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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Dance 2019] 프란체스카 포스카리니, 안드레아 코스탄초 마르니티: '탈얼굴의 타자성'
    REVIEW/Dance 2020. 3. 16. 16:53


    프란체스카 포스카리니의 <비대칭에의 소명>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실험을 전개한다. 하나는 이들의 움직임이 공간 안에 몸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의 측면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공간 측정적이라는 점인데, 순간의 심미적 기호의 발산이 아니라 공간을 어떻게 움직임이 반영, 반추하는지를 인지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처음 팔을 뒤로 보내는, 앞뒤로 대칭적인 두 번의 움직임이 가진 간결함(이 주는 심미성)을 제한다면, 대부분의 움직임은 따라서 대단히 재미가 없다. 이는 무미건조하게 공간을 이동하고 정위하며 또 배분하는 움직임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사운드를 움직임의 물리적인 지지체로 두고 몸의 움직임과의 상관관계를 실험해본다는 것이다. 루프 스테이션을 활용해 이들은 현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이후 같은 소리를 반복 재생시킨다. 사운드의 현존성 내지 직접성이 강조되고, 이는 주기적으로 과거가 아닌 신체의 발현 현상을 지시한다. 여기서 이들은 몸의 움직임을 강조하기보다 사운드의 자취에 주의 집중할 수 있도록 움직임의 틈을 벌려 놓는데, 이로써 남는 건 사운드의 움직임이다. 마치 음악은 볼 수 있는 무엇이 된다. 그리고 이 사운드 역시 공간학적 반향이라 할 것이다. 


    또는 사운드는 움직임을 덮고 있다. 과거의 음들이 쌓여 나간 '음악 무덤'에서 이들은 유영하며 허우적거리는데, 이때 소리가 사라진 이후 움직임은 드러난다. 퍼포머의 숨이 들리고 그의 움직임이 숨의 소리와 동기화된다. 프란체스카 포스카리니와 안드레아 코스탄초 마르니티의 듀엣 <비대칭에의 소명> 이후 각 솔로 작업, <뼈 위에서 노래하며>와 <토리노에서 생긴 일>이 이어지는데, 세 개의 작업은 마치 두 개의 막을 갖는 하나의 작업으로 구상된 듯 보인다. 이 연장선상에서 두 사람의 작업에서 한 명이 다른 한 명으로 대체되고 교환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그렇지 않은데, 이는 실제 막이 없이 또한 암전을 통해 막을 구분함 없이 진행하기 때문이며, 공연 자체가 정면성의 관점을 형성하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두 안무가가 퍼포머로 출연하는 <비대칭에의 소명>의 참조점으로 사전에 또는 부가적으로 제시된다. 이는 사실 <뼈 위에서 노래하며>와 <토리노에서 생긴 일>로도 연장될 수 있다. 물론, 공간 안에서 움직임의 반향은 움직임의 미시적 형태보다는 공간 자체에 대한 움직임을 통한 지시에 가까워 보이는 반면, 얼굴성은 이들의 얼굴이 중심이 되지 않는 가운데 신체 전체의 꿈틀거림 안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형성된다, 차라리 얼굴은 끊임없이 움직임의 프레임을 변경하고 그 자체를 구부리고 찌끄러뜨리며 구성된다. 곧 그러한 구성 자체를 얼굴로 본다면, 얼굴은 하나의 일정한 프레임의 지속을 통해서 관찰될 수 있는데, 공간 자체의 유동('불가능한 관점') 속에, 그리고 프로시니엄 아치가 아닌 가운데 위에서 내리꽂는 시선을 통해서는 이 자체를 정면성으로 구성하기 어렵다. 


    노출 공간의 형식은 자유로운 움직임 질서에 적합한 반면, 수직적 객석의 위상은 무대와 직접적인 교환의 가능성을 삭감한다. 그럼에도 이는 이 공연이 의도하는 얼굴 자체의 이탈(과 그로 인한 타자의 현상)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이들의 얼굴은 관점의 변경을, 관점의 불가능성을 구성하는 것이랄까. 곧 마주할 수 없는 얼굴, 그럼으로써 마주하는 탈-얼굴로서의 얼굴이 이들이 레비나스를 전유하는 방식이랄까. 그리고 여전히 이 커다랗게 일그러지며 마주치(지 않)는 얼굴의 실제 얼굴은 머리를 싸매거나 하는 동작에서 얼굴로서 지시되며 흔적을 남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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