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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폴터가이스트〉: (외)화면을 벗어난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26. 1. 18. 23:11

〈그린 폴터가이스트〉. (왼쪽부터) 성욱제, 심민섭, 안지현 배우. 〈그린 폴터가이스트〉는 녹색 크로마키 전신 수트를 입은 배우(심민섭)의 등장으로 제4의 벽을 깨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그가 한결같이 포문을 여는 말은 “원래대로라면…”으로, 그에 따르면 이것은 영화였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영화로 구현되기 전의 촬영 현장으로, 영화를 선취할 일부로, 원래대로라면 볼 수 없는 것, 새로운 이미지가 덧대어지며 지워져야 할 것들이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것은 미래로의 가능성의 목적 아래 있는 잠재적 영역으로, 그것이 드러날 때, 곧 시각적 불가능성이 전도될 때 그것에 대한 본래의 통제 영역을 잔여의 초과된 실재가 가로지르기 때문에, 이곳은 불필요한 것―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서 관음증적 영역―(일반적으로) 볼 수 없는 것―으로 뒤집힌다. 그것이 곧 ‘원래대로라면’ 아니었을 것이라는 미래로 소급되는 현재의 부인이다. 즉 이 크로마키 배우의 발화는 초재적 영역으로서 환상, 거대하고 스펙터클한 동시에 솔기 없는 매끄러운 이미지로의 환상을 약속하는 대타자의 목소리를 부인으로써 완수하고자 한다.
〈그린 폴터가이스트〉에서 관객이 보는 건 명확한데, 그것은 영화로도 연극으로도 완성될 수 없는 파편, 부스러기들의 끝없는 나열이다. 제4의 벽은 완전한 이미지의 성취에 대한 실패를 의미하며, 그것을 봉합하는 과정에서 관객과의 합의를 종용하기 위해 열리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는 거꾸로 본래적인 차원에서 그러한 이미지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을 은폐하기 위한 제안이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부인은 정확하게는 변명이며 도착하지 않을 미래로의 무한한 유예의 시간을 가설하는 것과 같은데, 이 안에서 그는 그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이 지닌 보족의 차원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와의 간극으로서 실재하는 텅 빈 형식 그것이 지닌 충만함 자체로서 존재한다.
그의 디에게시스는 서사의 내용을 재현하기보다 그 이미지적 서사와의 간극으로서 잔여를 지시하는 차원으로 환원된다. 그것은 부재하는 이미지, 내용 차원의 이행을 가져오지 않는 무의미한 신체의 양립으로서 순수 형식이다. 그것은 영화와 다른 일종의 연극이 지닌 고정된 배경 위의 유일한 형상이지만 단지 불투명할 뿐이다. 어쩌면 이 크로마키 환경 자체가 연극적 무대로서 존재하는데, 거기에는 오직 순수한 연기만이 사라지기 위해 임시적으로 현존하기 때문이다.
김희주 배우. 반면, 유일하게 평상복을 입은 연극배우(김희주)는 자신이 무대에서 연기할 권리를 주장하며 마지막 독백의 대사를 펼쳐놓기 시작하는데 그는 CG로 지워질 수 없는 존재로, 외부의 강압적 행위에 의해 저지당하고 쫓겨나야 한다. 이때 연극에서의 실재적 현존과 유예되는 정보 값으로서 가상의 현존이 관계를 맺는 예외적 순간이 발생하는데, 이 관계는 지워지는 존재와 지워질 것을 통고받은 존재 간에 발생하는 〈그린 폴터가이스트〉의 유일한 관계이기도 하다.
다른 배우들이 모니터 스크린과 관계를 맺는다면, 주인공은 스크린과 관객과 동시에 관계를 맺으며 연극배우는 관객과만 관계를 맺는다. 이때 이 환경을 반전시키는 여자는 스크린에서는 뚜렷한, 투명한 오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가 선보이는 연기는 오로지 현재의 무대 위에서만 조응되는 것으로, 그로부터 단지 언술이 그것을 배반하지 않고 희곡의 대사를 그대로 변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무대의 이미지가 가정되지 않은, 더 정확히는 그것들을 모두 지운 이 통제된 환경 아래에서는, 그것들은 순수한 말의 내용으로서 그 바깥의 불투명함을 오히려 명확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형식으로만 남게 되는데, 이 소용없는 또는 부적합한 메모리는 마치 ‘유령’처럼 무대를 떠돌며 이따금 돌출하는 잔여가 된다. 여기서 여자의 대사가 일관된 하나의 패턴으로 고정되며, 그의 원래 연극 속 역할의 대사가 시작되고 곧이어 그가 저지당하며 끌려나간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가 항의의 제스처로 포문을 열 때 그것은 현장을 가리키지만, 이어 홀로 연극을 세우려는 행위는 불온하기보다는 부적합한 것이 된다. 주인공이 이미지와 현재의 간극의 경계에서 이미지를 기술함으로써 실패한 이미지 더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라면, 연극배우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하기보다 철저하게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함에 맞서 역할로 소급되고자 하는데, 이는 무대를 되찾는 것도 전유하는 것도 아닌 방식이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이곳을 기이한 곳으로 여기지 않는 다른 모든 존재와 동등한 역할을 수행한다, 다만 투명한 상태로 말이다.
그가 보여주는 건 곧 연극에는 또 다른 현존이라는 것, 유예되거나 가상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현존이라는 건 없다는 것이다. 단일 차원의 오직 지금 여기만이 존재할 뿐인데, 이때 그의 연기는 그것이 무대와 현동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오직 과거로만 소급되게 된다. 그것은 변환 불가능한 것이며, 공고한 문자적 텍스트에 대한 전제와 의존, 강박을 가시화한다. 그의 저항은 부당함에 대한 명목을 띠지만, 실제로는 공고한 매체에 정박된 신체의 간극 자체일 뿐이다.
심민섭 배우. 나머지 역할들은 하드보드지 패널에 적힌 영화의 익숙한 선전 문구들을 들고 등장하는 것에서 시작해, 점차 유명한 고전 영화들의 역할들을 연기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전자가 그 선전 문구의 핍진성과 영화의 작위적인 감축을 동시에 드러내는 와중에, 배우들의 철저한 기능적 차원의 소비에 대한 탈비판적 차원은 그들의 미소 띤 표정에서 결정된다. 곧 엑스트라의 미천한 신분에 대한 체화됨이 일종의 서비스 차원에서의 연기라는 현장의 잔여로 전이되어 부각된다. 그들에게 이는 패널이 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패널을 든 하나의 역할을 맡은 것뿐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과도하게 연기한다. 그리고 스크린을 통제하는 편집자의 시야에 들어오고자 ‘블러’ 처리라는 결과에 얽매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린 폴터가이스트〉가 보여주는 건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라 그 전의 빗나간 현존으로, 이는 주인공-연극배우-엑스트라 모두에 해당한다. 엑스트라는 왜 영화들의 장면을 복기하는가. 그들은 주인공의 실패를 기술하는 무의미한 시간에 자신들을 오디션의 배우로 드러내는 것인데, 그것들은 변용의 절차를 거쳐 그 영화의 이미지가 될 수 있다는 어떤 믿음을 동반한다. 그러한 믿음은 이곳이 연극 무대여야 한다는 연극배우의 생략된 무대에서의 안간힘과 조응하는데, 연극배우가 이 현장을 부정한다면, 그들은 이 현장의 또 다른 변용 가능성과 미래의 유예된 기회의 가능성을 믿고자 한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이 엑스트라는 입만 벙긋거리며 그 역할을 재현하는 가운데 스스로에게 편집을 가하는데, 말하지 않음의 비가시화 전략과 들리지 않음의 은폐된 기제 사이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그린 폴터가이스트〉에서 청각적인 부분은 근본적으로 비어 있는데, 그것은 시각 처리 환경에서는 편집의 예외적 영역으로 불가능한 영역으로 전제된다, 더 정확히는 배제된다. 그리고 이 배제는 예외적인 말의 권리를 얻은 두 존재의 말이 모두 이미지에 대한 어떤 주도권도 실은 행사하지 않는, 불필요하거나 부적합한 차원으로만 제시되고 있음―이미지의 바깥에 있는―에서, 단지 청각적 차원이 굴절된 차원으로만 강조될 뿐이라는 사실에 상응한다
주인공이 10분의 인터미션을 선언하고 소파에 누울 때, 그 무대 중앙부에 모로 놓인 소파로부터 일정한 축을 이루는 것으로 가시권의 영역이 재조정되는데, 이때 화면으로 다른 모든 것이 수렴된다. 어둠 속에서 붉은색으로 딴 소파의 ‘누끼(抜き)’ 아래, 다른 존재들이 슬며시 침투하는데, 이로써 전면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의 형상들―소리 없음의 효과로 강조되는 건 그 소리 자체의 최종적 귀결이다.―로서 ‘시끄러운 유령(Poltergeist)’이었던 그들은 움직임을 감축함으로써 동시에 그 소리 역시 진정으로 덜어내고 비가시화한다.
이때 은밀하게 누끼로 딴 잔여의 신체 조각으로 그들은 소파 위에 덧붙는데, 어둠으로 조정된 색의 밝기와 은은한 그 형체가 화면 내외부에 모두 잔상으로 남을 때 아마도 그것은 진정한 유령적인 것에 가까워지는 듯 보이는데, 통제되지 않는 동시에 표현되지 않고자 하는 부분이 그로써 의도치 않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율적인 비의도성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어둠 속에서 주인공의 그림자가 벽면에 비치는 장면에서 증폭된다. 초록색의 매끈한 평면에의 지향은 심도를 갖춘 공간에서의 신체가 지닌 실재성을 조각하는 것으로 전도된다.
〈그린 폴터가이스트〉의 변용적 역량은, 자유자재의 표현의 권능은 모니터가 아닌 또 다른 커다란 스크린 속 영상들의 이행에서 오는데, 기제작된 영화나 영상 푸티지는 모핑 효과에 의한 새로운 신체의 끊임없는 합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슈퍼 히어로 계열을 김일성-트럼프 계열과 같이, 현실로 연장하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내용과 메시지를 떠나 이미지 변용과 상상에 대한 무한한 자유로움에 대한 메시지로만 자리한다.
〈그린 폴터가이스트〉의 후반 이 스크린을 위한 연습 혹은 주창이 기존의 이미지의 힘을. 빌리고 있음이 드러난다면, 연습 장면과 그것에 상응하는 이미지의 잠재태적 차원은 무대 이전의 실재의 시간을 기입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미래에 기약하는 이미지를 과거의 이미지를 빌려 선취하는 셈이다. 이는 시뮬레이션을 향한 움직임과 그 움직임을 다시 시뮬레이션하는 용도로 편집된 영상의 교차 편집으로 나타나며,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 둘의 순서는 시간적으로는 더는 의미가 없다.
다만 이때 신체는 유한하며 하나의 신체로 닫혀 있다면, 편집상의 신체는 무한한 열림으로서 한없이 유연하다는 점에서의 차이를 보이는데, 이 둘의 비교 안에서, 신체는 시뮬레이션 이외의 어떤 자율성도 없음을 가시화한다는 지점에서 명확하다면, 반대로 이미지는 모든 신체를 구현 가능한 지점에서 어떤 고유한 내용으로도 확정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환원론적이다.
이 둘이 하나로 묶이는 지점이 곧 〈그린 폴터가이스트〉의 변용에 대한 열망과 모방, 재현과 그 한계의 차원이 거울 쌍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분명함과 불완전함은 각각 유연함과 불확실성의 차원과 맞물리며 초록 무대에서 바뀌는 건 실은 없다. 크로마키 의상에 누끼만큼 깎여 나가지만, 그 대비로부터 드러나는 건 실재의 깎여 나가지 않은 초라함이다. 따라서 〈그린 폴터가이스트〉가 이미지의 실제적 힘에 기초해 무언가를 새로 쓰는 건 없다. 곧 변용의 전 단계로서 그 미완성의 세계가 실재의 흔적임을 보여주는 지점에 〈그린 폴터가이스트〉가 머문다.
그다음으로 유예되며 축적되는 주인공의 “다음 행복한 장면”의 리스트는 ‘원래대로라면’ 가능했을지 모를 스펙터클로의 상상력을 구현하는 이미지에 대한 편집적 역량의 힘을 구성한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읊조림은 텅 빈 형식을 채우는 메아리와 같은 매질로 끊임없이 귀환하는 연극배우의 고착된 마지막 대사의 반복과 유사해지는데,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더 이상 스크린과의 관련을 맺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
곧 모니터로 그의 말이 반영되지 않는 가운데, 그의 말이 일차원적인 무대의 상연으로 매개되면서, 그는 순전한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착오를 일으키고 모든 역량을 소유한 주인공에 대한 맹신과 함께 자신이 “주인공”과 “관객” 모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다시 등장한 연극배우야말로 진정한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데, 자신의 연기가 “당신의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될 거예요.”와 같이, 연극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지울 수 있음에서 출발하는 아니라, 애초에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기억의 차원에서만 비로소 소멸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동시에 편집의 힘이 영화의 과정에 전적으로 있는 게 아니라 결국 관객의 차원에서 그것이 주어짐을 의미한다. 주인공이 편집의 힘이 부재하는 자리에서 무모하게 비약을 감행하며 한없이 우스꽝스러워진다면, 연극배우는 현존하는 몸이 말하는 궁극의 요소가 곧 이 순간에만 존재함을 이야기하며 매체의 순수성을 주장하며 현존의 몸의 형식과 현존이라는 지시적 내용을 합치시키기에 이른다.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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