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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해변의 카프카> : ‘경계 넘기’가 가져다주는 삶의 축복성
    REVIEW/Theater 2013. 5. 14. 03:43

    장엄한 거대 서사의 궤적



    ▲ 지난 5월 8일 열린 <해변의 카프카> 프레스콜 장면 (이하 상동)


    <해변의 카프카>는 삶과 역사를 꾀는 거대 서사의 흐름을 가져간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간다’는 콘셉트는 삶을 의도치 않은 여행으로, 삶의 여정을 또한 길로, 비유하는 세계관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발적으로 맺는 관계는 거의 필연적인 운명의 한 부분으로 작용하며 이러한 관계 맺음이 스스로로 완성되지 않는 삶의 총체적인 궤적임을 또한 역설한다.


    이러한 ‘미지로의 여행’이라는 서사는 이중의 평면으로 진행된다. 카프카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과 나카타의 잃어버린 반쪽의 그림자를 찾아가는 과정은 한편 역사와 개인의 층위가 병치되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며, 결국 이 둘은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지점의 입구를 여는 데 성공한다.


    연극을 통해 유추한 원작 ‘해변의 카프카’는 ‘환상성’을 특징으로 갖는다. 이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의 탐색이라는 경계선상에서의 여행을 상정하며 신비로운 현실을 묘사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꿈과 현실 자체를 허무는 듯한 환상성이 부각되게 된다. 


    인간과 동물이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세계



    <해변의 카프카>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미시 생명체들의 관계가 맺는 하나의 거대 세계를 상정하고 우주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감각을 회복하고자 한다. 단순한 개인의 이야기를 좇기보다 꽤 원대한 꿈과 시각으로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이다. 


    이 해변은 독특한 연주와 함께 단지 푸른 지평선이 아니라 푸른 지구와 우주를 형상화하며 신비한 소리가 내면을 휘감는 그런 어떤 벅차오름이 있는 그런 공간을 의미한다. 인류가 자연과 대칭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의 원초적 의식을 각인한 세계가 구현된 것 아닐까. 여기에 열다섯 살로 명명된 주인공 카프카는 개인적 삶의 지평으로부터 근원적 삶을 향한 의지를 정초한다.


    그를 따르는 까마귀는 그의 드러나지 않는 내면이지만, 동시에 그를 이끄는 인도자이자 목소리로 인간과 동물의 중간 형상으로서, 일종의 트릭스터와도 같다. 


    한편 카프카와 유비적 관계를 형성하는 나카타는 아홉 살 때 사고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으며, 동물과 통하는 인간과 동물 간 대칭적 세계에서의 신화적 존재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논리적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카프카의 인간과 동물인 새의 교감능력과 일치한다고도 하겠다.


    카프카가 현실로부터 도피 하에 숨을 곳을 찾은 곳은 ‘신비한 도서관’이다. 여기서 근무하는 오시마(김준호 배우)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되지 않는 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창출하는 모호한 성에 대한 우화는 일종의 현실의 분류법을 따르지 않는, 그 스스로가 현실 자체에 대한 인식을 재정초해야 하는 아포리아의 자리를 만든다. 바로 <해변의 카프카>의 신비함이 정초하는 현실을 탈코드화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남성과 여성의 구분 역시 벗어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균열의 지점: 폭력의 그림자’ 



    순수성을 대표하는 나카타를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조니워커(장용철 배우)는 ‘살인기계’로서의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한다. 이는 일종의 살인에 대한 양적 축적만이 있는, 목적 없는 삶에 그 스스로 종속됐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목적에 대한 자신도 통제할 수 없음의 부림에서 이제는 벗어나서 진정한 죽음을 통한 지금의 죽음 같은 삶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가운데, 자신의 대리자로서, 또 다른 살인 기계를 남기고 떠나겠다는 의도가 투영된 것이다.


    <해변의 카프카>는 이를 다시 아돌프 아이히만의 히틀러의 유대인 살인 기계로서, 스스로를 초월한 영혼 없는 대리자가 됐던 삶을 병치시킨다. 아이히만은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율을 끌어내고자 하고 이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나카타는 조니워커의 행위의 영향력 아래 ‘알 수 없는 분노’가 싹튼다. 조니워커 앞에 위치한 거울은 나카타의 순수성의 자아와 폭력이 자리하게 되는 자아 사이에서 균열과도 같은 무언가 발생되고 있음을 비춘다. 조니워커는 고양이 가슴에서 심장을 꺼내는 것을 상상하며 고통을 느끼게 한다. 


    이로써 비롯되는 나카타의 고통은 집단 고양이 살육의 카니발적 의식에 휘말리며 그러한 전체적인 행위를 일으키고 있다고 판단되는 ‘악’에 대한 제거의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게끔 한다. 


    이는 모든 것을 무화하고 재정초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벤야민의 ‘신적 폭력’과는 다른데, 이는 이미 그가 폭력의 과정에 폭력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연루됐고 그보다 그가 잃어버린 반쪽 그림자가 그가 지니는 폭력성의 일부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카타는 조니워커의 폭력에 무력하기 때문에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의 변용태를 겪게 된다. 이러한 변용태는 순수성과 폭력성의 경계가 해체되는 어느 시점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는 살인죄를 저지르고 이를 고백하러 온다. 이는 현실 세계 자체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인식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두려움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은 그를 그저 지능 낮은 사람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그를 그냥 보내게 된다. 


    개인의 기억과 역사의 기억



    동시에 이 ‘무서운 서사’는 역사의 특정 시점들과 맞물려, 개인적 서사가 아닌 인류 공통의 서사, 그리고 트라우마로 자리하게끔 한다. 한 명의 망각된 기억에는 인류 공통의 기억이 압축된 채 은폐되어 있는 셈이다. 이러한 망각을 발생시켰던 어느 시점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무의식으로 기입되어 있다. 


    인류의 인류에 대한 살해는 순수함과 폭력성이 분리되는 순간을 낳았고, 그러한 충격이 분리된 일면으로 반쪽을 잃어버린 나카타를 상정한다는 게 거기에 담은 의미가 아닐까.


    한편 카프카는 학교를 다니다 나왔기 때문에 그가 가진 젊음은 실상 일상 현실의 공백과도 같다. 대신 이 세상이 아닌 저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며 ‘반쪽 (그림자)를 찾는 여행’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일상의 공백은 도서관에서 한층 더 신비스러운 입구로 나아간 숲 속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세계로 연결되는데, 이러한 현실의 공백 공간은 그가 현실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탈현실의 세계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숲은 다시 제2차 세계대전‘에서 그 전쟁으로부터 도망친 병사들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또 다시 역사와 개인의 현실이 환상적으로 맞물리는 지점을 만든다.


    카프카가 ‘저 세계’라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면, 그의 무의식은 또 다른 그의 내면 속 ‘미지의 세계’다. 그의 무의식 속에 아버지의 폭력과 그에 대한 분노, 그리고 아버지가 살해됨에 대한 미스터리가 숨겨 있는데, 이는 나카타가 겪는 변용의 과정, 순수성과 폭력성이 균열을 겪는 순간과도 대칭을 이룬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를 감춘 무의식은 다시 역사적 트라우마와 결부된다.


    ‘순수성의 훼손: 통과의례’




    카프카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가 여행 중 만난, 누나 사쿠라(배우 장지아)는 자신의 동생을, 사에키(배우 강지원)는 아들을 잃어버렸다. 카프카가 잃어버린 누나, 그를 떠난 엄마가 각각 사쿠라이고, 사에키인지는 넘치는 단서들을 제시하면서도 확실한 결론은 유예되는 식으로 그려진다. 


    카프카가 사에키를 대면하여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에키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다는 점에서, 마치 모호한 기능의 전환사로 사용하며 그의 어머니를 부르듯 그 호칭을 제시하며 동시에 짐짓 아닌 척하며 사에키의 반응을 시험한다는 점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보다 진실이 어떻게 기능할 수 있음으로 건너뛴 형국을 이룬다. 


    병치된 카프카의 섹스와 호시노의 섹스는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이뤄지는 대신, 부족사회의 통과의례 차원에서 수용해야만 하는 차원으로 제시된다. 이는 현실 차원이라기보다 환상성 그 자체로 현시되는 것에 가깝다. 카프카의 침실로, 호시노의 잠자리로 찾아온 여성들은 각각 그들의 꿈을 방문한 환상의 여인들인 셈이다.


    특히 카프카의 상대역인 사에키와의 섹스가 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환유적으로 재조립해 주는 차원에서 의미를 가진다면, 호시노의 상대역은 윤락 여성인 셈인데, 이를 주선한 켄터키프라이드치킨(KFC)의 창업자를 전유한 ‘커넬 샌더스’는 전 세계적인 체인망을 운영하는 대표자로서, 상업의 ‘무차별적 장악과 포섭’, 그리고 상업적인 것과 인간적인 경계를 넘어 작용하는 상업의 ‘반인간적 논리’ 속에 사고팔 수 있고 교환 가능한, 동시에 그를 통해 궁극의 열락을 제공하는 섹스를 그 자본주의 논리의 예시로 제시한 것이다.


    문제는 이 성의 문턱에서 태어남과 죽음의 경계, 성과 속의, 자아와 자아 너머의 경계가 문제가 모두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호시노의 섹스는 섹스의 결과를 논하기 이전에 자본주의의 논리의 원환에 걸려든 것이라 하겠다. 반면 카프카는 여자의 태곳적 세계이자 심연의 세계에서 다시 찾아야 할 삶의 당위성의 요소를 발견하고, 그의 무의식의 한 부분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로의 입구’



    ‘바람’은 ‘환상성’의 영역을 가리키는 궁극의 메타포로 제시된다. 바람은 비가시적 영역으로서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이는 바람이 무형적인 것의 강조이자 자유로운 부분을 가리키는 일종의 메타포가 된다. ‘해변’이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움의 무의식의 영역을 가리킨다면, 바람은 이 해변의 표면을 살랑대게 하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며 일시적인 순간으로만 자리한다.


    사에키는 카프카에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야만 함을 충고한다. 이는 각각 아들과 어머니를 찾은 재회의 순간을 뒤로 한 채 잠깐이나마 어머니와 아들 간의 금기가 깨진 무의식의 세계 자체가 현실화될 수 없음을 가리킨다. 


    환상성의 세계 그 자체에 매몰되어선 안 된다는 충고는 ‘저 세계’에서의 경계에 머물던 시기를 벗어나 ‘이 세계’로 다시 돌아옴을 감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운명에 대한 또 다른 지침이기도 하다. 곧 여행의 시간은 ‘바람’과도 같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채워 넣기’ 대신에 ‘비워 내기’의 영역이었던 셈이다. 


    ‘저 세계’의 영역에 갇힌 병사들은 기억의 자리에서 머무른 채 또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의미 없는 삶을 산다는 점에서, 다시 시간은 흘러가야 하고, 또 다른 차원으로의 꿈꾸기는 가능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은 이다지도 소중한 것이란 것을 새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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