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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성열병》: 호 루이 안의 관점 제시로부터
    REVIEW/Visual arts 2025. 7. 15. 17:54

    전시 《합성열병》[사진 출처=코리아나미술관](이하 상동).

     

    호 루이 안의 역사의 형상들과 지능의 토대(2024. 실시간 AI 생성 이미지와 비디오 설치, 컬러, 사운드, 75, 시트지 가벽, 모래, 캠핑 의자.)는 그의 강연에 부가되는 영상과 그것을 생성형 인공 지능 이미지로 번역하는 또 다른 영상으로 이어진 2채널 비디오 작업으로, 합성열병》(2025.03.19.~2025.06.28., 코리아나미술관)에서 예외적인 차원으로 또 상대적인 견지에서도 꽤 흥미로운 작업이다. AI라는 화두가 작품으로 옮겨질 때 보통 AI와 현재의 간극으로부터 미래의 부정적 차원이 예고된다면또는 테크놀로지의 집약된 버전이 주는 놀라움으로 그것을 상쇄하려 한다면, AI 자체보다 AI와 현재의 거리로부터 현재를 미래로 갈음하는 차원을 향한다면, 결과적으로 호 루이 안의 작업은 AI가 만드는 상상적 미래와 현재의 격차로부터 수렴하는 인간의 당혹감 혹은 놀라움 대신에, AI에의 미래, AI의 내재적 차원에서의 의식이 발생하는 틈을 찾아내고자 한다

     


    가령
    , 김현석의 메모리즈는 표면적으로는 SF를 읽으며 (그 내용의 연장으로서) 의사-미래의 환경 안의 몸을 체현코자 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는 디지털기술 발전의 지연과 오류에 대한 논평에 가깝다그러니까 SF는 문학적 장르라기보다 오류들의 아카이브다. 이제는 구 버전이 된 텍스트 생성 인공지능 모델인 GPT-3와 한 줄씩 주고받으며 공동 집필한, 오디오북 형식으로 재생되는, 8개의 단편 소설들은 현재를 근거 삼아 미래시제의 삶을 영위하는데, 첫 번째 작품 가짜 오바마의 경우, 성대를 사용할 필요가 없이 카메라와 화면을 통해서매개되는 디지털 휴먼의 존재를 이야기하며, 인간과 로봇의 정의를 뒤섞는다. 가령 인간은 로봇의 감각을 지닌 존재로 연장되며, 인공지능은 로봇임에도 인간과 유사해진다

    오류를 지칭하기 위한 AI로의 의도된 문학 장르상의 이양은, 그리고 전적인 목소리의 이양은, 내용의 정합성과 완성도의 영역에서가 아닌, 현재의 무의식과 징후에 대한 단서를 모호하게 암시하는 것을 제한다면, 그의 이번 작업은 자체적으로 2021년부터 2년의 간격을 두고 그 전달의 형식을 두 번 변경한 것과 같이, 그 미디어의 시대적 오류에 대한 환기는 곧 시대착오적인 작업의 미래와 공존하며, 그 기술에 따라 붙는 설명만을 남긴다. 결국 이는 미래(에 대한 내용) 대신에 과거(의 형식)에 붙들리는 작업이며, 결과적으로 과거를 미래의 형식 안에 투사해 내는 삶의 궤적을 밟아 왔다과거와 미래의 바툰 간격으로서 현재는 납작하게 자리한다.

     

    반면 요나스 룬드의 작업은 도래한  AI가 현실의 전반적인 영역을 선취한 시점 아래 인간들의 불안과 부정의 감정을 다루는데, 이것은 앞서 말한 AI에 대한 확증 편향적 현재의 사고를 반복하는 것, AI가 불순물처럼 경계 지대에 자리하는 현 시점의 부정적 심리에 대한 고착에 가깝다. 이는 AI가 무엇보다 인간적이지 않으며 또한 인간의 현실을 대체하며 인간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는 차원에서, 불안정한 조건에 처한 인간적인 목소리와 항변을 옹호하는 비판적 시점을 견지하는 것 같지만, 실은 미래의 급변화된 네트워크 체계 아래 인간의 무능과 시대착오성을 인간적인 무엇으로 재정의하(고 견지하며) 현재로 재투사하려는 시도이다

     

    요나스 룬드의 작업이 흥미로워지는 건 이 작업을 생성형 AI가 제작했다는 것인데, 이는 특히, 두 작업 중 잔상과 중첩의 회화적 기법처럼 생각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미래 The Future of Nothing(202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059.)보다 언캐니한 얼굴의 형상이 강조되는 어떤 것의 미래 The Future of Something(202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341.)가 그 말하는 이들을 모호하게 특정하며 그 미래로서 현재의 시점에 동기화되는 바 있다

     

    알아먹지 못하는얼굴의 형상들은 추상표현주의의 회화적 기법과는 분기되며, 글리치와 오류의 차원으로 드러나는데, “기술 감시자 익명 모임을 결성해 인간 존재들의 연대와 대화를 통해 다시 삶을 재건하고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의 서사로 급변하게 됨은, 이 현재로부터 (다른) 미래의 추출 대신에 AI의 바깥을 손쉽게 선취하며 현재와 미래의 간격을 손쉽게 봉합한다는 허무함을 안긴다

     


    호 루이 안의
    역사의 형상들과 지능의 토대에서, 처음 케 브랑리 박물관에 들른 작가가 말한 불안한 주석들은 식민지 역사의 자기 지시가 갖는 역설적인 그들만의 현재의 서술 체계를 가리키는데, 이를 식민지 박물관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고 과시하며 자기 폐쇄적 영역으로 닫히는 본래적인 비판의 지형 위에 위치시키는 건 그것이 갖는 단일한 서사의 붕괴 가능성, 피드백된 다른 시점의 자리를 예약하기 위해서다. 이는 마지막의 텍스트를 이미지로 변환하는 AI 엔진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이 자신의 철자를 그림으로 옮겨보라는 지시에 따라 마구간 건물 앞의 여러 말들의 모습을 산출한 결과에 대한 호 루이 안의 재해석의 결과와 조응한다

     

    “stable”이 마구간이라는 명사이기도 하고, 그 안의 여러 말이 확산(diffusion)되는 모습을 연출한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이, 그 말들이 다리가 하나 없거나 하는 불안정한 형상을 하고 있음안정적이지 않은것들의 확산으로부터 불안정한 이미지 생성의 기제로서 자신에 대한 메타 인지가 기반이 되어 인간이 보는 자신에 대한 정의를 나타내고 있음을 추정해보게 된 것으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단일한 서사를 뒤집는 AI가 보는 미래의 시점, AI가 역사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면 역사에 대한 다른 판단이 가능할지에 대해 호 루이 안은 질문을 던지는데, AI가 현재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에 이르는, 그의 강연이 나열했던 역사의 부정적 잔해들을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은 강연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영화 5원소(1997)의 유전자 합성으로 만들어진 빨간 머리 소녀 리루가 빠르게 인류 역사를 이미지로 습득하는 장면에서, 고통과 경악의 감정 등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오히려 순수하게 인간적 존재를, 현 존재의 공백을 AI가 체현하고 있음에 상응하지 않을까. AI의 재현 불가능성이 아닌 재현 기피라는 답변에 대한 호 루이 안의 예상 속에서, 비인간성을 산출하는 인간의 모순을, 간극을 해소할 수 없는 순수한 인간 존재로서 AI의 자리가 상정되는 셈이다. AI의 전신에는 이 영상을 관통하는 추아 미아 티가 자리하는데, 그의 그림에는 회화의 심미적 완성도가 아닌, 국가의 이상향적 미래에 대한 합목적성으로서 형식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는 다민족 말라야 국가 안의 그의 실존적 상황과 결부되며, 최종적으로는 역사의 미래, 곧 인간의 역사의 간극 앞에 선 AI의 실존적 의식으로 옮겨진다. 그에 앞서 제시된 내용으로서 역사의 조각들은 그 역사를 보는 특정한 관점을 구축하기 위한 서사의 조각들이다. 곧 영국 말레이 군도의, 피드백을 고려한  통치 전략이 노버트 위너(1894~1964)1960년대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경유해 국민과 정부 사이의 통합된 네트워크 구축과 잘못 송수신된 정보의 흐름을 재조정하는 전략으로 심화된다면, 케냐 신마을 대한 식민 통치를 매끄럽게 봉합하는 미디어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지구촌 개념은 그가 사용한 형상(figure)과 배경(ground)의 레이어를 하나의 관계로 축소하는 일원화된 지배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역사의 왜상의 자리를 메우는 건 그리하여 대체하는 건 2부의 두 편의 영화, ‘탐 크루즈라는 미국의 대표적인 배우라는 솔기가 그 사이에 자리하는 1년 내외의 시차를 두고 개봉된 영화 엣지 오브 투마로우(2014)오블리비언(2013)인데, 식민 통치의 지배를 위한 네트워크 이론의 전유의 주체를 가상의 적으로 전치하는 이러한 대중문화적 조작은 그 내재적인 서사를 완수하는 주인공의 행위, 그 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려는 존재의 사투로부터 획득되는 1인칭 게임의 강렬함으로 연장되는 가운데, 형상과 존재의 우위를 전치시키며 아래로부터의 서사를 선취한다.  

    이 두 영화는 역사의 직접적 형상을 벗어나, 위기에 처한 인류와 그 바깥의 적대로 기입되는 서사들, 그리고 타임루프, 곧 피드백 루프에 갇혀 이를 긍정적 결과로 업데이트하고자 하는 존재의 사투들을 다룬 이 서사들로부터, 일종의 수정이 가능한 구간 반복 학습을 하는 톰 크루즈라는 형상을 그 전 지구적 붕괴의 배경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이를 미래의 인류가 아닌, 딥러닝 학습을 통한 AI의 존재로 유비하며, 주체의 심급의 경로를 그 주체화를 방해하는 대상의 심급에 대한 비판을 경유해 이어 나간다

    그리고 이는 호 루이 안의 예술 형식이 결국 렉처 퍼포먼스로써 내레이터 혹은 논평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음에 상응한다, 그 자신이 주체의 심급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는 예술의 형식 안에서 말하기보다, 예술의 형식에 대해 발설한다. 말의 확산이라는 형상이 아닌 불안정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자신을 표현한 것이라는  AI에 대한 추론에서 드러나듯 그는 미학적 형식을 보여주기보다 들여다보는 시선을 제시한다

    그러니까 AI라는 키워드 안의 시대적 환원이 아니라, AI가 펼쳐내는 시간 속에서 그에 선행하는 또는 그에 침몰하는 우리의 시점을 찾아내고 이를 변증법적으로 갱신하며 또 다른 미래의 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함을, 단지 어떤 보여주기가 아닌 들여다보기로써 주체화의 가능성을 열 수 있음을 또한 호 루이 안의 작업이 아마도 예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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