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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연습-모델, 하우스’: '연극은 어떻게 일상의 시공간을 여는가"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5. 9. 12:22

    '무대-공간을 벗어나다'




    구름과 풍선, 비와 비를 맞음이 시작과 끝의 상동성은 자연과의 합치라는 메타포를 제공하는 한편 이 무대를 단지 무대가 아닌 그야말로 탈-무대, 그리고 자연에의 사유 그 자체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이는 공간을 비우는 방식, 연극으로부터 벗어나며 삶의 이야기들로부터 연극의 이름을 희미하게 건져 올리는 내지는 구출해 내는 이 작품의 묘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이 오프닝과 엔딩 신을 잉여적이면서 동시에 그의 작품을 주요하게 설명하는 측면의 일부로 기능한다면 뒤이어 이경성이 처음 무대를 구성하는 방식은 꽤 단순한 듯 특이한 데가 있다.


    이는 일종의 공간을 탈공간화시키며 중첩시키는 방식에 의한다. 연출자 이경성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곧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을 전유한 배우들과 인터뷰를 꾀하며 여러 층위의 질문을 던진다.


    '중계되는 우리'


    ▲ ‘서울연습-모델, 하우스’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


    배우는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되 실은 인터뷰어가 아닌 자신 앞의 카메라(매체)를 향해 말을 하는 것이며 이는 다시 큰 TV로써 실시간 중계되며 해당 인터뷰이를 제한 사람들은 뒤돌아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다.


    이는 실시간 현장을 매체의 일부로 이중으로 통합하고 있는 셈인데, 배우의 목소리가 TV에 삼켜지며 그를 바라보는 관객은 일종의 뒤돌아 선 불특정한 대중으로 이 실시간 현장과 분절된다. 이 관객은 우리 자신을 환유하면서 동시에 현대인을 은유한다. 곧 우리는 이 대중매체의 감상자로 상정되는 것이다.


    마치 TV를 보는 이들은 서울역 같은 공공장소에서의 대중을 상기시키는 측면이 있다(애초 개인적으로 이 공간이 제목의 모델하우스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그가 사전에 돌려놓은 전자레인지 속 냉동음식의 해동이 다 할 때까지인데, 이는 인터뷰가 단지 잉여의 시간이며 잠깐의 허락된 일상의 시간 속에서만 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는 일상의 ‘인스턴스적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며 동시에 무대의 시간을 일상의 시간 안에서 탈맥락화하는 것이다.


    '배우가 배우임을 고백할 때'. 연극을 뒤흔드는 순간 하나


    이경성이 무대를, 연극 자체를 뒤흔드는 지점은 크게 두 가지 사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배우가 배우임을 고백할 때 그에 앞서 이것이 연기냐는 질문을 연출자 자신이 던지는 것일 것이다. 

    이는 이 극의 자기 참조적인 부분인 동시에 그 사실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는 자신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고 이는 자신이 연기를 하고 있음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배우 스스로가 역할 그 자체가 아닌 역할에 분하는 배우 자체로 돌아가게 될 때 연극은 재현(이뤄진 것의 다시 이뤄짐)일 수밖에 없는가의 질문이 부상한다.


    삶을 횡단하는 질문



    전체적으로 질문들은 정치적인 것의 기능을 띠며 자본주의가 삶의 횡단선으로서 선명한 자국을 남기고 있음의 연장선상에 있다. 


    질문들은 현재‧현실과 닿아 있다. 동시에 미디어가 앞서 인터뷰를 중계했듯 그리고 그 중계를 통해서 인터뷰가 성립했듯 이 질문들은 동시에 미디어를 통한 수많은 말들 그 자체이기도 하다.


    어쩌면 질문들은 우리 일상에서 나온 것이면서 일상 그 자체를 뛰어넘을 수 없음 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같다. 즉 평범한 것이면서 현재 우리의 현실의 문제들에 대한 대답들을 각기 다른 배우들의 말을 통해 도출하는 것이다.


    질문이 이뤄지는 순간 인터뷰가 끝나는 순간도 출현한다.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질문이 나오는 순간.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시간 동안만 질문이 성립한다는 것은 인터뷰에 대한 대답의 시간이 유동적일 수 있음의 표지가 된다. 곧 모든 것이 대본이라 할지라도 일종의 타이머 안에서 똑같은 시간으로 드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른다면.


    “괜찮으십니까?”란 질문이 배우 자체를 우리 스스로를 뒤흔들기도 한다. 우리는 괜찮지 않다가 전제된 질문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괜찮지 않음을 왠지 우리 모두 인정해야만 할 것 같은 것이다. 괜히 ‘힐링’이라는 말이 판을 치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물론 다소 난센스 형식을 띠며 형이상학적 질문도 있다. ‘돌아오지 않는 우주선’을 탑승할 생각이 있느냐 인데 이는 유예된 질문의 형식으로 곧 우주선을 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배우는 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우리 삶의 무수히 포기하는 자세의 단면을 드러낸다. 

    결국 ‘돌아오지 않는 우주선’이란 곧 이 현실 바깥에 대한 사유이다. 곧 사유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형성한다. 


    이 말들의 홍수 이후에 배우들은 모두 한 무대, 곧 백색 공간에 모인다. 이는 정확히 각자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일상의 존재 그 자체를 넘지 않는다. 곧 일상 그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그 전에 무대와 객석의 경계에서 곧 무대의 끄트머리에 서서 그 경계를 드러내며 관객을 한명씩 응시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말이 없음과 제4의 벽을 완전히 허문다는 인식 하에 신체적으로 뒤섞이며 관객의 어찌할 수 없는 무대로의 참여를 이끄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으로 열린 시간-무대'



    탈무대를 만들고 또한 ‘광장 만들기’를 거쳐 온 이후 이곳은 어떤 공통의 비워진 터전이 되었는데 이 안에서 실제 삽질을 해서 나무를 심고 스크린에는 비행기 모형을 손으로 들고 이동하는 모습이 겹치며 트램폴린에서 뛰는 조깅복 입은 여자, 그리고 비둘기를 모사하는 남자 등이 배치되며 일상의 세계를 만든다.


    이 비워진, 더 정확히는 일상적인 것으로, 삶의 문맥으로 재편한 비워진 무대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없다. 그들의 말이 리서치와 인터뷰를 통한 것이어서 얼마만큼 삶의 이야기 그 자체를 반영했느냐의 문제는 부차적이다. 


    오히려 주어진 텍스트가 아닌 삶으로 기능하는 질문들을 통해 연극의 무대가 되는 현실의 언어를 소거한 채 이 말들이 삶과 연극을 가로지르며 탈주할 때 비로소 연극은 공간을 얻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사유의 공간이자 이 무대 너머의 공간이다.


    이러한 무대 비우기는 꽤나 유효하고 적절했다 보인다. 


    이 (무형의) 공간에 대한 강조는 또 다른 챕터인 ‘놀이 터’를 기존의 놀이터에서 터를 띄어 쓴 것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기능을 위해, 자유롭게 무엇을 할 수 있기 위한 비워진 곳으로서 ‘터’를 강조하는 재명명인 것이다.


    스태프들은 돌연 무대 전환에 출현해서 배우들의 경계선 위치 지음을 다시 전유하는데 이는 이들이 스태프로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곧 잉여의 위치에 있으면서 그들이 그 경계선 안에 있어 무대에 속해 있음을 드러낸다. 이들은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 존재들이지만 가시적 존재가 되며 연극의 규약을 그 자체로 드러낸다.


    이는 역시 연극을 연극으로서 드러내며 기존의 연극을 뛰어넘고자 하는 이경성의 영리한 장치라 하겠다.


    '끝의 시차적 생산'. 연극을 뒤흔드는 순간 둘


    각 막에 따라는 자막은 수행적 지표가 된다. 무엇이 펼쳐질지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수행적 기능의 표지는 마지막 5분의 타이머가 작동될 때 그것과 겹쳐 배우가 5분 남았다는 이야기를 꺼낼 때 역시 적용된다.


    5분이 지나면 극이 끝난다는 규칙에 대한 선언은 앞서 언급한 나머지 하나가 되겠다. ‘5분이 지나면 과연 극은 끝날 수 있는가’, ‘정확한 시간에 돌연 극은 마무리될 수 있는가’의 물음(이는 인터뷰가 갑작스럽게 중단되며 우연적인 사건으로 발생된 듯한 곧 발생을 멈춘 듯한 발생 이후의 것과 동일한 측면에 속한다)을 남기며.


    당연히도 그 5분 이후 끝난 것은 아니다. 끝은 모호한 지점에 속한다. 배우의 연기가 집중을 멈추는 순간 내지는 막에 어둠이 내리면 관객들이 자연스레 박수를 치기 직전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동일하다.


    일종의 5분(끝) 너머의 잉여로서 비는 내린다. 이 비는 한 마디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장치에 다름 아니다. 곧 끝의 인위적 드러냄 이후에도 끝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어떤 장치가 필요함으로 연극 자체에 대한 언설을 또 한 번 내뿜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 비는 우리 현실이 씻겨내려 갈 수 있음의 그리고 공통된 환경에 거주함을 드러내는 낭만적인 동시에 근원적인 메시지가 아닐까. 세상이 이토록 착해질 수 있다니, 그리고 공통된 광장과도 같은 세계를 경유할 수 있다니, 아 그러고 보면 참 '착한 연출 이경성'인 것 같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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