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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보람,〈the thin ( ) line〉: 극장이라는 전략과 유동하는 극장의 형식
    REVIEW/Dance 2021. 8. 25. 12:13


    이 공연의 개별성, 구체적 지점들을 자세하게 다루는 대신, 이 공연의 프로세스가 전제한 구조의 동역학에 초점을 맞춰 이를 다뤄보려 한다. 이는 이 공연의 기존 극장 공연과 다른 전략과 그 특이성에 대한 차원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과 관련된다.


    왼쪽부터 무대 위 손지민, 김지형, 정한별 무용수. 사진=채드박@wavefilm (이하 상동)
    김지형 무용수가 무대 왼쪽에서 극장 천장으로부터 연결한 고무줄을 잡고 있다. 


    소극장은 객석을 치우고 평평한 바닥 공간을 확보하고, 객석 문과 무대 뒤편의 문을 개방해 관객의 들고남의 순환이 가능하게 구성된다. 각각의 퍼포머의 대기 공간은 중앙의 무대와 교환된다. 관객의 자리 역시 재배치된다. 여기서 세 시간의 긴 소요(所要) 시간이 소요(逍遙)를 요청한다는 점은 공연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하나의 축이다. 관객의 자리 유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건 드라마투르그(양은혜)의 몫이다. 극장 전반, 곧 극장 로비와 주변으로 확장되는 공간을 특정 스팟들로 분할하고 여기에 이미지, 텍스트, 사운드 등의 서사를 부여한 후, 이를 관객에게 시차를 갖고 문자로써 분배하는 방식을 활용한다. 드라마투르그는 공연을 스치듯 보고, 관객을 그와 함께 흘긋 보며 극장 전반을 띄운 채, 관객을 곳곳에 분할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역할을 따라, 곧 문자의 요청을 수용함으로써 중앙 무대에서 펼쳐지는 움직임은 펼쳐지고 있음의 인식으로 전환되는데, 이는 무대의 보기를 관객이 포기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동시에 공연은 지속되고 있다. 공연은 의도적으로 다른 배치의 주문에서 나아가 보기의 포기, 극장에 다중 시간으로 접속하기를 요청한다. 하지만 공연은 시종일관 느슨한 긴장감을 준다는 사실에서 이런 시도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곧 중앙 무대의 구성과 해체는 계속 반복되고 그 사이에 틈이 생긴다. 이러한 틈은 앞의 공연이 곧 사라질 것임을 동시에 또 다른 공연이 나타날 것임을 의미한다. 무대의 내용은 곧 사라지는 파편에 가깝고, 어떻게 보면 일정 시간을 채우기 위한 그리고 전환될 시간에 가깝다. 

    손지민 무용수

    애초에 그 내용이란 건 일관되게 얇은 선(thin line)의 모티브를 상기시킨다. 또는 얇은 선과 연관된다. 구체적으로 네온사인 줄, 플라스틱 줄, 고무줄, 빨대 등이 움직임에 동반된다.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면, 네온사인 줄과 고무줄이 중앙 무대 공간의 영역을 구성하고 바닥을 표면으로 한 시각 기호들을 상정하는 짧은 고무줄들의 나열이 계속 철회되고 재생된다는 점은, 무대 위의 재료들이 반복되고 재조합됨에 대한 단서로 작용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시각성은 완성을 위한 부착과 관상을 위한 열린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구조와 구성을 위한 끊임없는 해체 과정에서의 순간적 기억과 결탁한다. 그것은 열린 시간 대신 열린 가능성들과 상존한다. 
    내용에 틈이 생기는 순간, 극장이 환기된다. 막의 전환을 알리는 몇몇 순간에는 천장의 조명이 켜지고 또 꺼지며 네온사인 줄이 빛나는 순간이 있는데, 극장 전체가 얇은 선의 모티브로 구성되었음을 지시한다. 극장 측의 안내방송도 그 틈을 따라 공연 일부로 삽입된다. 방역 지침과 연동된 극장 동선의 규제에 대한 부분이다. 여기에 예외적으로 세 시간의 러닝타임을 규제하며 마지막 순간을 지정하는 부분이 있다. 이 둘은 모두 공연의 협력 주체로서 공연자 측과의 합의를 명시하는 역할이 극장 측에서 드러남을 의미한다. 

    왼쪽에서 달라기 자세를 취하는 김지형 무용수 

    세 퍼포머(무용수), 손지민, 정한별, 김지형은 특별한 캐릭터의 재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세 대별되는 캐릭터들은 각자의 음악을 무선이어폰으로 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음악은 이어폰 바깥으로 연장되기도 하고, 문자에 따라 관객의 이어폰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이어폰을 통한 사운드가 직조하는 세계에 잠겨 있음으로써 평평한 무대는 유리된 시간으로 또한 틈을 발생시킨다. 이는 정면성에 대한 엄밀함과도 거리를 두게 한다. 이러한 틈이 이 공연에 대한 참여와 철회 또는 배회를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이 틈은 스피커와 동기화돼 그 음악이 흘러나옴으로써 공간을 뒤덮기도 한다. 내밀한 내부의 누출은 이 세 퍼포머에 대한 관음증적 보기를 전제한다. 
    세 퍼포머의 양상은 모두 다르다. 그들의 의상과 움직임은 분명 코드화되어 있다. 정한별이 작업복 같은 의상 아래 가장 평범한 몸짓을 선보인다면, 김지형은 비보잉적 제스처나 움직임을 가져간다. 정한별이 시선들에 대해 자신을 던지는 행위로 보인다면, 김지형은 관객의 곁에서 자신의 실존을 꿋꿋이 이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정한별이 무대의 일부를 점유하거나 어떤 잉여처럼 무대 중앙에 놓인다면, 김지형은 애초에 무대를 점유할 생각이 없이 어떤 틈과 바깥의 경로를 탐색해 나간다. 반면, 손지민의 움직임은 무대 중앙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놓인다. 이는 관음증의 대상의 위치를 점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용수 손지민이 양말을 가지고 움직이는 동안, 빨랫줄이 되는 고무줄은 어느 정도 고정된 무대의 자리를, 동시에 관객과의 안전한 거리를 만들며 관조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안전한 위치, 편안한 위치는 수동적 관객이 요청하고 기대하는 자리이기도 하며, 손지민의 움직임은 그 움직임 자체의 매력을 기반으로 한다. 러닝타임과 공간의 구성 모두 파편적이기보다 온전한 단위를 이루는 듯 보인다. 고무줄을 무대 중앙에 분배하고, 색색의 양말을 한 짝씩 벗어 놓고 이동하기―한국무용의 스텝을 사용하기, 그리고 무대 가의 기둥으로부터 고무줄을 묶어 길게 끌어와서 공중에 올린 후 빨랫줄처럼 곳곳에 양말을 가져오기―회전반경을 만드는 다른 스텝 사용하기, 그리고 그 위에 걸어 놓는 이차의 움직임은 매우 선연한 인상을 준다. 양말 역시 얇은 선의 모티브에서 연장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색의 차이들이 있다. 무대의 안정적 시간의 차원에서 손지민과 두 퍼포머와의 차이를 구성할 수 있다면, 분산된 시각과 시간을 통한 공연의 역전과 확장, 재전유로서의 시도는 이와 충돌하는가. 하지만 이런 충만한 시간 속에 3시간의 대부분을 모두 수용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간의 벗어나기, 또는 시간의 입체화하기의 전략은 이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라는 지점에서 사실상 가능할 것임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틈새들과 선택의 가능성을 만드는 연약한 환경이라는 것, 극장을 이동의 경로들로 배열하기라는 유동적인 시공이라는 것이 이 공연의 특징이라면, 무대 공간의 몰입은 부분적으로 철회될 수도 또 제시될 수도 있음이 이 공연의 전략 아닌 전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연히 자리한 엔딩, 곧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에 맞춰 정한별은 큰 원을 이루는 줄을 목에 둘러 돌리는 장면은, 극장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그 이후의 김지형의 다음 움직임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제한을 받기 때문에 엔딩이 된다. 김지형은 도는 움직임들을 많이 구사하기도 하는데, 이는 어느 한 방향으로 정위되지 않고, 마치 그를 둘러싼 어떤 관객의 정면성에도 맞춰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프로시니엄 아치의 해체를 전제로 한 공연의 어떤 증상으로도 보인다. 중앙에서 가로 치우친 작은 영역에서 웅크리고 앉아 빨대들로 “1+1=1”이라고 쓰고 떠나는 장면 역시 가는 선의 모티브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작은 영역 역시 안정적이지 않다―그 스스로에게 온전히 편한 것이 아니라는 것(시선은 분산되고 또 바로 앞 관객의 시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손지민의 양말 벗기와 양말 걸기는 고무줄을 든 전보람 안무가와의 협응 속에서 구성된다. 양말이 걸린 고무줄을 흔들어 이를 다 떨어뜨리고 막이 끝난다. 

    바닥에 누운 정한별, 서서 시계을 보는 김지형 무용수

    〈the thin ( ) line〉은 반복(퍼포머)의 뒤섞음을 통해 각 퍼포머의 차이를 만든다. 그 가운데 주어지는 미션 안의 텍스트, 이미지를 통한 차별적 공간과 관객 구성의 몫은 이 차이를 무대 밖의 시공으로 확장한다. 사운드트랙들은 다양하고 반복되는 일부가 있다. 이러한 음악은 그 자체의 서사에 그치며 기승전결의 서사를 만들지도 않는다. 서사는 무엇보다 그 음악을 듣는 퍼포머에게 작용한다. 음악은 단순히 분위기일 수도 개인적 취향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 음악이 퍼포머에게 감지되고 그의 움직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음악은 문자를 따라 관객에게 따로 전해지기도 한다. 
    〈the thin ( ) line〉은 극장이라는 총체적 공간의 사유 아래 유동하는 극장의 움직임들을 구성하고 또 구성한다. 곧 그것은 극장이 건축의 일부라는 점, 또한 이동을 통해 도달한다는 점, 여러 다층적 공간으로 이뤄졌다는 점 등에 대한 인식이다. 동시에 일 대 일의 시간이 아니라 다 대 다의 시간이라는 지점에서 〈the thin ( ) line〉은 헐겁지만 파편들의 총체적 시간을 만들어 간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태그를 걸어 SNS에 올릴 수 있게 한 점은, 공연의 연속선상을 기약하는 것 이전에 공연이 이미지로 축소되며 수용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더 큰 전제는 이 공연이 총체적 시간의 유기적 형태가 될 수 없음을, 온전하거나 완전한 총체와 그 시선이 불가능함에 있는 것 아닐까. 

     

    정한별 무용수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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