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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산국제거리극축제] 은하계의 까퓨쎅타를 찾아서La Caputxeta galàctica: '노동과 연기의 시차'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5. 16. 03:43

    '엔지니어가 퍼포머로 거듭나는 순간'


    ▲ 지난 5월 4일 안산국제거리극축제에서 열린 은하계의 까퓨쎅타를 찾아서La Caputxeta galàctica (이하 상동)


    인섹토트로픽스 Insectotròpics의 <은하계의 까퓨쎅타를 찾아서(La Caputxeta galàctica)>에서 ‘모든 것의 발생’은 기계 장치를 다루는 엔지니어의 집중과 손놀림에서 비롯된다. ‘모든 것의 표현’은 세 개의 실시간 중계 스크린에서 비롯된다. 이 기계에서 스크린으로의 번역은 보이지 않는 시스템의 감각적 사용과 그에 따른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에 의한 것이다. 


    기계에 밀착한 사람들과 스크린을 주시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 앞에 홀로 퍼포머가 된 사람의 사이에는 환영에 대한 일방적인 수용을 메타적으로 균열 짓는 지점이 발생한다.


    실질적인 퍼포머로 분하는 이는 실상 이 화면 그리고 기계 장치와 결부되지 않는 행위를 함에 있어서는 단지 잉여에 불과한데, 그녀는 이 세 개의 스크린의 각기 다른 시차적 사용에 따른 일부의 매개체가 되며 가혹하게 말하자면 실험 대상이 된다(나중에는 엔지니어 그룹에 껴 있던 화가들의 무대로의 난입에 의해 드로잉의 공간이 된다).



    기계에 밀착한 엔지니어들은 이 함께 보는 이미지들을 단순히 기계장치를 다룸으로 통해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만든다는 행위 자체를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작품의 환영적 질서의 공고함을 내세우지 않고 그들 스스로의 특권적 지위 자체만을 고수하지 않는데, 중요한 건 이들의 움직임이 정작 실질적인 퍼포머의 형국으로 거듭나는 지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곧 이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내는 이미지 발생 또한 사운드 발생, 그리고 축제 현장의 빚어짐 사이에서 관객과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며 한편으로 이 축제와 기술적 능력의 사이에서 달아오르며 환호를 내뿜는 순간을 겪는 순간이 발생한다(이는 계속 변화되는데, 이러한 무대를 향한 정동이 다시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봉합된다). 


    이는 일반적인 디제잉의 엔지니어와 퍼포머 사이에서 ‘순간’을 만들어 내는 특별한 지위를 점하며 관객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디제이 내지 브이제이와는 또 다른 양상인데, 이들은 단지 관객에 앞서 무언가를 만든다는 입장의 자율성을 가지는 동시에 그들과 관객 사이에 있는 무대의 반응을 목도하는 가운데 현장성은 또 다른 작업의 일부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전에 작업 자체가 갖는 수행적이고 우발적인 실험에 기댄 성질을 띤 이미지들을 만들어나가는 감각적‧인식적 조종의 열락이 실제적인 표현, 곧 환호성과 같은 것으로 튀어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 너머의 열광은 점차 원시적 종족의 의식 절차를 밟는 듯한 무대 위의 퍼포머의 열광과도 겹쳐진다는 것인데 이런 실제적인, 내용 이외의 실질적 표현과 구상해 놓은 내용 안에서의 형식을 중첩시키며 결과적으로 축제적 장에 동화되어 가는 과정은 엔지니어들이 이성은 여전히 기계를 다루는 상태를 유지한 채 영혼의 형식만이 이 극 속의 환영 속으로 실제적으로 난입하는 듯한 특이한 감각의 변이 장으로 나아가는 측면이 있었다.


    어쨌거나 이 모두가 엔지니어의 자리를 버리고 퍼포머와 어우러질 때는 이들이 원시적 장이라는 근원적인 요소를 그 작품 내용 자체로서 소구하며, 또한 축제적 장의 요소와 맞물려 전개시키는 것으로써 실제적인 연기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세 개의 스크린의 시차



    요는 세 개의 스크린의 작동 과정일 것이다. 일단 제일 왼쪽 스크린은 드로잉 과정을 비춘다. 제일 오른쪽 스크린 앞 퍼포머는 그 앞의 카메라에 대한 정면성을 유지하며 이로써 중간에 있는 스크린이 앞선 오른쪽 스크린을 배경으로 퍼포머를 합성하여 또 다른 화면으로 만드는 식으로 연결된다. 


    첫 번째 스크린이 결코 완성이 아닌 완성되어 가는 작업에 대한 메타적 언술이자 중계라면 두 번째 스크린은 그 앞의 퍼포머의 배경으로서 세 번째 스크린에 도달하기 전의 완성되지 않은 과정적 성격을 지니며, 이로써 세 번째 스크린의 온전한 합성의 완성은 환영으로서의 흔적을 은폐하며 남겨 놓게 된다. 


    그리고 이 봉합으로서 완성은 퍼포머를 하나의 스크린과 섞여 사라지는 연금술적 재료의 일부로 만들게 된다. 또한 첫 번째 스크린의 드로잉은 이 중앙의 화면에 합산되어 나오게 된다.


    드로잉과 움직임‧연기라는 아날로그를 영상으로 번역하는 작업은 봉합으로써 합산되는 하나의 스크린으로 보이게 되지만, 세 개의 스크린은 사실상 하나의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을 공통되게 품고 있고 하나가 또 다른 하나의 반영적 성질을 가지며 엄밀히 직접적 영향을 주는 역학 관계를 가지지만, 실상 그 세 개의 스크린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실시간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에서 도상적 유사성을 가진 관계이기는 하지만 선후의 순서적인 관계는 아니다.


    곧 이 순서와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완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 작업을 보는 것을 가리키므로 일종의 오류를 발생시킨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일시적인 행위만이 존재하며 완성으로부터의 결락이 아닌 변화 그 자체의 자유로운 위용이 있을 뿐인 것이다.



    드로잉이 캔버스를 완성하고 이것이 작품으로 남는 대신 캔버스를 지우거나 교체해서(그리고 이 교체는 단지 스크린에 비춰지는 곧 캔버스 자체가 스크린에 진배없는 가운데 단지 이 캔버스만이 의미가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변화된 작품 자체를 제시해야 하는 게 이 작업이 가진 숙명인 것이다.


    스크린을 배경화하는 퍼포머는 계속 뛰어가거나 하며 변화된 배경 이미지 타입에 변용을 이뤄나가야만 한다. 이 드로잉의 표피와 배경이라는 심층의 또 다른 표피의 결합이 맺혀 만들어진 이미지 역시 그 변용의 결과들에 따른 변화를 맛보게 된다. 


    이는 분절적으로만 이어질 뿐이며 저항할 수 없는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기계 장치의 소프트웨어 메커니즘을 통해 간단하게 이뤄짐은 이 이미지의 피동성과 의지 없음의 실은 기계 자체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인식에 있어 예측 불가한 변화의 지점에 맞물린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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