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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ance 2019] 아트프로젝트보라, <<무악舞樂> 보고, 듣다>: 재현의 지지체로서의 행위REVIEW/Dance 2020. 3. 16. 16:49
▲ 아트프로젝트보라 <<무악> 보고, 듣다>ⓒCreamart [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이하 상동)
<<무악舞樂> 보고, 듣다>는 춤이라는 형태를 지지하지 않는 듯 보인다. 동시에 어떤 사운드 장치를 재전유하여 다른 사운드를 구성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듯 보인다. 여기에 전제된 명제는 가령 이와 같은 것이다. '모든 소음은 '들을 만한 어떤 것'(음악적 사운드)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행위는 (춤이 아니라) 사운드의 일종이다. (움직임 역시 들을 수 있는 어떤 매질이다)' 결과적으로 사운드의 재구성으로서의 움직임은 행위 자체로 움직임을 확장하며 짜인 안무로부터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동시에 그러한 움직임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듯 보인다. 그리하여 이 움직임은 사운드를 구성하기 위한 도구적 움직임(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를 구성하기 위한 도구적 움직임을 자처한 움직임, 곧 그러한 움직임의 새로운 양태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며, 사운드 (재)구성 자체의 목적은 일종의 맥거핀이 된다.
사실상 이미 적절한 사운드 스케이프가 어느 기점부터 이들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이들의 움직임은 그러한 배경 안에 리듬으로 절합된다는 점에서, 행위는 우연성에 기대기보다는 전적으로 음악으로부터의 재현적 움직임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들의 움직임을 사운드로 듣는 대신, (그 사운드가 소거되는 가운데) 이들의 움직임이 이미 음악에 대한 공명―음악을 만드는 행위자가 아니라―으로서 자리하고 있음으로, 행위인 것처럼 짜인 움직임으로 보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행위로써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소용되는 무엇이 아니라 행위를 가장한 움직임인 것이다.) 그럼에도 소리(-장치)를 만들어간다는 목적성은 발현되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모든 것은 소리일 것이다.
피아노를 중앙 전면에 둔 채 작업실 퍼포머들은 가에서 드릴을 쓰거나 사포질을 하거나 도구적 인간을 자처한다. 이는 사실 작업실 광경의 재현이다. 하지만 그 작업은 실제 일어나기보다 그리고 그 행위 자체가 중심이 된다기보다 가상적으로 이 안에 작업실의 풍경을 띄운 것이다. 이들은 사운드 이전에 곧 실험음악적 반향 이전에 '인체-피아노'를 만들고자 하는데, 여기서 몸은 직접적 의지와 자율성 없이 피아노와 같은 긴 오브제가 되고 피아노의 뚜껑을 닫듯 접힌다. 따라서 <<무악舞樂> 보고, 듣다>는 행위로부터 연주를 또 행위 자체로부터 듣기를 구현하기보다 사운드 내지 음악(적인 표면)을 구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성해 가며 출현하)는 움직임의 가능성, 그리고 그로부터 사운드 혹은 음악과의 거리로부터 지지되는 어떤 긴장 자체를 듣는 신체로써 구성하려는 공연으로 보인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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