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 ‘어떻게 연극은 살아 있음을 경유할 수 있는가’
    REVIEW/Theater 2013. 5. 9. 12:00

    무대로 들어가는 관문을 너머



    ▲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 ⓒ Foto Istvan Biro [사진 제공=국립극장]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의 무대로 입성하기 위해서는, 본격적인 막이 오르기 위해서는 백스테이지를 경유한 일종의 통과의례가 필요하다. 사실 이러한 설명은 충분치 않은데 비닐로 된 파란색 덧신을 극장 바깥 로비에서 받고 신은 이후, 백스테이지로 들어가는 즉시 연극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막이라 함은 잉그마르 베리만의 영화를 찍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 영화를 찍기 전에 배우들이 무슨 역을 맡고 이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할 감독 역할을 하겠다는 것을 관객들이 가까이서 인식하게 되는 것이 통과의례의 전부이다.


    결과적으로는 각자의 배우들이 잉그마르 베리만 감독의 영화 촬영 과정을 재현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인데, 이 전에 정확히는 영화 촬영 과정을 재현한다고 하는 배우로서의 역을 연기하는 것이 선행되는 것이지만, 이는 일종의 말에 따라 역할로 분하는 마법적 순간을 만듦으로써 수행적인 과정을 가져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후 본격적인 무대에서의 영화 촬영 과정은 이 ‘연기를 한다’는 의식과 단지 이 현재 펼쳐지는 곳에서의 역만이 처음부터 존재했다는 환영적 규약 사이에서의 시차가 이 연극에 대한 일종의 참여를 끌어올리는 측면이 있다.


    ‘찍고 있음을 바라봄의 경험’


    ▲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 ⓒ Foto Istvan Biro [사진 제공=국립극장]


    한편으로 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의 완성되어 가는 과정의 영화에서는 편집의 여지가 있는, 곧 비가시성의 영역으로 사라질 수 있는 부분들까지도 일종의 연극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며, 카메라가 비추는 순간이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 측면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그러나 인터액티브적인 무언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언가를 찍는다는 것은 카메라라는 매개체를 통한 것이지만(실제 카메라가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한층 더 강렬한 현장성의 경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통과의례부터 시작해 찍고 있음을 성립시키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연극에 도입함은 실제 영화와 연극의 친연성의 부분, 그리고 그 둘의 이종 교배된 다른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관객의 참여를 높게 끌어올린다.


    ‘아그네스’는 죽어가고 있다. 이 죽어가고 있음은 살아있음의 실존적 영역을 극명하게 제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동시에 이 죽어감의 상태에서 죽음과 삶 사이에 그 둘이 혼합된 모호한 영역을 제시하는 게 가능하다. 이른바 베리만의 초현실주의적인 영화적 세계.


    실제 카메라가 투여되는 것은 아니며 감독이 손을 카메라 모양으로 만들어 배우를 비춤으로써 이 연기가 사각 프레임에 잡힌다는 식의 매개 과정이 투여됨을 의미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실제 무언가를 위해 단지 카메라에 찍히고 있음을 위해 전제되는 연기의 영역이라는 목적성과 그럼에도 이 감독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남는 어떤 잉여적인 부분, 곧 카메라와는 다른 방향과 각도를 포함한 관객의 시선, 그리고 카메라가 전제되어 있되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영역 등이 상정되며 영화라는 매체를 통과하는 것의 측면과 영화가 완성되는 과정에서의 카메라가 완전히 걸러내지 못하는 그리고 또 다른 시선을 이중으로 확인하며 관객은 영화와 연극 바깥의 무언가 다른 것이 생성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 ⓒ Foto Istvan Biro [사진 제공=국립극장]


    카메라 감독은 촬영 중에 배우에게 지시하고 있고, 배우는 그 지시 중에 그것을 철저한 외부로 두며 연기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다시 무언가 발생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또 다른 시선을 확인하며, 그 발생되고 있음을 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의 몰입감을 강화시키는 측면을 낳는다. 이는 어떤 시선의 매개가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봄과 거리 둠이 아닌 상상 속으로 들어간 상황의 창출 사이에서 시선이 그 속에 육화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순수한 발생’의 기표가 아닐까. 만들어지고 있음과 만들어 나감의 사이에서 과거가 현재로 바뀌는 그 지점에 카메라가 그리고 또 연극의 진정한 생명력이 생겨남을 의미한다.


    또한 카메라가 돌기 전에 배우는 감독의 지시를 받고, 그 지시 이후 카메라가 다시 켜지고 상황에 몰입하게 될, 자신에게 닥칠 그 상황에 대한 정동을 품게 된다. 이는 어떤 잠재성의 영역에 가깝다. 카메라는 동그란 조명으로 표시가 되기도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무대 막에 동그란 그림자를 남기고 거기에 인물의 실루엣을 창출한다. 


    영화적 공간으로의 초대


    ▲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 ⓒ Foto Istvan Biro [사진 제공=국립극장]


    간간이 내레이션이 깔리고 이는 이들이 일종의 재현을 성립시키고 있음의 메타적인 측면 너머의 또 다른 시선과 의식을 상정해 내는 측면이 있다. 이는 등장인물의 내면의 목소리가 될 때도 있지만 극의 시간을 앞서가거나 요약하는 식의 시차 속에서 이 작품을 아우르는 지표로 드러나기도 한다.


    내레이션은 이 연극이면서 영화의 과정인 무대 전체를 덮으면서 연극이 벌어지고 있음을 또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음의 실재적 환영성을 온전한 환영성으로 바꾸며 이곳 자체를 하나의 영화관으로 동시에 영화의 공간으로 바꾼다. 


    한편 이 내레이션은 일종의 사운드 영역으로, 제목에서의 속삭임(whispers)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반면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광기를 일으키듯 울부짖는 안나와 폭풍 같은 소리가 외재적으로 이곳을 덮을 때 그것은 일종의 목소리로서의 존재화되며 제목의 또 다른 일부 울부짖음 내지 소리침(cries)을 낳는다. 죽음의 공포에 이르는 이 목소리는 명확한 것이 아닌데 그럼으로써 미지의 세계, 초현실적인 의미들을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모호한 존재 가능성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이야기한다.


    파국은 그 직전에 고요를 동반하고, 이 대척적인 두 소리의 영역이 주는 삶의 극한은 죽음으로의 그리고 죽음과 삶 사이의 어떤 묘한 잠재적 영토를 품게 되는데, 오히려 죽음을 수용하듯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아그네스는 인간이 갖는 어떤 신성함을 선사한다. 곧 삶보다 더 큰 죽음이라는 대타자로의 또 다른 삶(?)을 수용하는 것에서 이는 온다. 


    하지만 끊어질 듯 넘쳐흐르던 죽음을 품고 있던 아그네스는 어느새 죽음을 맞게 된다. 이제 시체는 죽음의 문턱에 있던 그리고 죽음에서 애도의 절차, 그리움 따위를 포함해서 삶의 경계를 확인하는 이전의 과정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오히려 생성의 기제가 된다. 


    이 시체는 단지 물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삶도 죽음도 아닌 차원에서 더 이상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차원은 아니다. 그 시체는 일종의 잉여로 있다. 그리고 그녀를 완전히 지배하기 시작한다. 오히려 어떤 유령의 영역에 닿아 있을 것이다.


    무의식의 시차적 극복과 고백으로서 오마주


    ▲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 ⓒ Foto Istvan Biro [사진 제공=국립극장]


    죽음 이후에 진정한 위로가 있다는 점에서 애도는 슬픔만이 아닌 더 큰 차원의 선분으로 이어지는 게 가능하다. 커튼콜은 앞서 죽음 이후 따라 붙는 회상 신의 방식을 다시 호출해 온다. 아그네스는 행복했던 순간을 상기하는 것으로, 아그네스의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품은 죽음으로부터의 극복 지점과 만나게 된다. 


    한편으로 베르히만의 이 작품의 원작 영화, 그리고 베르히만을 따르던 안드레이 서반에 대한 시선을 중첩시키며. 이 두 부분은 모두 아그네스의 그리고 안드레이의 일기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는 영화라는 매체의 무대 전유를 통해 역으로 연극의 환영성을 극대화하고 연극이 벌어지고 있음의 수행성을 부각시키며 관객의 참여 강도를 더 높게 추어 올렸다 하겠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