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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현대무용단, 안무가 루이자 코르테시/미켈레 디 스테파노 공연 리뷰
    REVIEW/Dance 2014. 10. 21. 17:35

    <마우싱>: ‘마법의 회전’으로서 안무의 마개 

    ▲ <마우싱> 연습 장면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루이자 코르테시가 안무하고, 차진엽이 무용수로 출연한 <마우싱>은 각기 다른 뚜렷한 시공간을 상정하고 있는 가운데, 춤의 정면성을 내세워 일종의 윈도우로서의 프레임과 그와 맞닿은 표면에서의 신체적 감각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마우싱은 일종의 마우스를 가지고 윈도우를 작동시키는 행위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상 세계, 그리고 그것과 상호 협응하는 인간 신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만든 조어에 가깝다. 그리고 사운드와 조명이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관돼 시공간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그 장치(화)를 전면에 드러낸 것에 가깝다. 이로써 차진엽은 가상공간의 입자가 되는 셈이다.

    차진엽은 우선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 로봇처럼 팔다리를 천천히 교차하며 움직이는데, 이러한 움직임은 동선은 최소화되고 그 몸짓 하나하나가 정제됐다는 차원에서 미니멀리즘의 양태를 띤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 그녀가 돌며 좌우 반전의 움직임을 가져간다는 것인데, 이는 움직임이 제어되고 있음을 가리키고, 또한 ‘현재적 과거’가 반복 속에서 되살아남을 의미한다. 이 돎의 행위로 인해 그녀는 다시 위치하고 움직임은 재정비된다. 하지만 순식간에 일어남으로 인해 이는 연결된 동작으로 보인다. 사실 이 돎과 이후 좌우 반전된 상태에서 반복된 움직임은 사실상 객석 반대편에 주어지는 이미지로 볼 수 있고, 관객은 그녀를 시간적으로 또 물리(방향)적으로 반쯤만 볼 수 있는 한편, 좌우 반전된 이미지에 따라 자신의 반대편에서 그녀를 봐야 하는 듯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를 거울상에 비유할 수도 있을 듯한데, 그녀가 반절만 보여주는 그 이미지/움직임에 따라 거울에 반전된 그녀의 움직임 이미지를 관객이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돎과 함께 계속해서 움직임을 조금씩 변용시키는 안무 형태는 착시와 환영을 가져가는 일면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있음과 없음의 상태, 그 사이의 간격을 돎으로 치환하고, 끊임없이 있음의 상태를 만드는 가운데, 그 없음의 균열적 순간을 새롭게 바뀐 움직임의 달라짐으로 인한 착시의 순간으로 인계한다. 그래서 춤은 거의 매순간 발생하며 또 차이를 낳는다. 실제 약간의 차이들로 춤을 지속한다. 그래서 이 돎은 착시를 일으키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차원에서 어떤 마법적 안무의 조작이 된다.

    중간에 현실 공간으로 넘어가며 일상에서 비롯된 온갖 재현의 동작들을 표현한다. 앞선 움직임이 아바타가 되어 지정된 안무를 정확하게 구현하는 것이었다면, 이는 수많은 타자/대상과의 맞부딪침을 상정하므로 제약이 따르고 또한 일정한 주기를 따르게 된다. 일상 조건을 가져오는 것이므로 이는 다분히 따분할 수밖에 없다(어떻게 보면 마임과 춤의 어중간한 경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사실상 재현의 재현(표현)인 셈인데, 윈도우라는 가상공간 아래 메타 레이어가 성립하고, 그 바깥에 관객은 있는 셈이므로, 메타-재현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재현과의 어떤 차이를 갖는 재현인데, 그럼에도 재현의 표피를 띠기에 갖는 지루함은 부정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오히려 이 작품이 시공간의 변위, 변이를 드러냄으로써 움직임 그 자체에 대한 심미적 감상만을 최우선으로 걸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차진엽이 계속 돌며 하나에서 다섯까지 카운트를 세며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신이 있는데, 몇 차례 반복되며 세세하게 달라지는 그녀의 움직임이 포착되는 데 집중하게 됐다. 가령 이 행위 자체의 차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의 반복은 그 돎으로 인해 약간의 흐트러짐, 혀로 입술을 축이는 등의 미세한 몸짓들을 지각하게 하는 데로 나아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앉고 포즈들을 전면에 드러내는 안무가 있는데, 이 역시 그 전면의 포즈의 반복, 그러니까 그것을 무산(해체)시키고 다시 정면을 마주하는 식으로, ‘안무는 다시 시작된다.’는 안무의 원칙을 이어간다. 일종의 분절을 통한 춤의 생성, 곧 몸-시선의 재위치와 움직임의 차이에 따른 지각과 이미지 발생은 사실상 그것이 ‘안무’임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파악(인지)할 수 있되 ‘다시 인지’되는, 곧 망각과 동시에 시선에 기입되는 묘한 착시와 재인지의 동력을 가지고 가는 무한 동력의 춤, 곧 안무 기계의 발명이기도 했다. 그래서 거의 황홀경(이는 곧 앞서 있음과 없음의 설명과도 맞닿는다)의 쾌락을 안겼다. 처음에 차진엽은 그 마스크의 강한 인상으로 인해, 정면성을 강조하는 안무의 차원에서 사실 약간의 우려가 발생했으나, 전체적으로 그 안무 기계의 무한 동력에서 단단하게 중심을 잘 잡았던 것 같다. 그 무한한 턴과 함께.

    <라인 레인저스>: 생성의 배치 기계

    ▲ <라인 레인저스> 연습 장면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미켈레 디 스테파노가 안무한 이 작품은 꽤나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이며 그로 인해 어떤 이질감을 안긴다. 변별되는 이미지-신체들의 원으로 모여 만든 하나의 구성단위, 그리고 하나의 미끄러짐, 그 하나의 (어긋난) 시작된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이 비동시적으로 중첩되어 교직된다. 그러니까 하나의 흐름이 아니며 하나의 움직임도, 또 온전한 식별 가능성도 가져가지 않는다. 그 중 하나는 그 시작을 추동한 것과 같이 떨어져 나가거나 홀로 머물러 있으며 공동 공간 안에서 시선을 갖고 그러나 사유를 갖지 못하고 그저 위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배치 자체(의 자의성)를 식별하게 하는 하나의 원소이자 단락이다.

    각 신체는 자신의 애초 프로그램화된 또는 구성된 몸짓들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다른 존재/대상과 만나는 지점에서 애초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움직임을 생성하기도 한다. 이는 그 에너지와 벡터, 움직임과 맞물리며 도출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의 덩어리로 예측되지 않고 불규칙성을 띠는 것으로, 외부로의 방사 에너지/엔트로피를 내부의 그것으로 돌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실험하는 것 같아 보인다. 호흡 단위도 저마다 다르며, 하나의 인격들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감정 역시도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일종의 춤추는 오브제들의 집단 역학적 배치에 따른 돌발적이고 시선으로부터 이탈되는 신체의 불규칙한 향연과도 같다. 시간은 따라서 배치라는 기계에 따른 현재형이며 과거나 역사 따위(그리고 인격)는 없으며, 단지 현재의 생성만 있을 뿐이다. 이는 감각적으로 포착되며 시선을 따라 그저 흘러간다. 그래서 정신없이 펼쳐지는 그 움직임의 중첩과 과잉에 따른 피로도는 크게 발생하지 않는 듯하다. 하나의 시선으로 정위될 수 없으므로 관객은 그것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또 하나의 유기체적 덩어리로, 관계 맺음의 감정과 이야기로 바라볼 수 없게 되며 배치 자체의 다양한 조합과 형태들을 스쳐 보내는 것에 가깝다. 동시에 자기 동력적인 움직임이자 처음의 분리, 그 시작 지점을 가져가는 신체들의 우발적인 생성을 허락하는 이 엔트로피 공간의 어떤 발생학적 지점들을 포착하는 것에 가깝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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