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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 연주(자)의 신체적 자율성과 타동적 신체의 사이에서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5. 8. 20. 23:06
음악동인고물, 〈꼭두각시〉[사진 제공=음악동인고물](이하 상동). 〈꼭두각시〉는 음악동인고물(장구_정준규, 해금_소명진, 대금_고진호, 피리_배승빈, 25현금_홍예진)과 고블린파티(이연주, 임성은, 지경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작업으로, 이는 전자의 음악과 후자의 무용으로 대별되는 두 장르/매체의 집단이 서로의 그것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가능해진다. 이 참여의 감각은 무용을 초대한 음악에 더 방점이 찍히며, 이 둘의 접점은 시작과 동시에 길게 음위전환(metathesis)의 법칙을 따라 자의적인 조합을 반복해서 이루며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제목 ‘꼭두각시’와 같이 신체를 저당잡히며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서사에 의해 고안된다. 곧 음악과 무용의 접점은 무엇보다 신체적인 양상으로 발현되는데, 꼭두각시의 몸짓을 체현하는 음악동인고물, 반대로 음악동인고물의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고블린파티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전자의 차원에서 발현된다.
연주의 몸짓 역시 사실은 신체적이며, 신체의 자율성이 음악의 자의성을 도출해 내는 음악의 실험적 계보 역시 존재한다―이는 (새삼) 발견적이고 인지적인 무엇으로 드러난다. 반면, 〈꼭두각시〉에는 악기를 다루지 않는 이들이 곧 비음악적인 존재 집단이 연주자들의 신체를 지배하는 역량을 갖는다는 서사적 지침에 의해 이들을 춤추게끔 한다. 결과적으로는 연주를 하는 이들 역시 무용수가 된다.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이면서 무용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이들이라는 전문성의 척도는 무용에 있어 시험의 경계가 된다. 반대로 음악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이들이면서 무용을 전문적으로 하는 이들 역시 연주자가 되는데, 이는 거의 반쯤만 그러하다는 점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여기서 주도적인 몸짓의 특질은, 곧 신체의 (비연주적) 몸짓에서, 그리고 연주의 몸짓에서 꼭두각시, 일종의 마리오네트―고블린파티가 해골을 들고 이를 인형 조종수의 위치에서 조정하듯 이는 단순한 유비가 아니다.―와 같은 존재로서 그 춤은 어색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어색함으로서 춤과 춤의 어색함은 근본적으로 다룬 차원인데, 따라서 첫 장면에서 먼저 홀로 등장한 음악동인고물이 악기와 결착된 채 무대 오른쪽을 점유하는 기본적인 설정 값이 대체로 유지되며, 그럼으로써 그것을 벗어났을 때 연주자라는 정체성을 탈각하는 예외적인 것임으로 드러나는, 그 기본적인 연주자로서 전문성과 비무용가로서의 비전문성이 주술 걸린 신체의 서사 안에 기입될 수 있게 된다.이는 연주를 할 때 역시 적용되지만, 연주를 어색하게 하면서 그 음악 자체가 어색한 무엇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연주를 하지 않을 때의 어색함을 발현하는 몸짓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중요한 초점은 기실 그 몸짓의 어색함이 음악의 특이함으로 어떻게 변환되는지의 차원에서의 어색함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연주는 단지 어색함을 덧씌운 것 아닐까, 그것이 온전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어쩌면 스타카토 같은 접촉과 해제의 끊임없는 분기의 반복으로 점철되는 것 같은 음악은 제어와 상실, 의지와 비의지의 신체가 산출할 수 있는 어떤 최대치를 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곧 꼭두각시의 음악으로서.
물론 어색함으로서 몸짓과 몸짓의 어색함은 다르며, 전자가 후자로 연장될 때의 지점이 〈꼭두각시〉에서 꼭두각시, 곧 마리오네트의 서사라는 내용과 협업의 차원이라는 실질을 봉합하면서 그 솔기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곧 협업은 하나의 형식이며, 서사는 그것을 봉합하고 은폐하며 은밀히 지시하는 기술이 된다. 그리고 이 협업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고블린파티로부터가 아닌, 음악동인고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실질적인 시작은 고블린파티로부터가 되는데, 주술 걸린 신체, 수동성의 신체를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로 수용하는 주체가 음악동인고물이기 때문이다. 곧 어색한 몸짓을 가장한 몸짓의 어색함까지도 감수하는 어떤 태도를 보여준다.
〈꼭두각시〉가 마리오네트 신체를 그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추동하는 건 실은 음악일 것이다. 그렇지만 〈꼭두각시〉는 그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 주술에 걸려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건 도깨비 같은 존재들, 고블린파티인데, 이들이 연주자를 끌어들여 마리오네트의 몸짓을 그들에게 전가하다, 음악의 힘에 그들 역시 전염되어 마리오네트처럼 동반 연주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둘의 지위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로부터 협업에 대한 이상이 보이지 않는 서사의 끝을 대신하고 있을 것이다.〈꼭두각시〉는 음악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음악극이 그 음악을 채우는 형식을 다른 매체나 장르에서 추출한다면, 〈꼭두각시〉는 그렇지 않은데, 따라서 여기서 협업은 더 본질적으로 음악에 의존하고 또 음악에 충실하다. 곧 〈꼭두각시〉의 음악의 서사는 음악가(연주자)의 (비)서사이기도 한데, 그것이 진정 음악으로 환원되는 지점은 어색함, 아니 다른 몸짓이 다른 음악을 만들 수 있느냐의 차원에서 〈꼭두각시〉를 볼 수 있느냐의 차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반면, ‘무용수’들은 연주자의 신체를 침탈하고 지배하는 타자로 자리하며 연주자의 본래적 신체를 현실로 승인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오직 그 바깥에서만 순전히 자리한다는 점에서, 서사를 충실히 체현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무용수의 지위 역시 은폐된다는 점에서,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시 음악극의 한 양식으로 돌아와서, 〈꼭두각시〉가 음악이 아닌 음악극이라는 것에서, 음악의 내재적인 차원의 실험은 다른 양상에서 실천된다는 것을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협업이 가진 딜레마, 다른 매체를 전유할 때의 어색함과 어색함으로서의 표현 양식을 구가하는 것의 차이가 중첩되는 지점을 기꺼이 〈꼭두각시〉가 선택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표제 음악의 적나라한 버전을 보여주는 듯한 ‘꼭-두-각-시’의 음절들을 임의로 헤집어 내는 무한 실천의 시작은 꼭두각시의 서사를 오히려 피상적인 것, 동시에 절대적인 것으로 연장하는 측면을 앞서 드러낸다. 그럼에도 음악은 꼭두각시의 파생된 서사를 가져오는데, 이는 “귀 먹어서 삼년”과 같이 시집살이에서 극단적으로 수동적 양태를 띠는 며느리의 위치를 발화함으로써 그러하다. 표제 음악에서 배경 음악 혹은 인용의 참조 체계를 따르는 음악으로의 전환에서, 전자가 자기 지시적인 차원에서 내용적 산출을 지정하지 않는 데 반해, 오히려 무한한 꼭두각시에 대한 서사의 가능성을 잠재하는 것에 그치는 데 반해, 후자는 정확한 컨텍스트로 분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갖는 그 내용적 산출이 바깥에 대한 표현과 어떤 연관을 맺을지에 대해 불확실해 보인다. 곧 〈꼭두각시〉의 움직임의 양태로서 전개되는, 연주와 연주자를 그 형식 안에 포섭하는 과정이 일종의 서사를 이루는 가운데, 호출되는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서사의 형식은 단지 언어적 공간에서 고립되는 듯 보인다.〈꼭두각시〉의 본질적 서사는 음악의 자율성의 기준 아래 놓인다. 음악의 자율성이 바깥의 매개에 의해 전염되고 피탈되고 동참하게 되는 신체의 비자율성이 보여주는 또 다른 움직임의 표현 역량과 그 서사의 차원 아래 제한되고 굴절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서사이다. 연주자들 주변에 서성거리다 어느덧 연주자의 자리를 이탈해 허공에서 헛손질을 하는 마리오네트의 몸을 갖게 만드는 도깨비 같은 존재들이 해골 인형을 가져와 놀고 그것에 연주자의 몸짓이 조응하며, 주술 걸린 신체가 구성되고, 휘파람과 함께 숲속에 온 것 같은 감각 아래 연주자와 도깨비가 반절씩 연주의 몸을 나눠 갖고―장구를 한쪽씩 치거나 해금을 켜는 신체를 뒤에서 안고 한 몸처럼 연주를 하는―, 모두가 해골을 중심으로 뒤엉키며 공동의 무대가 만들어지고, 해골이 단지 연주자를 표상하는 것에서 벗어나, 일종의 준-매개 작용, 준-신체로의 전이―연주자와 뒤엉켜 연주를 하고―를 실행하기도 한다.
‘꼭두각시’의 음위전환의 양태는 커튼콜의 신호로서 〈꼭두각시〉의 수미쌍관의 구조를 완성한다. 신체의 강탈당함은 사실 연주의 자율성의 역량을 시험하는 것에 상응한다. 반면 주술 걸린, 물리적으로 조종당하는 신체 양상이 연주의 다른 신체성 자체를 발현하는 것인지는 의문인데, 곧 음악의 무작위성과 단조의 단속적인 차원에서 주로 전개되는 긴장 어린 음악―음악적 긴장과는 역시 다른 부분이다.―의 〈꼭두각시〉의 실제 양상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음악 위에 일종의 연기 행위가 덧붙고, 그 연기 행위는 음악의 비전개적 전개의 양상과 물리적인 상관관계를 맺지만, 이는 중간 단계에서의 교류이다. 곧 음악의 다른 가능성보다는 음악의 제한된 가능성의 실천을 만드는 교환이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행위는 음악을 전적으로, 직접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또 제한하며 변경시키는 것 아닐까. 행위는 음악에 부착되는 것이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음악을 직접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꼭두각시의 움직임과 음악이 같은 평면 아래 있지만, 음악가의 의식은 꼭두각시의 수동성으로부터 실제 고양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이.〈꼭두각시〉는 음악(가)의 실험이며, 이 실험은 연주자의 고정된 지위를 입체적인 양상으로, 다른 역할로, 다른 장르와 표현에 대한 차원으로 변경하며 나아가는 것에 있다. 그것은 물론 어색함을 주고 이 어색함만큼이나 무모함, 대담함, 또한 그만큼의 신선함과 새로움을 준다. 〈꼭두각시〉에서 기이할 만큼 음악은 신체의 분절들로, 다양한 표현의 양상으로 전이되어 드러나는데, 곧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 드러나지도 각인되지도 않는데, 이는 결국 행위로서 음악, 연주의 성취를 구성하는 것은 아닐까. 그 결과, 음악의 실험성이 아닌 무용 음악으로의 실천을 향하는 음악의 또 다른 기능과 그 성취로서 〈꼭두각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2022년 상연되었고, 그 당시의 모습 거의 그대로 이번에도 상연되었다고 보인다. 음악동인고물은 멤버 그대로이고, 고블린파티에서는 임진호(이번에는 안무로 참여했다.) 대신에 지경민이 출연했다는 사실만 예외로 보인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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