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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rget 츄 (I will archive you)>, '자기 지시적 무용-텍스트의 저항과 망각'
    REVIEW/Dance 2014. 8. 23. 15:03

    ▲ <Forget 츄 (I will archive you)> 콘셉트 사진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출연하는 세 명의 안무가(윤상은, 여민하, 최승윤)들은 각자의 작품들을 아카이빙하며 동시에 재현한다. 또는 그 두 개가 동시에 일어난다. 여기에 그 아카이브에 대한 발화가 더해짐으로써 정확히는 아카이브에 대한 시선과 이해의 지점을 만든다. 곧 예전의 작품들을 다시 보기re·view하며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서브 텍스트로서 동시적으로 포갠다. 작품은 이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갖게 되며 해석이 가능한 유동적 텍스트로서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는 보통의 유기체적 무대의 구성과 그 흐름, 극적 시간으로도 불릴 수 있는 무대의 끊임없는 시간을 해체시키고 작품을 텍스트로 현재를 대화의 장으로 바꿔 아카이브를 아카이브화한다. 곧 예전의 작품들이 차곡차곡 하나의 텍스트의 생성 흐름 안에 부분 집합으로 축적된다. 그리고 이 셋은 각자 따로 또 같이 동등하게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발언을 하며 약간의 중첩된 면에서 그 현재의 수행 지점에 재현적 대상으로 섞이거나 자신의 차례를 예비한다. 


    전체적으로 아카이브와 그에 대한 발화라는 지점에서의 하나의 전제 조건을 상정한 가운데 세 명은 서로의 무대에 대한 개입을 최소화하며 공동의 안무에 합의한 채 각자 또 공동의 크레디트를 가져가며 아카이브를 완성해 간다. 패치워크된 각자의 조각들의 상호 얽힘은 각자의 시계열적 아카이브와 그것의 동등한 분배의 원칙과 순서로써 쌓여 나간다. 


    이들은 과거를 과거로 둠으로써 다시 말해 우선 현재를 현재로 휘발시킴으로써 그것을 과거로 바꾸고 나아가 과거를 과거로서 현재화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현재적 아카이브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작품은 (각자의 또 공동의 기억으로) 아카이브되며 미래로 유예되고 동시에 망각됨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는) 너를 잊겠다는 일종의 왠지 ‘피카츄’와 유사한 어감을 갖는 제목 ‘Forget 츄’(굳이 ‘츄’를 한글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는 이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는 세대적 감각을 환기시키며 동시에 그런 차원에서 우리 문화로 전유되는 일종의 코드 전환의 낌새를 추측해 보게 한다.)가 마치 이 젊은 안무가들의 발랄함과 귀여움과 유사 코드 계열을 형성하는 데서 나아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왜 ‘너’를 잊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나의 과거이자 타자적인 나의 부분, 그리고 망각의 기억이 ‘너’라는 이름 안에 포개어질 수 있는 것인가.


    최승윤은 무대를 열 대 두 차례 관객과 대화를 시도했다. 일종의 인터뷰 형식이었던 시간은 전형적인 무대를 관객석으로 열어젖히는 소통의 클리셰가 아닌, 자비에 르 로이의 작품에서 물질로 아카이브 되지 않는 동시에 일종의 반-무대로서 관객의 개입을 전제한 춤과 대화의 시간에 필연적으로 오는 비-춤을 안무하지 않는 방식으로 안무한 ‘Production’의 일부를 재현한 것이다. 재현될 수 없는, 같은 결과물을 가질 수 없는 이 작품은 마이크를 통해 개별성을 공동 체험하는 것으로 변용된다. 사실상 안무의 본래 아이디어가 느슨하게 풀려나와 전혀 다르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무대에 적용된 것이다. 이 비물질적 전시가 관객의 무용에 관한 인식 수준을 가늠하는 일종의 설문지 타입의 코드 아래 개인과 개인의 만남과 그것의 공동체적 들여다봄이 추는 이와 보는 이의 분할적 경계와 함께 작동하며 관객의 무용(제도)에 관한 무지하거나 순수한 시선을 포착하면서 어떤 절대적, 적대적 근거가 되는 무용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열된다. 두 차례 있던 두 번의 대화는 사실상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여기서 앞선 ‘너’에 관객이 소환된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너를 잊는다’는 제목에 바로 더해진, 그래서 그것을 대신하고 완성하는 ‘나는 너를 아카이브하겠다’는 문장의 ‘너’는 이렇게 (불)특정한 관객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일종의 프레젠테이션 형식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공연에 대한 발화가 관객에게 열린 형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것이 조금 더 특정화된 부분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중요한 건 이 공연이 ‘나’와 ‘너’의 이야기며, 개별성(의 공동성, 평등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만든 브로슈어에서 프로필을 보면 이들은 자신의 경력을 딱딱하게 기록하며 전형적인 무용인의 한 인구를 형성하기보다 그저 자신들의 소소한 사실들과 호오를 나열하며 각자의 뚜렷한 ‘개성’을 산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솔직한 젊은 세대의 생기발랄함을 보여주는 한편 기성의 것과 무용계의 딱딱한 프로필과 제도의 영향을 승인하고 인가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나아가 무용계의 일부로 기입되는 것을 포기한다는 점에서는 전복의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데 이는 이들이 작품을 작품화하기보다 아카이브화하며 이야기하고 비평할 수 있는 텍스트로 탈바꿈시키고 각자의 무대를 일시적인 점유의 공동 공간으로 바꾸며 평등화한 안무 방식과 맞물려 자유에 대한 합의의 지점에서 공통된 것으로 보인다. 


    쌓아나감의 방식 속에서도, 또한 그 자체의 표현 형식에서 느낌을 끌어내며 하나의 클라이맥스에 접근하는 지점이라면 스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 강이 흐르는 가운데 <MarsⅡ>의 불균형적 리듬의 걸음을 가시화할 때 최승윤과 여민하는 양 옆에서 발레를 함으로써 앞뒤로 교차하게 되며 셋의 조합은 일체화된 감각의 극점을 만드는 부분이다. ‘긍정의 발레’를 재현하며 ‘이것이 발레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발레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를 보여주는, 그리고 ‘그 노래의 평온함이 그대로 표현·재현 가능한 것입니다.’ 속에서 <MarsⅡ>는 재맥락화된다. 아니, 오히려 <MarsⅡ>의 본래적 맥락이, 어쩌면 몇 가지 물리적 규칙과 전제가 추동하는 비자연스러운 움직임들이 자연스런 음악과 비-화성적으로 조합되는 안무로서의 움직임이, 중첩된 움직임 속에서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는 발레를 이상하게 변형시켰던, 발레에서 히스테리를 찾고 그것으로 발레를 내파시키며 또 다른 안무의 추동력을 찾아냈던 것으로 보이는 그 공연의 연장선상에서 (누군가에게는) 그 알 수 없는 거부가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일종의 순차적 쌓아나감의 공동의 환경은 이런 중첩의 감각, 지난 것들을 공연 안에서 반복적으로 다시 소환하는 가운데 병렬이 아닌 몽타주되어 새롭게 의미를 획득하는 부분이 생겨난다. 


    <Forget 츄>에서 기억은 아카이브의 욕망 속에서 구체화되는 한편, 저항의 자리로 표면에 드러나는 듯 보이는 잊음은 이것과 접면하고 있다. 작품들의 계열들이 이루는 의미의 순환과 재맥락화는 어떤 조합의 가능성 자체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그리고 앞서 말했듯 작품들을 텍스트로 소환하는 자료적 차용의 가능성 자체를 우선 전제하고 또한 거기에 자기 지시적 논평이 더해지며 현재적 맥락을 형성하는 듯하지만, 그리고 이 텍스트의 조합적 원칙이 세 명의 자율적이고 평등한 참여의 원칙에 포개어지며 극을 전체적으로 이끌어 나가지만, 표현적 측면에서 새로움이 나오는 건 오히려 앞서 언급한 세 명의 안무가 겹치는, 두 층위의 움직임이 겹쳐지는 순간인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잊는 ‘너’는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의 작품의 일시적 체험과 그 완전성이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둘러싸며 위계적으로 작동하는 무용계의 보이지 않는 어떤 시스템과 또 선입견이다. 실제로 여민하는 <나는 지젤이 되고 싶다>에서 백조가 갖는 운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성과 그(여성으로 확장되는)에 가해진 비극성, 또 슬픔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연기성에 의문을 갖고 그것을 패러디한 무대를 선보이며 엄숙한 춤(과 그것의 권위와 아우라)을 내재적 균열로부터 확장해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의문을 품기 어려운, 어떤 보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실체를 확인시킨다. 잊음의 ‘너’가 그러한 당연한 것, 그럼으로써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면, 그래서 잊고자 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뒤 문장의 ‘너’는 과거를 아카이브하며 그로부터 거리를 두는, 그리고 미래로 유예되며 과거로 쌓이는 현재(적 과거)에 대한 이름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너’ 곧 제도권의 시스템과 그 팍팍한 현실을 잊는다가 아니라 또한 오히려 잊겠다는 의지도 아니라 ‘잊고 싶다’의 어떤 무의식일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뒤의 ‘너’는 일종의 데이터베이스고, 나는 기억(과 망각)의 현존의 체험 대신,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노는 동물화된 오타쿠의 한 전형(의 연장·변형된 존재자), 자칫 전복과 저항, 그리고 자유의 이름으로 더 명명될 수 있는 그런 ‘잊음’이다.


    그러니까 제도권에 대한 비평의 공통됨을 만들며 공동의 자리를 만들기보다 개별성의 이름들로 환원하며 그 제도권을 잊음으로써 이들은 현재의 무대의 자리를, 그리고 미래의 무대의 자리를 예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자기 비평적, 자기 지시적 공연이 표면적으로는 렉처 퍼포먼스나 그 이전에 논-단스의 형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넘어 현재의 젊은 안무가들이 할 수 있는 어떤 최대치의 운동이자 안무가 아닐까. 망각과 쌓아 감을 통해서 자신들만의 현재를 재생하는 세대의 이름(의 공통됨)을 만들며. 그래서 어쩌면 어떤 가능성과 (현실의) 제약을 동시적으로 재생하는, 그 양면의 분할되기 어려운 경계를 보여준 현재 무용 지형의 어떤 바로미터로서 이 공연을 또 보게 만드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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