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수연, 〈타고타고〉: 나와 대상과의 무한하고도 가까운 거리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5. 10. 28. 00:13

유수연의 〈타고타고〉는 미얀마 거리, 함박마을, 차이나타운의 순으로 인천 동구의 외국인 마을을 차례로 들르는 이동형 퍼포먼스인데, 각 세 장소에는 그곳 지역에 대응하는 세 명의 외국인―포툰(35, 미얀마), 구잘(70, 우즈베키스탄), 주희풍 역(50, 화교 3세대)―의 이야기를 담은 짧은 영상이 있고, 이는 이동 과정에서 개별 시청이 권장되지만 현장에서 임시 거점 장소에서 역시 상영되는데, 그 셋에 해당하는 “입자”―심창훈, 유은재, 홍서연―가 퍼포머로서 자리하지만, 발화로서 연장되거나 하지는 않으며, 그 결과, 영상이 마치 각자의 ‘그’의 시선을 체현하는 것처럼 그가 사는 지역의 풍경만을 비추듯, 그 입자 역시 풍경의 한 기호를 이루는 데 그친다. 따라서 서사는 현실의 차원을 추출하되 재현하거나 이후의 경로로 연장하지 않는다.
이 ‘풍경’ 역시 ‘그’의 시점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흔들리는, 조악하거나 투박한 영상 촬영의 그 시점은 실은 그 존재와 닿는 “파동” 곧 낯섦을 타자성으로 검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감각하는 나 자신의 파동이 반영된다는 것, 그 흐름을 따라간다는 것―긍정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타자를 분석하거나 파고드는 대신, 적당한 거리와 함께 그 ‘안온한’ 거리만큼의 나를 수용하는 태도로써 〈타고타고〉는 타자의 난제를 쉬이 풀어버리고자 하는데, 그럼에도 여기에는 그 장소에 머무는 절대적 시간이라는 경험을 요구한다.
〈타고타고〉에서 자신의 명명처럼 “이동형 리추얼 퍼포먼스”의 형식에서 방점이 찍히는 건 단연 ‘리추얼’인 것인데, 각 거점에 도착하기 전까지 세 지역을 거니는 건 매우 더딘 속도를 띤다. 지역과 지역을 이동하는 차량은 보통의 주행 속도를 유지하며, 차창 너머 풍경은 공연에 내속되는 건 아니다. 반면, 이 더딘 도보 이동은 어떤 목표도, 목적도, 의식도, 주어도, 화자도, 발화도, 정보도 없는데, 곧 이 밋밋하고 심심한 시간이 이 공연의 가장 주요한 절대적 매체다. 이 시간은 물론 관객 그리고 공연자, 관계자 이동하는 집단 모두에게 해당하는 시간인데, 그러니까 무언가를 보여준다기보다 그 안에 있음을 수행하는 것이 모두에게 당면한 과제가 된다.
이 떠다니는 입자들로서 연결되는 집단은 지역 내의 개별 주체의 서사를 미미한 움직임과 관계의 정동으로 바꾸는데, 움직임의 우태욱과 사운드의 타무라 료는 그 경계의 한 축을 이루는 배경적 기능을 한다. 가장 주요하게 공연 전반을 잠식하지만, 그것이 서사의 일면을 가시화하거나 고유한 역할로 정체화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이동의 표지이자 이 집단을 엮는 매개항에 가깝다. 아마 가장 긴 시간 걸었을 미얀마 거리 이후의 부평공원에서는 나뭇가지를 건네거나 메마른 잎사귀 표면이나 물 묻은 잎을 감촉하게 하거나 하는 관객과의 상호작용이 제일 많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이 풍경을 다소 증폭시켜 지각케 하는 부분으로, 이로써 퍼포머들은 가시화되기보다 이 풍경을 일정 부분 빌려옴으로써 매개하는 역할에 전적으로 머문다.
포툰 역의 심창훈은 미얀마 거리에서부터 몇몇 사물들에 온기를 쬐듯 두 손을 갖다 대는 행위를 반복하는데, 이는 그 자신의 지역을 벗어나는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가장 주요한 상징적 움직임으로 남게 된다. 그러니까 세 개의 영상은 각각 미얀마의 군부 쿠데타에 대한 저항으로서 시위, 이방인으로서 타국 내에서의 정착의 어려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화교와 같이 정치적 의제를 띠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유유하게 이 공간을 거니는 텅 빈 시간, 그리고 곁의 존재들이 구성하는 경계 막 같은 것의 감지된 의식 정도만이 있게 된다. 이에 따라 풍경 역시 결과적으로 그것이 가시화되기보다 그것을 입자들로 분해되고 너른 시간의 간격으로 형해화되는 것에 가까운데, 그렇다면 이 ‘리추얼’이라는 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요구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발적인 차원에서 순전하게 주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그 의도를 유일하게 짐작할 수 있는 건, 연출 유수연의 베를린에서 우연히 겪은 태풍에 대한 경험을 그래픽 영상으로 만든, 이동 전에 함께 본 영상에서, “내가 어딘가에서 내던져져, 소멸되었다고 느낀 순간 날 에워싼 주변 공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라는 문장이다. 주체의 비의식적인 차원에서 주요한 모티브는 이 점으로서 나의 무한하고도 형체 없는 유동적 여정에 대한 공연에서의 모티브가 되는데, 그것이 실제적으로는 이국에서의 삶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감정을 소환하기 위해 공연에서 다양한 외국들의 배경이 필요했던 것이라면, 곧 타자로서의 낭만적 이입이 일종의 여행객의 시점으로 연장됨으로써 어떤 리추얼적 순간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각 장소들은 절대적인 매체이면서도 기능적이고 부차적인 기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역을 다루기 위해서는 그것과의 간극을 안고 있는 주체의 분열과 우울 등이 그곳에 다가서고자 하는 합목적성에 대한 유인 너머로 징후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는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작품은 완벽하게 실패한 작품일 것이다.) 〈타고타고〉에서 나의 의식으로의 온전한 수렴으로부터 이 지역을 텅 비우는 의식은 이 확장된 멜랑콜리적 감응의 상태로써 나 자체를 보존하는 것에 가깝다. 〈타고타고〉가 다루는 지역이 인천이라기보다 어떤 특정한 장소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묶는 하나의 범주로서 인천임을 감안하더라도, 굳이 이 장소들이 들어와야 할 어떤 유인도 드러나지 않는다. 매개의 언어는 비워져 있다. 인천은 정보나 텍스트 등의 서사가 아닌, 이국적 풍경 자체로 남게 되는 듯 보인다.어떻게 보면 영상은 그에 대한 얼룩과도 같은데, 멜랑콜리한 풍경에의 그 감각이 텅 빈 시간과 장소로부터 연장되는 차원에서, 그것은 유일한, 예외적인 하나의 구심점이다, 곧 이동 중에 연주와 움직임이 그것이 아닌 차원에서. 그러니까 나의 내면을 전개하고 연장하는 적당한 거리와 시간이 소요될 수 있는, 그 환경 자체를 감각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이 영상의 시점은, 그리고 영상과 상관없는 곧 영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포툰을 제한 대역으로부터의 내레이션으로부터 다시 돌아가 그 음성으로부터 분리되는 불안정한/덜컹거리는 이 시점은, 이후의 고요하고 안정적인 내면으로 또는 밋밋하고 비어 있는 표면으로 보이는 리추얼이, 실은 어떤 알 수 없는 조각과의 희미하고도 풍부한, 희미하면서 풍부한 연결의 가능성을 매우 흐릿하고도 잠재된 차원으로 연장하려는 시도이며, 바로 그 지점에서 결정적인 표지로 이 영상이 부착되면서 비로소 이 리추얼이 유효해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이 영상이 갖는 의도적인 거리와 불완전함과 불충분함과 희미함을 연장하고 체현하고 추적하고 접촉하는 과정이 이 리추얼의 시간이라면, 대상을 하염없이 맴돌고 있는 이 영상들과 같이 이동의 여정은 일종의 멜랑콜리적 감수성에 젖어 있는 것과 같다. 부재하는 대상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더듬어 가는 것과도 같다. ‘리추얼’이라는 말은 그것을 봉쇄하고 방어하는 포장의 기제이며, 더 치열하고도 첨예하게 타자를 좇아 그를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하기 전에 멈추는, 유약한 주체의 단호한 포기와 선택의 일환을 은폐하기 위한 구실이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인 이동의 여정으로 다시 돌아오면, 앞선 알 수 없던 희미한 연결의 순간이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표상하거나 재현하거나 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떤 역할로 정체화되는 것 역시 아닌데, 이 같은 건넴/건네어짐의 순간은 입자가 파동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점으로 연결되는 순간에 대한 기약이다. 곧 하나의 원만이 존재하던 최초의 시점을 상상하는 처음 영상의 내러티브로부터 세 개의 지역을 하나의 원으로 잇기/정의하기 위해 그 이동의 순간을 비워둔 것과 같이, 처음과 마지막을 제하고는 일정한 속도와 호흡으로 모든 구간을 평탄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이 세 개의 지역은 구분될 뿐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상상되고자 한다.
〈타고타고〉는 커다란 포대로부터 연결된 조명꾸러미를 꺼내는 우태욱의 퍼포먼스로부터 시작해, 출발 직전 자신과 닮은 사물에 이름표를 붙인 사물, 이후 중간에서 건네주고 건네받으며 끊임없이 교환의 회로 안에 있던 사물을 포대 안에 담으며 끝나는데, 이 주어 없는, 아니 혼동되고 뒤섞인 주어들의 교환만이 있는 세계에서, 모든 대화가 평어로 진행되는 방식은 공연을 수행하고 연기한다는 감각을 관객에게까지 주는 부분인데, 그것은 최종적으로 퍼포머-관객의 이분법적 도식을 깨뜨리는 전복적 행위라기보다는 퍼포머-관객의 모호한 존재를 합리화하는 주술적 의식에 가깝다. 곧 〈타고타고〉는 지나치게 모든 것이 이완되는데, 치열하고 바삐 움직이는 스태프도,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공연자도, 그것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는 관객도 부재하는 상황이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영상에서의 약간의 장소-존재의 재료가 일정 부분 묻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심각한 직무 유기가 아닐까에 대한 의구심은 무화되는 의식을 붙잡으려는 하나의 성찰적 초점과도 같은데, 그것이 유래하는 텅 빔과 느슨함과 공연자와 관객의 격의, 경계 없는 시간의 지점이 이동형 공연의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시대적 징환의 차원에서 개체의 독립과 자존의 차원을 반영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면, 〈타고타고〉가 그런 바뀐 패러다임에 자연스럽게 탑승하는 것이라면, 그와 동시에 역사와 타자의 무거운 형상을 견디거나 방어하기보다 흘려보내는 가운데 나를 희생하거나 감축하거나 나아가 잃지 않는 것이라면, 공연의 질적 완성보다는 개개인의 복지와 평안이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함이 실천되는 것이 맞는다면, 앞선 의구심 역시 개인적인 차원의 증상을 반영하는 것일 텐데, 그것은 완성도, 메시지, 주제의식, 스펙터클, 서사, 표현의 질적 강도 모두가 부재하거나 흐릿한 작업에서 여전히 기존의 예술 윤리와 형상에 맞추어 그것을 보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따라서 이 공연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타고타고〉를 기술하는 최상의 이론은 정동의 양상으로 공연을 보는 것일 텐데, 그것이 강조된 부평공원에서의 시간에서, 정동이 감정과 인식, 감각과 사유와는 다른 무엇임이 감지되었으리라 보인다.김민관 편집장
728x90반응형'REVIEW > Interdisciplinary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 연주(자)의 신체적 자율성과 타동적 신체의 사이에서 (2) 2025.08.20 김신록×손현선, 〈없는 시간〉: 불순물, 오차, 수행, 유행하는 것 등의 이름 (1) 2024.10.18 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 음악과 움직임은 어떻게 맞물리는가, 또는 그렇게 보이는가 (0) 2022.02.16 〈사리와 메테인〉(작/연출: 진나래 ), 어떤 번역의 지층들 (0) 2022.01.14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 극장에 대한 다섯 작가의 주석 (0) 2017.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