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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늙은 뱃사람의 노래> : ‘라이브 밴드와 동화의 기기묘묘한 결합’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5. 14. 05:06


    ▲ <늙은 뱃사람의 노래> [사진 제공=LG아트센터]


    <늙은 뱃사람의 노래>는 환상적인 이야기 구조로 이뤄져 있다. 알바트로스를 죽인 뱃사람을 용서한 선원들이 정령들의 분노에 따른 항해의 어려움 탓에 죽은 알바트로스를 목에 걸어 죗값을 치루라는 명을 하고, 배는 유령선을 만나게 된다. 선원들은 그 뒤로 모두 죽고 뱃사람만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내용이다.


    전반적인 내용은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의 뜻을 어겼을 때 겪는 고난이라는 전형적인 신화의 줄거리를 그 운명 자체의 비극으로 소급시키는 대신, 그것을 겪는 미약한 존재들의 고난의 파란만장한 서사 뒤의 운명애, 그리고 불행 뒤에 찾아오는 역설적이고도 비극적인 행복과도 같은 과정에 초점을 맞추는 데 가깝다.


    신과 그의 뜻이 중요한 것이라기보다 그것으로 인해 일그러지는 삶의 반영을 승화시키는 고된 삶 자체의 투박함을 비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곧 운명이 비극임을 감안할 때 비극 자체의 순수한 긍정과도 같은 것을 하나의 메시지로 드러내는 것이다.


    ‘진정한 음악극의 양식’


    ▲ <늙은 뱃사람의 노래>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 공연을 ‘뮤지컬’이라고 한다면 큰 오차를 범하는 셈이다. 이러한 언급은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흥행에 성공한 그들의 또 다른 공연 '쇼크헤디드 피터(Shockheaded Peter)'가 컬트 뮤지컬로 정의되는 것에 대한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분명 ‘음악극’으로 보는 게 맞다. 극 속에서 노래 부르는  자크는 실은 그 노래 부르는 자체의 존재를 고스란히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뮤지컬과는 다르고, 일정 정도는 대중음악에서 ‘진정성’ 이라는 부분으로 특히 대중에게 접근하는 대중가요 가수의 위치와 공유된 측면이 있었다. 


    또한 덧붙이자면, 뮤지컬 가수가 가수 자체의 정체성을 갖고 갈라쇼를 하는 것과는 더 큰 차이가 있다. 이는 일종의 극을 빚어내는 연금술적 측면에서 노래가 진행되며 무엇보다 이 노래와 환영을 통해 노래 너머의 세계를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동시에 관객을 잇는 우스꽝스럽고 슬픈 광대의 위치가 싱어의 측면의 나머지를 확고하게 채웠다. 포스터상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그로테스크하게 비춰졌는데, 실은 투명한 그러나 짙은 화장의 표피에 가까웠고 흥겨운 그들만의 ‘극적’(극 자체를 벗어나 동시에 그것과 연결되는) 스타일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팔세토 창법을 완벽히 수행한다는 마틴 자크는 언뜻 가성처럼 보이는 대체로 비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듯하지만 두성으로 공명을 내 명확한 가사 전달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크의 노래가 다소 몽환적이고 비슷한 결을 반복한다는 것에 있어 다소 단조롭게 느껴지는 바를 언급할 수 있을까. 이는 그의 단단한 목소리에 힘입고 있는 밴드가 특별하게 연주의 자리를 내세우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한편으로 목소리 자체는 천변무변의 변신의 위용을 가져갔지만 그 보이스 컬러 자체는 어느 정도 일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상과 노래의 변증법적 관계 맺음


    ▲ <늙은 뱃사람의 노래> [사진 제공=LG아트센터]


    극 전체를 지배하는 홀로그램 영상은 일종의 계속 이동하는 것, 그리고 좌우로 나중에는 상하로 움직였다. 그리고 아주 가끔 나타나는 정적인 장면이 있었다. 이 동적인 흐름들은 이들 밴드와 ‘극적 대비’를 이뤘다.


    이 ‘타이거 릴리스 밴드의 앞뒤로 유영하는 이미지들’은 그 이미지들이 이루는 이야기 자체가 삽입된 것으로서의 의미, 곧 메타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곧 연주자들과 합산된 형태로의 전체가 되기 위한 적절한 거리를 형성하는 것이 아닌, 단지 일부로만 존재하는 밴드 뒤의 네모난 상자 안에서의 원근법을 비롯하여, ‘실재 같은 환영’은 환영 그 자체로 존재했다.


    일종의 잉여의 차원에서 제시되는 듯한 영상은 노래와의 변증법 같은 관계 속에서 지나갔다. 곧 노래는 이 영상을 분절하며 의미를 형성하고 마감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 외떨어진 밴드의 신체는 환영과의 관계성과 그 환영의 생성을 현상해 냈다.


    가령 ‘Land of Ice(얼음의 땅)’에서, “ice”의 부분에 있어 그의 앞을 지나가는 ‘흰 눈’은 어떤 입김처럼 실제 환경의 영향 하에 있다는 착각을 줄 때는 꽤 절묘하다. 물론 눈 자체는 사전적인 것이므로 어느 정도 의도적인 것이라 하겠지만 무엇보다 전적으로 영상(멀티미디어)의 힘만이 아닌 노래 자체의 힘, 그리고 노래와 멀티미디어의 공명이 일어난 것이다. 


    마틴 자크(Martyn Jacques)의 노래는 또한 일종의 목소리 자체를 투박하게 드러내는 형식을 취했는데, 일견 풍속적이고 동시에 서사적이었다. 밴드는 주로 바다에서 진행되는 관계로, 이 바다 속 중간에 유령처럼 단 한부분의 실제로 놓여 있는 셈이다.


    전체적으로 이들 노래를 기표 그 자체로 감상하기를 바라는 한국으로의 번역은 노래방 자막처럼 맞물려 가사가 진행되는 대신 일부를 앞에 한꺼번에 제시하고 이어 자막을 틀지 않는 식으로 진행했다.


    ‘천변만변의 이미지와 목소리의 변신술’


    ▲ <늙은 뱃사람의 노래>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 이야기는 서사의 온전한 궤적을 완성한다거나, 각각의 노래로 구분되는 단편들이 유기적으로 조합될 필요는 없다. 각각의 노래를 통해 어떤 특정 분위기에 도달하고 해결되지 않은 남은 부분은 (물론 환영과 함께) 사후에 관객에 의해 조합되면 될 뿐이었다.


    자크는 ‘알바트로스 두 번째 파트(Albatross 2)’에서부터 갑작스레 흥을 돋우기 시작하는데, 이는 멜로디 선율을 처음 아코디언으로 시작해 그것을 멈추고 보컬에 따른 현장감을 따른 역량으로 무대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이다.


    극의 내용적으로도 선원들은 고립되는 과정을 담고 있는 것과 같이, ‘Water Water Everywhere(물, 사방이 물)’ 넘버에서는 물이 흘러넘치는 가운데, 선원들 곧 밴드들의 전반적인 고립된 상황 자체에 갇힘을 현상해 내는 측면이 있었다. 여기서 목소리는 절절하고 낮게 깔리며 비켜 나가는 가운데 떨림이 강조됐다. 곧 밴드는 목소리를 통해 마치 유령처럼 그 속의 갇힌 존재로 현상되는 것이다. 


    고립된 상황에 이어 '죽음의 소녀(Death Maiden)'가 위에서부터 갑자기 출현하며 화면 전체를 유영하는 존재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 자크의 ‘현실적 목소리’가 덧대어진다. 거의 환영 자체인 것처럼 들리던 그의 독특한 목소리가 굵어졌던 것이다. 이어 몽골의 흐미창법을 연상시키는 진득하게 변용된 목소리도 튀어나왔다.


    ‘바닷가 궁전(Palace by the Sea)’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뱀이 지나가며 이들을 모두 집어 삼키고 섬멸하는 듯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 음울한 분위기는 그것이 승화되는 어떤 분위기(아우라 그리고 낭만적인 것) 자체로서 이 환영에서 내재적인 측면으로 만족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이 마치 이들과의 극의 환영에 둘러싸여 실은 우리가 그를 일종의 막의 매개를 통해 살펴보고 있는 것과 같이.


    곧 <늙은 뱃사람의 노래>의 이야기는 매우 신비롭고 동시에 매개를 통해 그 신비로움이 고스란히 보존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밴드를 둘러싼 극은 ‘극화’라기보다 극 그 자체를 씌우는 프레임인 것이며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 목소리와 별개로 유영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극에 수렴되고 한편으로 벗어나며 그 외부의 세계로 사라져 가는 것이다.


    ‘죽음의 바다’에서 선원들의 '썩어 들어가는 육신(Rotting Flesh)'로 가득할 때 밴드 역시 그 이미지에 질식되는 듯싶다. 자크는 그에 맞춰 가래 끓는 소리(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제 이는 오페라에서 존재하는 창법의 일부이다)까지 대입해 그 속에서의 현존의 강도를 높였다.


    '비극의 희극으로의 전도‘


    ▲ <늙은 뱃사람의 노래> [사진 제공=LG아트센터]


    배가 ‘표류(Drifting)’한 상태에서, 커다란 물고기가 전체를 삼키려 다가올 때는 어떤 극점에 다다랐음을 인식하게 한다. 그 크기로부터 압도되는 것이다. 이는 ‘저 세계’에서의 두려움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이는 저 세계로의 두려움과 숭고일 뿐만 아니라, 사라진 듯한 ‘이 세계’의 무대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가 ‘이 세계’ 곧 무대 바깥의 현실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도 엄밀하게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참고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은 서사를 메타적으로 논구할 때 주요한 개념이기도 하다).


    ‘바다 속에서(In the Waves)’에서는 인어도 출현한다. 인어는 이 벗어날 수 없음의 환경, 근원적인 유폐된 유랑의 궤적이 갖는 환영성의 두려움을 얻게 하는 가운데 자크의 어떤 사랑과 낭만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목소리와 연결된다.


    이제 배는 생명의 기운 자체를 아예 잃고 죽은 자들만이 탄 역설적인 부재의 공간이 된다. 곧 이 ‘망자의 배(Dead Man Ship)’에서는 위아래 화면이 멀어져가며 공간이 확장된 듯한 순간 공간의 지층 자체가 흔들리는 느낌을 줬다. 아찔한 감각을 안기는 순간이었다. 이는 환영은 환영일 뿐이라는 생각을 간단히 전복하는 순간의 한 부분이라고도 하겠다.


    ‘환영 속으로 사라지다’


    ▲ <늙은 뱃사람의 노래> [사진 제공=LG아트센터]


    '희망봉(Cape of Good Hope)'에 이르자 이제 무대는 평온해진다. 일종의 무대로서의 규약이 앞선 환영성 자체는 유지한 채 다시 돌아온다. 미러볼이 위에 매달려 있고 종이가루를 영상에서 뿌리고, 점멸하는 빛과 함께 클리셰로서 ‘끝의 환영’이 극도로 두드러지고 있었다. 끝이라는 환영 자체로 동시에 (원래의) 환영 속에서 사라지며.


    이런 이중의 중첩된 무대 구성은 온전한 현실로부터 떨어져서 환영을 잇는 현실로서 경계의 위치에서 현실을 채우는 입장에서, 그것과 절연한 채 그 자체가 환영이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에 ‘생지옥(Living Hell)’의 부가적 한 곡이 덧붙여졌는데, 처음으로 극적 시간에 관객의 반응을 실제 현장의 시간으로서 삽입한 형국이었다. 관객들은 이전 곡에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극이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렇게 착각할 만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불에 타들어가는 생지옥의 광경 속에 다시 무대의 막이 그 위에 그대로 닫히고 불은 꺼지지 않는다. 이들은 환영을 환영 그 자체로 남기는 길을 택한 것.


    관객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박수를 길게 쏟아낸다. 이 환영적 극에 육화되는 목소리와 연주의 힘이 앞선 ‘관객의 무의식적 종합’의 수용으로 이어진 결과일 것이다. 환영을 실재로 바꾸는 한편, 환영을 어떤 초월적 세계로 가는 힘이 된 것은 바로 이 노래라는 매개에 다름 아니었다.


    p.s. 사실상 극 중반에 박수 칠 타이밍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극의 집중도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극 자체의 환영적 규약을 지켜 나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이 무대 자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이 이들 곧 선원과 뱃사람이 겪는 운명과 일치함은 물론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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