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손석구가 쏘아올린 연극에 관한 작은 명제: 극장이라는 매체
    Column 2023. 8. 7. 02:23

    〈나무 위의 군대〉에 출연한 손석구[사진 제공=(주)엠피앤컴퍼니]

    얼마 전 손석구 배우의 발언과 함께 일어난 사태는 이 두 문장에서 출발하면 간단한 문제로 보인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는다.”와 “(어떤) 연극은 마이크를 사용한다.” 두 문장이 양립한다는 것만 인정한다면. 그에 따르면, 남명렬 배우는 연극의 전제를 기본적으로 전자로 축소한다. 조금 더 미묘한 문제는 이것이다. 전자를 연극의 기본적인 소양이자 절대값으로 둔다는 것. 그 두 개의 문장은 사실 모두 통용되는 부분이다. 실은 기본값이 연극에서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발성의 역량을 기르는 것이 배우의 기본 자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배우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반면, 어떤 연극은 마이크를 사용한다. 

     

    사실 낭독극 역시 마이크를 대부분 사용한다. 물론 이는 연극의 전 단계이거나 연극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텍스트를 더욱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만든다. 바로 그 같은 이유로 연극에서는 마이크를 사용하기도 한다. 볼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효과의 문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전자의 차원에서는 이 극장이 도무지 육성으로는 극장 전체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차원에서는 조금 더 다양한 예시를 들 수 있다. 선언한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여기에는 볼륨의 문제가 포함돼 있다.) 또는 매체적 확장을 추구하기 위해서. 여기서 전자는 후자와 어느 정도 상관된다. 곧 마이크를 사용하는 건 연극이 마이크를 통한 확장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 시대를 상정한다. 새로운 미디어 역시 ‘현실’인 것이다. 연극은 현실을 다룬다. 

    가령 연극을 하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계속 확장하는 작업을 보자. 연극의 장면이 촬영의 내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의 장면을 영화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의 경우, 마이크 수음이 필요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예외가 있으므로라는 언급은 여전히 연극은 마이크가 필요하지 않은 목소리-신체의 역량이 기본값이라는 전제를 비꼬는 것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사실 손석구가 드러낸 건 연극과 영화 혹은 방송의 경계가 누군가에게는 완전히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연극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가 있다면, 붐마이크를 통해 극장이라는 광활한 물리적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제약’으로 가시화할 것이다. 순전히 연극 배우를 하다가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 자신의 목소리가 과장돼 있고 증폭돼 있음을 그제야 깨닫는다. 이러한 예시들은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연극이 하나의 장소에서 분화한다면, 영화는 여러 개의 장소를 하나의 장면으로 잇는다. 반면 연극 이후 영화가 출현했다면, 영화 이후 연극은 재매개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연극 세계는 여전히 그리스 아테네의 한 장소에 있다. 

     

    손석구는 적어도 속삭이는 소리를 속삭이는 그대로 수음, 증폭할 수 있는 미디어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다. 이는 사실 ‘미디어’ 연기를 병행하기도 하는 남명렬 역시 잘 아는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미디어라고 하는 부분을 연극 현장에서는 “매체”라고 하는데, 이것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물론 매체와 미디어가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여러 다른 장르에서 방송이나 영화를 매체가 아닌 미디어라고 부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연극인들에게서 연극은 매체라는 생각이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듯 보인다. 한편으로 이는 연극과 영화 혹은 방송이 생각보다 더 긴밀하게 붙어 있음을 알려준다. 손석구가 영화/방송과 연극을 오가듯이 말이다. 이미 넷플릭스는 연극인의 하나의 다음 절차 혹은 옵션, 꿈 아니면 장벽―그것은 물론 반동의 정서를 포함한다.―의 개념이 되었다. 따라서 이런 말도 연극에서 시작한 유명한 배우에 의해 역으로 가능하다. 나는 다시 근원적인 연기의 세계인 연극으로 ‘다시’ 돌아왔다. 영화가 모두를 위해 말한다면, 연극은 바로 식별 가능한 거리에 있는(그들로부터가 아닌 그들을 향한) 자들만을 위해 말하기 때문이다. 

     

    역시 연극과 영화를 오가는 이순재 배우의 생각은 조금 더 첨예하게 연극의 조건을 드러낸다.  “가짜를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연기”라는 건 무엇일까. ‘가짜’는 물론 손석구의 연기가 아닌, 손석구가 “가짜”라고 인식한 부분이다. 가짜와 진짜의 사이에는 마이크가 있다―더 정확히는 마이크의 절대적인 사용 여부의 차이에 따른다. 그에 따라 연극과 영화가 성립한다.  하지만 무엇이 더 ‘진실’한 매체인가 하는 건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냥 말할 수 있어서 진실한 것이라면, 그냥 말한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것인가.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마이크가 아니다. 손석구는 연기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연기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서 애초에 손석구가 연기를 규정한다고 한 것에서 분노가 연속해서 파생되었는지 모른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건 진짜와 가짜가 따로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언뜻 리얼리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이순재의 말은 연극의 내용보다는 형식 자체를 이야기한다. 가짜와 진짜는 정도의 차이이다. 곧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애초에 모호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짜인 것 같은 진짜를 진짜로서 믿는다라는 말에 가깝다. 이는 허구의 드라마와 실제의 삶의 분리 역시 가정한다. 반면, 진실의 삶에서 허구의 드라마임을 고백하는 연극 역시 있다. 일종의 뉴다큐멘터리 씨어터가 그러하다. 관객이 보는 무언가는 단순히 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극장이라는 장소, 조명, 사운드, 곧 장치로서의 극장이 배우의 말을 진짜가 아닌 ‘진실’로 만든다. 그것들의 효과를 온전히 제거할 수 없음이 연극이라면, 그것들을 온전한 듯 은폐하는 것이 영화이다.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는 가짜를 진짜로 분별할 수 있는 무대와 객석의 규칙에 의거한다. 연극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매체가 아니라 다른 매체들에 한없이 기대는 매체이며 그것들이 종합되어 구성되는 매체이다.

     

    그렇다면 손석구의 잘못은 무엇일까.  남명렬은 “속삭여도 350석 정도는 소리로 채우는 배우는 여럿 있다.”라고 말한다. 곧 손석구의 명제가 기본값이 아님을 의미한다. 곧  이러한 능력이 보편의 것이 아니라면, 다시 무대라는 장소가 지시된다. 무대는 항시 텅 빈 장소와 성대의 길항작용 속에 유지되며 그것의 지속적인 안정적인 출력으로써 가능하다. 이것이 유독 영화관이 아닌, 극장에서 떠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애초에 그러한 가능성이 모두가 아닌, “여럿” 있는 ‘위대한’ 배우의 것이라면, 그리고 (뉴)다큐멘터리 씨어터나 포스트 드라마의 연계 속에서 실제 인물이 출현하는 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면, 마이크라는 옵션이 허용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손석구의 말은 어떻게 오만한가. 방송에서 뮤지컬로 장소를 이전하는 가수는 경계의 대상이 되고는 했다, 마치 아이돌이 배우로 데뷔했을 때에서처럼. 여기에는 출생 신고의 장소가 중요했다. 반면, 손석구는 연극의 관성을 의심하면서 영화로 갔고 다시 연극으로 돌아왔다―여기서 연극이 그의 가장 첫 번째 지점이었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가짜 연기라는 것이 가능한  모종의 어떤  방식을 고려했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은가. 

     

    여전히 지지되는 연극에 대한 환상, 곧 완벽한 하나의 시공간과 그 질서를 구성하는 현-존재라는 이상, 그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한다는 꿈은  연극인이 지닌 하나의 자양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는  연극은 장소에 매여야 한다는 사실의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지시한다. 곧 일회적인 소수의 공동의 현존. 반면 영화는 모두의 현존을 위해 장소는 유예된다. 전지현의 속삭이듯 빠르게 흘려보내는 발성은 영화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곧 영화에서만 가능한 진실도 있다―따라서 이전의 손석구에게만 가능한 진실도 있다. 

    뮤지컬과 방송 모두 마이크를 사용한다면, 연극은 기본적으로는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전지현이 대극장에 기존의 스탠스로 데뷔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그의 말은 훨씬 더 느려질 것이고 산뜻한 느낌이 드는 도발적인 이미지는 상실되거나 상당 부분 축소될 것이다. 

    〈도둑들〉에서 전지현은 김수현을 지나치면서 김수현이 아닌 허공에 대고, 실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하고 있다. 아니 아무런 의심 없이 말을 흘려보내고 있다, 속삭이듯. 그러한 탓일까. 음악에서 뮤지컬보다는 (순전히 출발한 장르가) 영화에서 연극으로 오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그럼에도 연극인에게 넷플릭스는 ‘모두에게’라는 가능성에 대한 열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여기에는 극장을 장소로서 상상하는 인식은 빠져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손석구가 꿈꾼 진짜 연기의 장소가 장소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의 연기였음을 전제하지 않는 것과 반대의 차원에서.  그렇게 손석구 사태가 가리키는 건 극장이라는 물리적 장소이다. 

     

    p.s. 매체의 횡단에 의해, 연극은 모든 이를 전제로 한 작업으로 옮겨가고자 한다. 이때 연극을 보는 관람객의 시점, 그것이 어디든 상관없이 그 단일 시점으로 이 작업이 수행되는 건 아니다. 아마도 그러하다면 절대 그 단일 시점으로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그것을 예측할 수 있는, 그래서 하나의 시점으로 그것을 기록으로 찍어 남겨두고 다시 번역할 수 있는, 곧 연극의 단일 시점으로 이 비디오를 증폭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면. 반대로 말하면, 이 다중 시점의 연극은 연극을 보는 이에게는 불안함을 준다. 그것은 배우가 단순히 클로즈업되는 것이 아니라 잘리며 극장을 지워 내는 감각을 역으로 겪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기록은 앞선 헐거운 무대의 충만함의 효과를 헐거움 자체로 다시 변환시키므로 유효하지 않은 듯 보인다. 애초에 찍기 위해서 하는 공연이라면 다를까. 그리고 이 다중 시점의 기록 공연은 다시금 마이크의 증폭을 필요로 하게 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Column'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 아트신 초이스  (0) 2023.01.04
    2021 아트신 초이스  (0) 2022.01.01
    지역 예술의 이념  (1) 2021.12.31
    ‘투명한 플랫폼’으로서의 공간  (0) 2021.12.04
    퍼포먼스는 무엇의 이름인가  (0) 2021.11.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