    그는 불가능성에 직면하고 맞부딪침으로써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근원적인 측면에서 자유를 갈망하는데,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구분을 상기시킬 만큼 그는 진정한 왕이 되고자 하며 그를 지배하는 모든 규약들을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지니는 동시에 불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천착의 자세를 보인다. 동시에 그 전능함으로 모두가 그런 자유로움을 지닌 존재로 표상케 하는 평등함을 부여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이성의 힘이 아닌 광기와 접면해 있다.


    그는 진정 신을 부정하며 죽였기에 그 시대를 앞서간 최초의 모더니스트이자 그것을 처절하게 실재적으로, 신체적으로 극복하고자 한 유일한 인물이 된다.


    그가 끊임없이 달을 좇(쫓)았다는 것은 마치 고대의 신화를 생각나게 한다. 해와 달이 두 개로 분리된 현재에서 달만이 떠오르게 될 때 지구는 멸망하고 모든 것은 평등해지리라는 그런 내용을 담은 신화.


    무엇보다 달은 어둠을 그리고 이성의 이면을 상정한다. 그는 해와 같이 세계를 밝게 빛내며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세계를 꿈꾸는 대신, 그 스스로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동시에 디오니소스의 예술이 세상에 놓임을 꿈꾸었다.


    그의 어둠은 드루실라의 죽음, 지속되지 못한 사랑, 그 사랑에 대한 세상의 부정 등으로부터 연유하는데 죽음으로부터 그리고 죽음 뒤에 오는 사랑의 실재는 이 사랑이 불가능성을 띠지만 동시에 그 불가능성의 문턱에서 좌절과 실패를 극복하고자 하는 불가능성의 시도를 생산하는 측면에 연관된다. 곧 그에게서 애도란 지속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다. 애도 자체가 광기를 생산하는 에너지이자 불가능성에 대한 도전이 되는 것이다.


    칼리굴라와 그의 신하 케레아는 극명한 대립을 보이는데, 광기와 무의식은 이성과 의식의 세계에서 수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케레아로서는 이상한 생각(=광기), 분노로 탈주하는 칼리굴라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무의식을 제어하지 않으면 사회는 정상적인 궤도를 밟아 나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분열증적 도주


    그에게 부재하는 드루실라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에게 ‘늙는다는 것’은 함께 그 늙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곧 사랑은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이다. 그것이 부재하며 또한 실패한 그로서는 늙음과 함께 하는 사랑은 지속될 수 있는 무엇을 꿈꿈일 수밖에 없다.


    그에게 고통 없음과 슬픔의 귀결은 엄밀히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슬픔은 사랑의 실패에 대한 것이며, 고통이 없는 행복은 이 불가능성의 사랑이 더 이상 지속 안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고통이 끝나면 애도는 성공하며 그의 사랑에 대한 증거도 기억도 아물며 그 사랑은 하찮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실패와 시도 사이 불가능성이 낳는 시차는 분열증적 도주로 이어진다.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그의 시각으로 삶은 긍정되며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비극은 오히려 초극의 의지로써 긍정된다.


    자유는 그가 그토록 꿈꾼 것이면서 동시에 신적 금기, 초자아 등의 어떠한 것도 그를 제어할 수 없는 것이 될 때, 곧 광기의 폭주기관차가 될 때 그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절절한 고독함의 광막한 사막을 마주해야 한다. 


    그의 말들은 막바지에 이르러 긴 스스로에 대한 변론이자 서술이 되며 끝없이 높은 강도로서 이어진다. 이는 거의 관객으로까지 전이되는 분열증적인 측면의 파편적인 분출이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말들은 강도를 높이고 그를 옥죄며 숨 막히게 하며 사운드는 칼끝이 되어 그의 목을 향한다. “난 아직 살아있어”그는 그의 은밀한 방(내면)으로 가 죽음의 순간마저 부정한다. 


    그렇게 그는 살아있음으로 찰나적인 죽음으로부터 도주한다. 더 이상 말들이 없을 때 이 음악극의 사운드가 단 하나의 최초의 독백으로 변할 때 이 극은 실재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생산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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