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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상리스트>: 가상의 재현적 접속 양태들
    REVIEW/Dance 2018. 2. 6. 12:27

    정방형 무대와 그 가로부터 바깥쪽에 형성되는 객석은 경기의 플레이를 본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무대 위쪽과 함께 유일하게 객석이 없는 한쪽 벽의 스크린을 마주한 객석의 가에서부터 무용수의 의식이 깨어나며 시작되는 퍼포머의 움직임에서 예기된다. 이 비어진 공터는 플레이어들의 접속과 함께 가상의 현실이 만들어지는 공간으로 전환되게 된다. 가상의 플레이어들은 달라지는 환경에 적응하는데, 곧 현실의 행위를 모방한다. 어떤 ‘되기’의 방식은 주체적 역량을 야기하기보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인도되는 듯 보이고, 이내 해변을 맞거나 하며 의사-자유마저 누릴 수 있게 되는데, 진정한 자유라기보다 연기를 하는 의사-대상이 된다.

    이 가상은 완벽한 실재가 아닌 달라지는 환경의 유동성 자체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따라서 공고한 건 이것이 가상이라는 인식과 그럼에도 소진되어 가는 몸이다. 스크린의 영상은 홀로그램이 아닌 가상임을 알려주는 일종의 세팅 값에 불과하다―가령 마지막에 리모컨으로 스크린을 끄는 것이 곧 끝이 된다. 영상이 몸에 무늬로 입히는 순간 몸은 달라지는 대신 그 자체의 궤적을 뚜렷이 한다. 반면 가상은 스크린을 벗어나서 찌그러지고 왜곡된다.

    실제 스크린을 비롯해 무대 전체가 암전이 되고 퍼포머가 사탕을 빨며 내레이션을 하는 소리를 증폭시켜 들려줄 때 불쾌함은 극대화되는데, 소진되는 몸들이 정리되지 않은 엔트로피적 발산, 공명되지 않는 시각적 잔상에 가깝다면, 소리는 마이크를 통해 몸의 공명을 직접적으로 발화한다. 이러한 극명한 차이는 빛과 빛 사이 어둠이라는 간극을 두는 설정 아래 적용된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사를 추동하는 힘을 목소리로 두기 위한 측면에서 기인하는 바가 더 크다. 하지만 그로써 서사가 명확해지기보다는 모자이크적으로 파편화되는 바가 더 크다.

    지지직거리거나 버퍼링되는 스크린은 시스템의 오류 가능성을 알린다. 퍼포머들이 속한 빈 경기장은 판옵티콘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의 자리를 가늠하게 한다. 물론 이는 리모컨으로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형의 게임의 규칙에 대한 인지와 동의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처음 객석에서 무대로 나아가는 장면이나 몸에 영상이 입히는 장면 등에서 몸은 가상의 바깥이나 경계에 접면하는데, 여기에서는 퍼포머, 그리고 그 바깥의 의식이 따로 개입된다고 볼 수 없다. 몸은 그리고 시스템의 외부는 따라서 무의식에 가깝다. 그러나 그 안을 다루고 있는 <가상리스트>는 가상이 유희로 치환될 수 있음 이외에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무의식은 비의적인 측면에 그친다. 또한 그 가상에서 딩굴며 실존의 몸부림을 꾀하는 퍼포머들의 그 이전의 행위는 꽤나 불투명한 데 그치고 만다.

    p.s. “인간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가상은 현실을 이미지화한다”는 작품 소개는 가상과 현실의 소거되는 차이를 욕망의 축에서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모호한 욕망은 무용에서 다루어 온 단골 대상쯤으로 볼 수 있으나 대부분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결과적으로 이에 대한 모호한 서술 역시 언어와 표현 사이의 간극이 늘 발생한다는 점에서 작업에 대한 서술이기보다는 언어를 위한 서술, 곧 과잉된 언어로 나타나는 경향이 강하다. 가상의 플레이로서 연기는 사실 수행적인 것을 모사한다, 실제로 그것이 수행적이기보다는. 어쩌면 ‘가상’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실재로의 경계를 시험하는 과정에서 즉흥적 수행성을 퍼포머들에게 실제적인 과제로 부여했다면, 곧 짜인 판 안에 다시 들어오기를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면 작업은 기존의 틀을 크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 <가상리스트> 웹 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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