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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트라우마 수리공> : '꿈이란 겹의 논리에 들어서서'
    REVIEW/Theater 2013. 5. 13. 23:43

    ‘겹으로 된 꿈과 현실 세계’


    ▲ 지난 5월 9일 오후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열린 <트라우마 수리공>(런닝타임=120분) 프레스 리허설 장면(이하 상동)


    맨 처음 무대에 들어서기 전 구슬 하나씩을 받게 되는데, 이는 통과의례적인 차원에서 지급되는 물질의 증여인 셈으로 그다지 자본의 가치가 섞여 있지는 않으며 극 자체에서도 필요한 부분이 아니다. 다만 극 자체의 요지경 같은 세상과 전도됨을 반복하는 꿈의 논리를 그 자체로 환유하는 사물이기도 하다.


    무대는 의도적으로 매우 답답한 구성을 갖고 있는데, 단순하면서 빠져 나갈 수 없는 유폐된 식의 모더니즘적 느낌을 안고 있으면서 일종의 스크린으로서 역할을 하는 막이 중간 뒤쪽에 위치하고 그 뒤에는 일종의 통로(구멍)를 안고 있다. 이 틈은 그 뒤를 보여주는 대신 비가시성의 은폐된 영역을 함구하고 있는 형식의 일환이다.


    처음 무대는 약간의 혼동 지점을 주는데, ‘빙하’ 같은 거대한 구조물 위에서 위치해 꿈 속 ‘주인공’(승우 역 정선철 배우)의 뒤쪽에서 말을 건넨다는 점에서, 그(우제 역 김동현 배우)는 일종의 자아의 일부를 구성하며 꿈속의 내재된 무엇으로 제시되는(생각된다는) 점에서 그가 이 무대를 가로질러 중심을 차지했을 때 곧 그가 주인공임을 알게 됐을 때 꽤나 낯선 감각이 생겨난다.


    주인공을 착각의 늪에서 전복적으로 튀어나오게 함은 <트라우마 수리공>이 지닌 꿈의 중첩된 기호와 전도의 측면과 어느 정도 연관성이 있다 보인다.


    <트라우마 수리공>의 꿈의 모티브는 정신 분석적인 무엇이다. 미로가 있고 어떤 연결고리가 있으며 풀어야 할 무엇이 있다. 정답은 모호하지만 어떤 낙인의 부분이 있어 풀어야 할 부분, 풀릴 수 있는 고리 내지 나아갈 수 있는 구멍, 곧 일정 정도의 해답이 있는 것이다. 


    ‘꿈의 산업’, ‘산업의 꿈’



    극에서 ‘트라우마 수리공’인 주인공은 손을 잡는 것만으로 꿈으로 연결되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는데, 꿈 속 평범한 이의 타자로 자리할 때 그는 그 자신의 어떤 이야기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투명한 매개체’ 자체가 된다. 이러한 직업에 대한 은유로서 제목과 같은 이름을 가지게 될 때는 자본주의의 광고 문구인 ‘꿈의 산업’이 본격적으로 그로 말미암아 펼쳐지게 될 때이다. 


    그야말로 ‘꿈의 산업’은 꿈을 가지고 하는 산업이라는 일차적인 의미와 ‘산업의 꿈’ 그 자체이기도 하다. 곧 끊임없이 증식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을 띤 채 재조직된 꿈을 상품화하여 모두가 그것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꿈의 산업’이 꿈꾸는 것이다.



    공장의 임노동자로서 자신을 생산 가치 자체로 내세우는, 순수한 노동의 행위로 삶을 영위하는 존재는 그 삶의 반대편에서 섹스로 영혼을 채운다. 섹스와 노동으로 분화되는 삶에 대한 묘사는 다소 자극적일 수 있는데, 여기서 그를 유혹하는 수많은 여성들의 판타지는 다시 꿈 그 자체의 환영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식 설명에 따르면 법 그 자체이기도 한 아버지는 죽음으로 처리되고,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실제로는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뒤따르는데, 이는 꿈의 방식으로 설명되는 이 극이 후자의 근원적 힘을 가진 채 전자의 사건을 트라우마로 처리함을 의미한다.


    공통의 트라우마를 다루고 집단 기억의 문제와 그것의 개별맞춤식 치료와 공통의 치료 성과 곧 그것을 잊게 됨을 꿈꾼다는 점에서 ‘힐링이라는 판타지’와 같이 꿈-산업의 현 시대의 위기 담론과 위험한 담론으로서의 성격을 반영한다.


    ‘외설적 신체들’



    집단으로 떼 지어 시종일관 꿈의 주변부를 잠식하는 여자들의 존재는 매우 특이한데 표피적으로 팝아트의 캐릭터들을 생각 없이 복제해 놓은 것만 같다. 같은 옷을 통해 모방의 행동이 전이되어 가는 듯하다. 일종의 유아기적 타입에 갇혀 있는, 자아의 떨어져 나가 독립되어 행동하는 이상한 존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극의 메타적인 층위에서는 코러스이지만, 현실의 은유로는 집단적 복제된 대상인데 그러한 통일됨의 그로테스크함은 한편으로 친숙하지만 실은 그 반대인 미소에서 나온다.


    일종의 서비스 차원에서 표피만 있는, 그 심층은 부재하는 내지는 알 수 없는 그 미소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전도의 전략과도 유사성이 있는 듯한데, 이는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치환이 가능한 꿈의 논리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편 이 여성들은 이 풍경 속에 향락에 빠져 있는 현대인을 표상한다. 이 중첩된 기표의 존재들은 하나의 기호가 아닌 여러 기호의 결합을 쉬이 하는 꿈의 역량에 기댄 것이라기보다는 이미지들의 뒤섞임의 미디어의 홍수를 예시하는 것이라 보인다. 



    <트라우마 수리공>에서 의미들은 양가적이고 중첩적인 경우가 많은데, 가령 가슴이 없다는 어머니(배우 이정미) 역에 해당되는 의뢰인을 꿈속에서 만나 그 트라우마를 해결코자 하는 트라우마 수리공의 경우에 있어 이 가슴은 마음이자 신체적인 것 그 자체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가령 유방암 수술을 해서 그것이 없다든가 라는 물리적인 측면 외에도 성적인 매력의 부재 현상을 가리키는 식으로 모호하게 의미들이 새겨진다. 이는 꿈이라는 모호한 시공간 타입의 논리를 따른 결과로 보이지만, 꽤 복잡하고 모호하게 일부러 극을 구성하려는 의도적인 전략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고 보인다.


    이러한 성적 매력의 부재에 따른 트라우마와 갈망은 섹스의 단계로 나아가, 마치 오이디푸스 신화의 비극적 운명의 반복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그러나 이미 이 꿈 속에서는 이 의뢰인이 어머니라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상태에서 이것을 거부할 수 없음은 꿈 자체의 무의지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다르게 전유된다. 꿈은 ‘피할 수 없는 장면’으로 현재 다른 이의 꿈의 일부 안에서 현재 ‘삽입’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꿈꾸기’



    트라우마 수리공은 원래부터 그 이름을 가지는 대신 자신의 타자로의 꿈으로 들어가는 능력을 기계 장치로 구현해 낼 수 있게 된 시점 이후 그 기계가 산업화되는 순간에, 자본의 흐름에 휩쓸리는 순간 그는 ‘트라우마 수리공’이란 직업에 귀속되게 된다.


    트라우마 처리 기계에 따라 돈으로 꿈을 살 수 있는 자들은 멋진 꿈의 확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꿈은 미디어라는 산업 자본가의 조종에 따라 모든 꿈이 상품화되는 가운데, 이는 한편으로 미디어의 중계를 통한 것임을 이야기한다. 


    또 다른 꿈속에서의 시를 통해 ‘해일’을 알리는 동물이 사라졌다고 할 때 해일은 일종의 트라우마의 일종이다. 곧 이 트라우마가 사라져 감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트라우마 자체가 기능하지 않게 된다면 더 이상 ‘진정한 치유’도 없어지며 또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사실 우제는 다른 이들의 꿈에 들어가 꿈을 꾸지만, 그 모든 꿈은 실은 자기의 꿈과 결합되어 있다. 그가 더 이상 꿈꾸기를 거부하며, 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 꿈이 자신의 꿈을 유예시키는 한편, 꿈에서까지 자본의 힘이 밀려왔음을 의미한다. 


    자본가는 단지 ‘하나의 꿈’을 만든다. 곧 차이 없음의 꿈. 이어 자본가는 꿈의 복제됨 이후의 지배를 통한 세계를 제물로 삼고자 한다. 자본가의 행위는 모든 것을 제물로 삼아 평평한 세계를 만드는 가운데 ‘일자로의 통합’을 꾀함이라 하겠다.



    우제는 마지막에 40층 높이에서 스스로 삶을 포기했다. 이는 자본가의 내레이션으로 재현되는데, 여기에는 어떤 ‘인간적’ 감정의 결부가 있다. 그것을 만든 ‘악’에서 일종의 그것(악)과 거리 둔 듯, 그러나 그와 친숙한 사이의 자리에서 전달하는 이 ‘아버지’와 같이 자리하는 존재는 은폐된 형식으로서 모순적 함의를 띤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일순간 자신의 죽음을 뒤늦게 다시 자각하는 우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죽음 자체가 트라우마를 의미하는가. 그것이 당최 가능한가. 어쨌거나 죽음 자체가 트라우마로 남을 때 죽음은 기억의 일부로서 다시 출현한다. 이는 떨어지고 죽기 직전의 짧은 기억이었을까. 거기서 자신이 꿈을 다시 찾게 해준 처음 만난 아이를 다시 만나 그의 희망을 들으며 이 비극은 일견 희망의 전주곡쯤으로 마무리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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