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레오(LEO) : '90도 뒤틀린 공간이 주는 환영적 세계'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5. 14. 08:59

    '90도의 환영성'


     레오(LEO) ⓒ Heiko Kalmbach  [사진 제공=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어둠 속 화이트 스크린, 그 옆의 무대는 인터액티브의 조응 관계로, 쌍생아 같은 관계를 형성했는데, 이는 실은 ‘복제된 미미한 시차’ 에 불과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에 앞서 이 사람의 옆으로 돌아서 있다는 것, 곧 정면성 대신 외부 층위들로의 접속을 꾀함으로써 관객 대신 무대 바깥 층위를 택하는 듯한 제스처를 선택함으로써 가능했다.


    사실 이 뒤집힘의 구조물을 따른 무대 안에서 오밀조밀한 움직임을 만드는, 대부분의 극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가 발을 바닥에서 결코 떼지 않았다는 점인데, 이는 중력의 법칙을 어긋날 수 없음을 의미하면서, 곧 화면에서는 그러하다는 것을 상정하면서 그 기대지평이 어긋남으로써 웃음과 신기함을 준다는 것일 것이다. 


    이는 일종의 뒤집힌 화면, 중력을 되돌린 듯 현실처럼 보이는, 단지 화면을 시계방향으로 90도 회전했다는 것 외에 없는 영상의 진실과 도무지 거짓일 수 없는 오른쪽(무대 상수)의 연기의 절합으로 인해 생겨나는 놀라움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중력을 거스른 듯 보이는 특수효과를 쓴 듯한 영상의 효과는 실제 거의 누운 상태에서 움직이는 연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영상과 실제의 인터액티브적 속임수(=진실)'



     레오(LEO) ⓒ Heiko Kalmbach  [사진 제공=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영상과 함께 실제가 있기 때문에 허구가 되는 (그럼에도 사실 진실을 보증하는 증거물이 되는) 이 영상은 그럼에도 실제로는 그것을 몸을 통해 온전히 힘들게 수행하는 남자의 연기의 부정할 수 없음이 이른바 이 극을 보는 하나의 규약이기도 한 까닭에 사실은 진실과 허구를 반반씩 나눈 이 영상과 실제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이 극은 뒤집혔음(의 중계됨)을 알면서도 그 허구적 영상에 재미를 갖고, 실제의 행위들이 실제로는 매우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중력의 힘(뒤집히는 힘)이 적용됨을 수용하는 이중의 허구적 진실을 수용하게끔 했다. 


    그리고 이는 물론 이중의 연기를 수행해야만 했다. 하나는 뒤집힌 부분을 연기해서 실은 힘들지만 힘든 척하지 않기, 그리고 의도적으로 뒤집힌 것이지만 뒤집힌 것에 놀라움을 표하는 것, 전자는 마임과 같은 고도의 통제가 필요한 것이고, 후자는 이 극의 ‘보이지 않는 규약’과도 연관되는 것이었다.


    관객은 이 다 보이는 속임수에 어떻게 속을 수 있을까. 이는 영상은 그대로를 비춘다는 것이고, 이 몸으로 쓰는 영상의 환상 효과의 진실을 부정할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이 규약에 대한 인지가 곧 무대라는 것의 진실을 입증 그리고 보증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관객’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할 수 없다. 곧 관객으로서의 의미 자체를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대 내 진실은 제한적이며 동시에 전체적이다. 이는 무대만의 특수한 진실이다.


    적어도 빨간 벽을 바닥으로, 곧 중력을 90퍼센트 기울어져 나오는 것을 상정하려면, 적어도 발이 빨간 벽과 닿아 90퍼센트로 기울어진 신체 반향을 지향해야 하는 것의 대원칙이 있었다. 그는 그리고 그것에 충실했다. 이러한 몸의 인위적인 통제와 수행 작용은 마임의 환상성과 고도의 움직임과 많이 닮아 있었다. 


    '삶의 공간에 대한 욕망'


     레오(LEO) ⓒ Heiko Kalmbach  [사진 제공=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이어 인터액티브 영상 속에서의 문명‧문화 생활을 창조하려고 하는 욕망 자체를 하나의 메시지로 던졌다. 의자에서 테이블, 와인,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한 하나의 자리를 더하기 등 분필로 벽에 그린 상상력은 인터액티브적으로 영상 속에서만 현실로 빚어진다. 곧 분필로 그린, 고양이 자체가 살아나고 실제 어항 속에서 물이 쉼 없이 떨어져 이 공간이 물로 가득 넘쳐나게 된다.


    이는 영상이 단지 반영만 하는 ‘뒤틀린 진실’의 측면을 벗어나,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에 후행하는, 보이지 않는 시차로서 따라 붙는 영상이 먼저 또 다른 움직임으로 실제와 다른 무언가로 생성됨을 의미한다. 실제로 인터액티브적으로 이 영상에 보이지 않는 카메라 외에 보이지 않는 손의 제스처가 따라 붙었던 것이다.


    물이 가득 차자 회오리처럼 무대를 휘저었고 방향과 관계없이 모든 사물이 휩쓸러 가는 기류에 맞서 남자는 방향을 잃고 헤매며 모든 물질들이 사라져 갔다.


    그는 현명하게 분필로 된 자국들을 지웠고 그 물건들은 모두 영상 속에서 한 덩어리로 뭉쳐 사라져 갔다. 실은 이 상호 간 반영을 통한 진실을 ‘마술적 진실’을 버티던 하나의 규약이 약간의 균열을 빚는 순간이기도 했다.


    '또 다른 환영: 과거의 흔적들'


     레오(LEO) ⓒ Andy Phillipson [사진 제공=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

    긍정의 꿈꾸기는 어느 순간 전도됐다. 곧 영상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가동됐던 것이다. 명확한 시차를 벌리며 따라붙는 움직임의 흐릿한 영상은 마치 그에게는 고약한 영혼의 물질처럼 따라붙는 힘으로 형상화됐다.


    일종의 움직임 자체가 업을 남기는 셈이었는데, 이러한 그림자들의 시간의 시차들이 중첩되며 빠른 속도감의 궤적을 만들 때 공간적인 포화 상태는 내면적인 옥죔의 포화 상태로 이어져 그를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하나의 연기 상태에서.


    그래서 어떤 외부성을 찾는 것으로 이어졌고, 그는 벽에 매달린 채 곧 반쯤 경계에서 걸터앉은 채 실제로는 철봉에 매달린 형국으로 자리했다. 그리고 애초에 빛을 생성했고 물(생명)을 주었던 가방 속으로 어둠의 긴 터널을 통과해 사라졌다.


    그것을 뻥 뚫린 구멍으로 만듦은, 그리고 일종의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가 된 것은 영상에서가 아닌 공간에서 유일한 일종의 실제적 트릭이었다. 물론 그 벽은 가방으로 보이지 않게 마감한 상태에서 미리 뚫어진 구멍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진실이지만, 곧 갇힌 철저한 내부성의 진실은 또 다른 실재로서의 외부성으로 이어져 끝을 맺는 게 꽤 적합한 형식임에 틀림없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