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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진 작·연출,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 혁명의 정동, 그리고 욕망으로의 하강REVIEW/Theater 2026. 2. 4. 21:51

이오진 작·연출,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이하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1막과 2막이 절합되어 있는데, 1막이 각 배우들의 자전적 이야기에 입각한 수행성을 띤 발화들이 교차한다면, 2막은 가상의 시점에서 이들이 하나의 삶을 이루는 연극적 상황으로 전개된다. 1막이 강렬한 정동의 소실점을 향해 다양한 음악의 힘을 난사한다면, 2막은 상속 재산의 나눔이라는 공동의 의제 속에 개체들을 분화시킨다. 여기서 여성의 공동의 연대라는 이념은 1막의 “어떤 여자들”로 묶이는 차이의 집합을 개체들의 코러스로서 연장하며 승화되는데, 2막은 이러한 이념을 현실로 떨어뜨려 돈을 경유한 가장 지질하고도 구체적인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시험’한다.
1막이 순수하게 육박하는 매니페스토의 형태를 띤다면, 2막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갈라지는 차원에서 그 연대를 해체시키는데, 이때 갈등은 그 같은 미션이 애초부터 단지 상상적인 차원에서 주어진 허구에 입각한다는 점과 같이, 허망한 것으로 급격하게 분쇄되어 버리면서, 도덕적 교훈을 안기고서 역시 상상적으로 봉합된다는 점에서, 2막의 성격을 진단할 수 있다. 여기서 진짜 심문은 이들의 주체적 윤리를 향하는 대신 터무니없는 공상의 차원을 향하며―‘당신들은 이제 달콤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이들을 윤리적 주체로 매듭짓는 대신, 더 나은 삶의 미래를 욕망하는 보통의 이들로 환원한다.
따라서 도덕적 교훈의 적용은 이들이 도덕적이지 않았던 순간에 대한 반성에 있지 않고, 이들의 욕망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상속 재산의 공유는 이들을 해체하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데, 그것은 법이 선취한 ‘사회적 가족’이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또 다른 법의 선취로서 더 친밀한 가족 구성원으로서 특화되는 ‘생활동반자’와 겨루며 갈등이 잠재되는데, 여기서 ‘사회적 가족’의 통합을 이루는 건, 이 서사가 전형적인 꿈의 그것을 가장하기 때문이다.
은희의 불호령으로, 일종의 그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등장으로 갈등이 봉합되는데, 곧 꿈의 차원으로 현실이 그치게 되는데, 이는 각자의 꿈에 등장한 은희로부터 자신의 상속권의 우위를 확신하는 이들이 은희라는 공통의 꿈을 통해 각자의 꿈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은희의 진짜 의의는 더 큰 시간의 차원에서 이 ‘사회’가 하나의 형상으로 확장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기원의 재확인이기도 한데, 갈등의 요소로 전화된 유림의 죽음을 연대의 계기로 전화된 은희의 죽음이라는 기원으로 소급시켜 이 ‘사회’의 출발점을 상징화하는 것으로서, 여성의 공동의 연대라는 이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유림의 죽음이 재산으로 곧장 치환되는 엄밀한 자본주의적 질서를, 순전한 존재의 양립 차원에서 구성되는 사회, 곧 연대의 이념을 순수하게 구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로써 일시적으로나마 형성되는 사회에는 유림에 대한, 대진의 더 특정한 유대감과 화정의 더 특별한 친밀함 모두 사적 경험의 차원으로 다만 통합된다. 또는 그것이 법적 권리로 연장되는 게 아니라 개인 차원의 기억으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봉합된다.여성의 공동의 연대라는 이념은 은희의 일종의 사회에 대한 통합 서사를 경유해, 갈등이 더 나은 사회로의 통합에 이르는 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긍정적 차원에서 재정의되는 과정에서, 곧 갈등은 필연적이며 예측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더 단단한 공동의 형질을 이루기 위한 거름 같은 것이라는 점에서, 2막은 1막을 향해, 연대의 현실적 경로에서 그것의 갈등을 예측하고 모의 실험을 경유해 예방 주사를 놓는 기능적 차원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종의 계몽적 차원의 효과가 의도하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욕망의 덧없음을 깨닫는 게 아니라 욕망을 포기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켜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갈등의 봉합은 갈등의 해소 자체에 목적이 있는 대신에, 모두의 욕망이 안정화되는 데 있다. 그것은 외부의 법적 절차를 경유하지 않고 따라서 아마도 그로 인해 서로가 서로에 대한 타인이 되지 않고, 내부의 정언명령을 따라 불복 없는 수용으로써 공동의 삶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은 할머니 영정 사진의 알레고리로서 놓이는, 한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벌받듯 무릎에 댄 두 손이 꼿꼿하게 펼쳐져 굳어 있는, 할머니 은희로부터 나온다.
공교롭게도 1막에서 고3 시절, 자기의 갇힌 삶에 대한 인식을 홀로 집에 있을 할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확장시키던 순미가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영정 사진이 원래 할머니를 그린 그림에서 한복을 합성한 사진으로 바뀌며 할머니에게 부여되는 응당한 상의 부자연스러움의 미감과 그에 따른 고유한 할머니의 취향에 대한 왜곡, 그리고 그러한 제도에 대해 쓺쓸함을 뱉어내던 장면에서, ‘어울리지 않을’ 한복을 입은 할머니의 상이 마침내 현현된 것이다. 그리고 은희의 어정쩡하고 부자유한 몸짓은 그런 강제의 몫을 가시화한다.
새끼줄로 장식들을 매단 성황당이 경계에 있는 무대 설치에서, 사실상 은희의 말은 법적 판결을 선취하는 것이면서도 일종의 예언적 차원에서 영험함과 신성함의 효과를 수반하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일종의 공동이 꾸는 꿈에 나타난 죽은 존재의 말이 현실적 효력을 갖게 되는 것, 곧 수행적 발화 자체가 되는 것에서 말이다. 곧 그와 같은 공통 감각이 통용되는 차원에서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유대 공동체의 삶을 소환하는데, 이때 은희의 법적 산출의 선취―그래서 이 말을 따를 수 있다는 것―보다 그 말 자체의 매체적 차원, 그것이 곧 집단 무의식의 꿈으로 출현한다는 것이 실은 더 결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은희의 목소리는 개별 차원의 욕망에 접근하면서 그것을 조율하는 차원에서 개별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인데―그에 비해 개별자들 사이의 갈등은 단순한 불화에 가깝다.―, 그것은 사회적 가족이라는 이념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곧 〈히스테리 앵자이어티〉에서 ‘사회적 가족’을 설정하는 법은 현실에 앞선 이상의 한 형식이며, 현재에 아직 성취하지 못한 이념으로서 간극을 계몽의 태도로써 선취해야 한다. 2막은 곧 개인의 욕망들이 윤리로 연장되기 전, 또는 서툰 개인들의 욕망이 윤리로 자리 잡기 전의 공백이다.
따라서 개체들의 사사로운 꿈과 더 큰 사회로의 통합으로서 정치적 목소리는 실은 대립하기보다 후자를 경유해 전자가 해소되는 데 가까운데, 이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선취해서 개인의 권리가 공동체의 유대 안에서 구제되는 ‘염원’이 투영된 것과 같다. 이는 앞선 욕망의 철회에 대한 두려움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돈과 그로 인해 충당되는 안정감이 행복에 대한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이며 동시에 절대적인 전제 조건이라는 사실과 맞세운다면, 그 둘이 결정적으로 분기하는 지점은 무엇일까.
〈히스테리 앵자이어티〉의 2막은 그 공동체적 삶의 운용의 실천적 사례가 아니라 실험적 예시를 선취하지만, 자본주의적 욕망과 공동체를 향한 주체의 윤리 차원을 명확하게 세공하여 분별하지는 않는다. 아니 그 둘 다를 모호하게 다룬다고도 보이는데, 따라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격의 은희의 사자후는 자본주의적 삶, 그 태도, 제도 자체를 변혁하지 못하는 현재 삶이 고스란히 연장된 차원―미래의 상은 두 가지 법과 이들의 특이한 삶의 형식을 제한다면, 현재에서 몇 배쯤 오른 물가의 단면이 보여주는 경이 자체로 수렴된다.―에서 ‘할머니’라는 관념으로부터 하나의 신비를 추출해 내는 것으로써 이 모든 걸 봉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2막의 서사는 결과적으로 욕망의 절제를 부르짖기보다 욕망‘들’을 적절하게 수용하는 타협의 기술에 가까워 보인다. 주체의 차원은 오히려 ‘사회적 가족법’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예외적 존재에게서 체현되고, 이는 구체적으로 입증되는 대신 숭고한 몫의 잔여로 승계될 뿐인데, 여기에는 차별금지법이 일단락되지 않은 현재의 시점에서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염원, 투쟁의 실제적인 몫들을 고귀한 것 그리하여 예외적인 것으로 수렴시켜야 하는 비약이 전제된다.
곧 현실의 지난함, 그리고 그 반대 차원에서의 무한한 현실의 정동이 기념비적 차원과 숭고한 희생의 몫을 빌려 그야말로 과잉된 차원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궁극적으로 사회의 구체적인 계급과 상황, 곧 마르크스주의적 사회공학적 리서치와 시선보다는, 보편적 차원에서 여성과 그 일상이 갖는 정동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막이 지닌 정동의 힘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어떤 여자들”은 전형으로서 여성을 벗어나는 사례와 보통의 사례를 가치 판단 없이 대등하게 나열하며, 그것이 다만 어떤 여자들이라는 하나의 무심한 범주로 환원됨을 상정한다. 전자의 사례가 노벨상을 타거나 킥복싱을 하는 경우라면, 후자의 사례는 아마도 아파트에 살거나 아직 살고 있는 여성일 것인데, 이는 기호학적으로 더 세밀하게 정립된다―이것은 매우 탁월한 설정이다. 거기에는 특별-평범의 축과 예외-보통의 축의 네 가지 사례를 만들어 내는데, 노벨상을 타는 것이 특별한 가치 기준에 속한다면, 아파트에 산다는 건 상대적으로 평범한 가치를 띨 것이다. 킥복싱을 하는 게 예외적인 경우라면, 그에 비해 아직 사는 건 보통의 경우를 가리킬 것이다.
아파트에 산다는 건 문화적으로 가치 계열의 기호이기 때문에, 곧 도시의 단독주택에서 산다(=소유하고 있다)의 차원보다는 특별하지 않은 것이며, 원룸이나 빌라에서 살거나 시골에서 사는 이보다는 특별한 것이 된다. 그래서 “이것이 불공평한가”라는 질문을 불러오는 것인데, 이는 어떤 여자들은 그렇지 않으며, 그렇지 않은 여자들의 경우, 그 삶은 부의 특별함의 차원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또한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여자들이 더 특별한 주체의 자리를 갖는 것에 대한 의문과 의심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데, 이는 자본주의 아래 자연스러운 욕망의 자리와 페미니즘과 양립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특별한 여성의 지위라는 어떤 중첩된 범주에 대한 거부나 부인에 대한 무의식적 심급을 건드린다. 그런데 킥복싱은 아직 사는 데 있어 어떤 보조적 차원에서 의미를 전제한다. 그것은 여성만이 느끼는 체감에 의한 것일 수 있는데, 그것은 여성이 (남성에 의해) 죽임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삶의 차원이 아닌, 죽음의 차원에서 이 두 가치는 전도되는데, 곧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성 누군가는 킥복싱을 하며, 여성 대부분은 운 좋게도 또는 역설적이게도 아직 살아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어떤 통계의 수치도 명확하게 취하지 않은 각각의 확률 분포의 한 점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곧 편견과 여성의 위험한 생존에 대한 현실을 호명에 의해 불러오며 객관적 입장으로 유보하는 것 같지만, 실은 여성에 대한 비가시적 사회 체계를 구성하는 것에 가깝다.
그 사회적 압력의 코드는 역설적인 차원의 긴장으로 이어지는데, 가령 “짝다리 짚지 않아야 하는 / 다리를 떨지 않아야 하는” 강제는 “그런 자유”로 명명되며, 실은 사회적 강제의 차원이 예외적인 여성의 축출과 비가시화라는 차원을 구성함을 의미한다. 여성의 자유는 제한적이다, 아니 부재하다. 그리하여 “그냥 불러버리면 그것이 되어버리는 강렬함”의 “그 이름”이라는 처음으로 돌아간다. 할머니라는 이름은 어떤 모든 여성의 이름이 되어 버리고, 그리하여 “어떤 여자들”이라는 수많은 특징의 나열로써 그것에 홈을 파야 한다. 그럼에도 충분하지 않다!
이제 실재하는 배우들의 이야기가 그 뒤를 따르는데, 이들은 대체로 아파트에 살지 않는 덜 특별한 존재들로 범주화되는 듯 보인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이오진의 삶으로 그가 금수저의 삶으로 인식되는 부분, 곧 그것의 순수 내재적 차원의 의미 대신에 계급적 차원의 식별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호명이 일어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모두는 어떤 여자들에 속하는데, 이오진을 예외로 하면, 다른 배우들은 삶의 문제가 경제적 생존의 차원으로 거듭난다.
여기에는 불안정한 수입을 가진 연극배우의 구체적인 실존이 포함된다. 이는 이화정 배우의 서사에서 특정되는 부분이지만, 곧 2막의 대전제를 구성하는 부분이다, 일정한 수익이 담보되지 않은 배우들이 경제적 공동체로서 제2의 삶을 꾸려나간다라는 것. 사실 어떤 여자들이라는 명명은 무엇이든 가능한 잠재적 표현이기도 한데, 그래서 각각의 배우들이 지닌 고유성의 조각은 단편적이고 그래서 환원론적인 이 명명이 지닌 가치 판단의 영역에 홈을 파고 끊임없이 다른 홈을 연결하는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어떤 여자, 또 다른 어떤 여자…의 무수한 연결이 낳는 어떤 차이를 구성하는 것이다.그러니까 이들의 자기 서사의 개별적 구성은 그저 어떤 여자들로 범주화되는 여자들에 대한 부정의 근거를 제시하는 차원에서 정치적인데, 이는 그 서사 자체가 평범하거나 소소하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구조적 차원의 부분인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에 속하지 않은 예외성의 무한한 산출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긍정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는 음악적 승화로 연장된다. 어쩌면 이 서사들은 각각의 응결점을 갖고 복수로 확장되지 않는 지점에서 개별적인 차원으로 소급되는데, 이는 우리가 그 서사에 개별적으로만 감응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을 뿐임을 의미한다.

곧 이들의 이야기는 고유성의 내용보다는 고유성이라는 형식 아래에서 의미화되는데, 결과적으로 이들이 하나의 ‘다른’ 어떤 여자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유적 차원이 아니라 자기 진술에서 연장된 질적 차원으로 전환되는데, 이때 저마다의 다른 강도가 (그리고 그에 대한 다른 감응의 정도가) 있을 뿐인 것이다―이는 다큐멘터리 연극이 갖는 어떤 전형성의 고유함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나드들은 무언가 충분한 정도의 서사로 구체화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물론 희미한 연관성을 제시하는 부분도 있는데, 이는 할머니의 고독과 고3 시절 자신의 그것을 비교하는 황순미의 서사가 대표적이다.―, 그것이 고유성의 상징적 형식을 띠는 가운데, 그 각각의 모나드가 하나의 세계 안에서 공명하고 있음이 진정 중요한 것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곧 이들의 고유성은 이들의 자의성, 우연성의 차원으로 전도되는데, 그들은 그 각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그 다른 각자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가 된다. 곧 존재 자체, 차이 자체에 대한 긍정으로서 하나의 집단이 구성되는 것인데, 그것의 표현형이 군무를 가미한 집단의 노래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은 2막의 경제적 생존의 공동체와 어떻게 다르고 또 겹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마니페스토로서 여성을 옹립한다. 질적 차원의 순수 차이들은 이제 구체적인 현실의 삶에 대한 적응으로 나아가는데, 그 가상의 연대-공동체의 근거는 덜 특별한 배우라는 신분 계급적 차원에서 가져온다. 이때 마니페스토 연대가 지닌 숭고함의 형식은 생활 공동체의 지질한 내용으로 ‘하강’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특별함과 그렇지 않음의 가치 판단의 영역을 계급 간의 대립보다는 어떤 다름의 차이로 재식별하고자 하는 1막의 어떤 기조를 연장한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삶이 위협받는 어떤 여성들의 심각함은 분화되지 않는 듯 보이는데, 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절대적 매체에 상응하는바, 곧 이 가족이 여성들로만 이뤄졌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로부터 오지각되는 부분일 것이다. 곧 순수한 여성 연대의 차원은 남성적 세계(관)으로부터 어떤 일시적 평화의 질서를 가져다준다는 것. 여기서 남성 집단이 괄호 쳐진다는 것, 봉쇄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페미니즘의 어떤 다른 혁신적인 미래를 꿈꾸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낳는 개별 삶의 불균질한 경제를 하나의 절대적 전제로 두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어쩌면 그것이 여성 개체의 험난한 삶과 경제적 험난함의 예술가 일반의 삶이 교차하면서도 실은 후자가 환원되는, 아슬아슬하게 먹고사니즘의 일반적 차원에서 그 문화적 증상이 우세하는 것 같은 지점에, 〈히스테리 앵자이어티〉의 어떤 진짜 증상이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어떤 여자들이라는 묶음이 잠재적 차원의 고유함‘들’을 낳는 가능성으로 전복되는 지점은 다시 그것이 그 안의 모든 것을 가치 판단 없이 다시 긍정하는 지점을 향하는 것 같은데, 그 결과 어떤 정치성, 그 정치의 주체적 자리가 깎여나가는 것이다. 곧 예술가가 경제적 가난을 감내해야 한다는 주장과 자본주의적 욕망을 꿈꾸는 여성에 대한 비판은 각각에 전제된 약자 혹은 타자를 향한 사회 구조적 차원의 억압 기제라는 점에서 상응하지만, 그 욕망이 개체적인 고유성으로 순수하게 조각될 수 있다고 보는 건 다른 문제로, 그것은 어쩌면 일반론적 존재를 여성으로 혼동한 경우다. 곧 자본주의의 구조적 차원의 증상을 부인한 결과다. 또는 여성으로 소급한 결과다.
결국, 질문은 다른 미래에 걸맞은 어떤 연대의 형상이 그렇게 손쉽게 해체될 수 있느냐를 향하는데, 2막에서 이들이 각자 돈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 대한 단순한 비판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왜 근본적으로 돈이라는 외부의 물질이 연대의 차원을 개별로 환원시키는지에 대한 질문, 곧 그 돈이 그들에 전제된 연대의 차원에서 어떤 새로운 미래를 창출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이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에서 내재적으로 산출되지 않았다는 점에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닐까.
〈히스테리 앵자이어티〉는 희극의 양상으로 그 의문을 봉쇄하고 있지만, 결국 개체의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목소리를 개체의 동등한 욕망 차원으로 전도함으로써, 거기에 전제된 연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매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여성들이 이룬 가족은 무엇을 꿈꿀 수 있는지를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는 혹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곧 단순히 자본주의적 개체의 동등함을 단지 자본의 양적 차이로써 재분배한 결과―‘각각의 차이 나는 유산’―에 다름없지 않을까. 따라서 1막의 각 개인의 고유성이 서사의 확장과 안착 역시 봉쇄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어떤 혁명은 모두의 혁명으로 전이되지 않는다.김민관 편집장
[공연 개요]
공연명.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
일시. 2025년 11월 26일(수)~12월 14일(일) 화수목금 7시 30분, 토일 3시, 월 쉼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호랑이기운
작·연출. 이오진
작곡. 단편선
드라마터그. 장지영
작·출연. 김유림 김은희 이화정 정대진 황미영 황순미
프로듀서. 강윤지'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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