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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하, 〈하리보 김치〉: 냄새나는 아시아인에 대한 자각 혹은 정신 승리REVIEW/Theater 2026. 2. 4. 21:14

구자하, 〈하리보 김치〉[사진 제공=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이하 상동). 구자하의 〈하리보 김치〉는 무대 위에 포장마차 세트를 갖다 놓고, 현장의 관객 2명을 초대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작가의 유학 경험 당시 김치를 고국에서 가져왔다가 겪은 곤궁으로부터 자신의 외로움과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데 역할을 했던 유명한 젤리 브랜드의 하리보 젤리가 합성된 제목에서처럼 이방인으로서 경험을 그렇게 후각적, 미각적 차원의 음식 혹은 식품을 이어나가며 기호들의 환유로써 작품을 완성한다. 그것은 기억으로 체현되고 구자하의 요리로써 수행되는 기호들의 매우 분명한, 그럴듯한 연결, 접촉의 과정으로, 이는 물론 서사의 개연성의 측면, 곧 파편적 소재들의 나열로서 강도 높은 체험의 영역에서의 기호가 단지 표상되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자리 잡는지, 곧 분절되는지의 구상적-해석적 영역에서 재분절되는 이음매나 간격의 측면 이전의 가시화된 일차적인 표면을 가리킨다.
처음, 포장마차의 앞면은 옆면과 함께, 구자하의 등장과 함께 총 3면을 걷어내기 전까지 이 포장마차의 장소성을 지정하기 위해 도심의 마천루를 훑고 타고 내려오면서 오래된 음식점 거리를 지나 포장마차 한 곳을 비추는 것에서 돌연 멈추는 영상이 투사된다. 이 영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겠지만, 그것은 꽤 길고도 묘연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이는 이 도시를 유영하는 존재, 이곳에 자신의 집이 부재한 이의 시점, 또는 이곳 자체를 낯설게 체감하는 존재의 시점을 기입하는 것이다. 빌딩을 아래로 내려오는 카메라의 시점이 빌딩 한 칸의 사무실의 사람들을 비추는 약간의 지연된 시간은 이 카메라를 당혹스럽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의 모습에 대한 피드백적 연결 고리가 카메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적으로 이 낯선 존재‘로’의 침투가 아닌, 낯선 존재‘로서’ 침투, 반영이 이 카메라의 시점적 존재를 무의식적으로 가시화한다고 하면 과장된 해석일까. 그러니까 내가 느끼는 그들의 낯섦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낯선 존재로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한데, 이 부분이 아마도 〈하리보 김치〉가 지닌 중핵일 것이다.
다시 일차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리보 김치〉는 가장 명확한 체험의 영역에 속하는 냄새 혹은 맛에 대한 기억의 상징적 소스들을 이어나감으로써 유학 전후의 시간이라는 자전적 서사의 영역을 명확한 기호들의 쌍으로 검출하고, 반대로 또 그것들을 나열함으로써 이방인으로서 특정한 개인의 역사를 상정해 낸다. 곧 유학을 기점으로 한 초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이후,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시점이 각각 김치, 하리보, 장어로 표상된다면, 자전적 범주가 가족의 차원으로 확장된 할머니, 아버지의 이야기에서는 각각 김치, 치킨이 그 상징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전자는 추워진 기후에 김치의 새로운 저장법으로 고춧가루를 대량 투여해 만든 현재의 김치의 탄생에 대한 기원이라는 민족지적 궤적으로까지 올라간다.
후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군부 정권의 압제와 폭력으로 죽어 나간 거적 덮인 광주 시민들의 시체 냄새가 닭을 튀길 때 나는 냄새에 대한 감각으로 재접지되며 실체화되는, 당시 군인으로 차출된 그의 아버지의 트라우마적 체험이 조명된다. 문제는 이 체험이 음식을 매개항으로 한 〈하리보 김치〉의 디에게시스의 합목적적 방식으로 들어오기에 좋은 소스이지만, 그것이 일차적으로 자전적인 경험의 범주 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의 암묵적 규칙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다뤄질 수밖에 없으며, 어떻게 보면 기능적으로 외삽된 데 그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방인의 경험에 대한 매개의 차원에서도 그것은 멀어진 기호의 측면을 가지기 때문에, 그는 이중 삼중으로 이것을 매개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개인과 연결된 차원에서 강렬하고 또 우연한 것으로서 지극히 강렬하지만, 그것이 주는 효과는 단지 그 지독한 악취로서 냄새와 입맛을 돋우는 냄새의 교환이 특정한 존재에게는 ‘흥미롭게도’ 가능하며―그러니까 이는 확장되어 냄새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사적 차원에서 매개되며 그 의미와 경험의 질적 차원을 규정함을 내포한다.―, 거기서 냄새는 기억의 가장 큰 매(개)체이며 또한 가장 강력한 경험의 매체라는 사실일 뿐이다―이는 ‘한국‘의 식문화에 대한 유행이라는 문화인류학적 정보의 차원 역시 전달한다.
곧 이 이야기의 진실성과 강도의 차원, 마찬가지로 그 후각적, 미각적 기호들이 지닌 강도의 차원을 최종적으로 승인하기 전에, 그것이 어떻게 하나의 서사를 조직, 구성하는 데 이르는지, 작가의 고민과 성찰이 녹아들었는지가 중요한데, 이 부분에서 작가는 유유하게 유동적인 자아, 계속해서 새로운 집을 만나는 승화, 그가 명명한, 국내 인터뷰에서 사용한 “젤리니스(jelliness)”라는 개념으로써 역사로부터도 투명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건네는 소맥의 술잔은, ‘너 역시 투명해질 수 있어!’ 곧 누구도 이방인이 아닌 세계 시민으로서 공통되고 함께 즐길 수 있다는 메시지 아닐까.
‘하리보’가 그가 현재 속한 유럽의 기억에 일차적으로 맞닿는다면, ‘김치’는 그가 한국인으로서 그곳에 속한 그의 정체성을 그 안에 기입하며 체현하는 것으로 그로부터 파생되며 연장된다. 따라서 ‘김치 하리보’일 수는 없는데, 반드시 ‘하리보’가 전제된, 선결된 영역이어야 한다. 보편적인 것에 특수한 것이 결합하며 전자가 후자를 인식한다면, 후자는 전자를 수용한다. 처음 구자하는 10kg쯤 되는 김치를 할머니가 싸주었을 때, 그것을 들고 국경을 건너 택시 트렁크에서부터 냄새가 퍼져 나오게 되었을 때 든 아찔함과 곤혹스러움을, 그리고 그것을 혐오스러운 것인 양 발코니에 두고 창문을 닫고, 다음 날 돌아왔을 때 그것을 고양이 죽은 냄새로 지시하며, 또 한 차례 느꼈던 당혹감을 서술한다.
여기서 그의 문화적 고유성이 ‘그들’에게 어떤 설명 없이도 매개되는 현상, 그러니까 타자의 의식에 앞서는 자신의 의식을 하나의 증상으로 치환해야 하는데, 곧 그것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따라서 어떤 간극 없이 곧바로 수치심으로 전이되는 즉각적 프로토콜을 어떤 매개 없이, 다시 즉자로 제시하는 이 과정에서, 타자의 절대적 심급 아래 반영되고 이해되는 자아라는 공통됨의 범주화를 선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구자하의 마지막 시도는 안이하고도 무책임한데, 이 증상에 대한 반성은 일차적으로는 그가 가방을 잃어버리고 난 후 찾은 역무원에게서 들은, 확고한 인종 차별성 발언, 마늘 냄새가 나는 (아시아인의) 존재라는 것에 대해 사과하고 돌아온 자신에 대해 비로소 처음으로 이뤄진다. 어떻게 보면, 진정 그 첫 번째 수치심의 경험은 사유의 과정 바깥에 있는 경험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그것이 증상인 것과도 같다.
사실 우리에게도 김치 하리보는 어떤 매력을 주지 않는데, 그것은 적어도 또 매우 중요하게도 하리보를 경유한 것으로 인지되지 않기 때문으로, 그의 경험이 항상 대자적인 차원에서만 성립한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기 쉽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이 김치-마늘로 인접되는 ‘어떤’ 아시아에 대한 혐오 정서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 유머의 효과가 윤리적인 것이 되는 지점에서, 그의 경험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유효하다는 것이다. 곧 또 다른 우리의 시점에서 보면, 첫 번째 경험은 타자의 절대적 수치에 대해 우리의 무지를 반성하게 하고, 두 번째 경험은 타자의 분노가 우리의 분노로 전치되는 지점을 만든다. 이 두 경험의 차이는 그렇게 우리의 공통된 증상을 다룰 필요 없이 충분하게 서사의 기능을 달성한다. 그리고 이 우리를 통과하고 승인된 작품으로서 구자하의 작품은 ‘또 다른’ 우리에게 도착한다. 이 이중의 (시차로서) 번역 작업에서 구자하는 젤리라는 투명하고도 간극 없는 존재로 자신을 정체화한다.
곧 구자하의 서사는 유럽인 스스로가 타자를 반향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적 주체로 합리화하는 데 매우 예외적이고 드물며 동시에 그럴듯한 아시아인의 적합한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인데, 구자하가 든 축배는 아시아인으로서 표상을 감당하는 대신, 그 허들이 깨진 아시아인 같은 유럽인의 새로운 표상을 향한 제스처에 가까워 보인다. 구자하의 서사에서 5.18은 매우 낯선 그리하여 새로운 것으로 출현하는데, 그것은 그 서사가 질적 차원에서 과도하게 납작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들의 시선 아래 이를 바라보기 때문 아닐까. 그러니까 냄새를 통한 재범주화, 재연결의 차원에서 서사의 갱신이라기보다 타자성으로서 서사를 타자‘에의’ 서사로 바꾸는 과정에서 그것이 새로운 것으로 그리하여 낯설어지는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그것은 낯설고도 익숙한 언캐니의 복합적 작용과는 달리 전적으로 낯선 것이다.
물론 이는 5.18을 새로운 감각으로 연장하고, 개별 서사의 독특함과 특이성의 연결을 끊임없이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도, 그것을 숭고한 무엇으로 두고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정하는 데서 멈춰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다만 이 구토의 정서가 유럽인이 겪는 역겨움의 정서의 뒤집힌 판본쯤으로 활용되는 것 이상의 차원으로 이 서사가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한국의 한 특수한 역사일 뿐이기 때문일 것이기 때문에 전달 가능한 서사의 차원에서 그것은 생략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소위 ‘한국인의 정서’를 고려해서 그 서사를 보완하고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우리는 전적으로 수입품을 소비하고 있다.―, 5.18 자체가 그에게는 그러한 낯선 무엇으로, 내재적 차원에서 연장될 수 없음으로 확정하는 가운데 그 자신의 근본적 입장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가 펼쳐내는 게 곧 이방인으로서 한국인을 표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그것이 하나의 전략적 차원이라면, 따라서 5.18이 한국의 어두운 역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자 기입이라고 한다면, 그는 그러니까 그 역사를 어떻게 섭취할 수 있는가, 또는 그가 그것으로부터 맡는, 느끼는 냄새와 맛은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오히려 이 충격적인 역사적 실재는 작가의 근본 입장이 부재하거나 모호함을 가리는 은폐의 기술과도 같아 보이는데―아버지라는 관계의 물리적 근거 역시 자의식적 차원의 언급을 가릴 수 있는 명분이 된다.―, 그것은 거의 냄새가 나지 않고 은은한 맛의 풍미를 느낄 수 있는 젤리라는 맛과 냄새의 상징적 종착지에 이르기 위한 적당한 클라이맥스의 지점을 위치한다. 그러니까 외부를 경유해 내부로 돌아온 어떤 지점에서 최종적으로 자아가 낙착된다면, 그 최종적 내부가 어디인지를 따져 묻는 것은 구자하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그는 유럽에서는 아시아인으로, 아시아에서는 유럽인으로 등장하므로, 이 내부는 전도 가능하며, 또한 그래서 사실상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된다.
우리는 구자하라는 유럽이 섭취한 아시아로서 문화적 가치를 뒤늦게, 필연적으로 승인한다. 그의 우리의 고국으로의 입성을 전제하며. 교환되는 건 아시아인이라는 유럽의 상징 자본과 아시아라는 예외적 위치로서 타자의 수용이며, 거기서 버려지는 건 혹은 은폐되는 건 유럽이라는 하나의 인류로서 자리와 아시아라는 보편적 차원의 타자적 형상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자하를 경유하며 진짜 보는 건 예외로서 승인되는 타자의 자리라는 문화적 서사의 차원인데, 중요한 건 〈하리보 김치〉가 지닌 서사의 내재적 차원은 그것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문화적 서사에 대한 반영물로서 전적으로 기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구자하는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를 그저 말한다기보다는 전략적 차원에서 그것을 예외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인데, 이는 그가 기꺼이 타자로서 위치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하리보 김치〉는 유럽인의 시점과 우리의 시점의 차이를 확인시키는 데 종착하는 게 아니라, 그 둘이 대척되고 배제하는 지점에서 서로를 모두 안전하다고 느끼는 지점에 각각의 관객을 둔다.
그러니까 유럽인이 예외적 자리의 승인을 통해 윤리적 유럽인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타자화되는 걸 구자하의 재주체화의 과정을 경유해서 승화시킬 수 있다. 전자가 포용의 서사라면, 후자는 승리의 서사인 셈이다. 그렇지만 〈하리보 김치〉에서 정작 중요한 건 우리의 정신병리학적 타자로서 유럽이 아니라, 5.18의 역사적 타자가 (마치 유럽인의 관점에서 아시아의 독특한 역사적 상처로서 수용됨이 그대로 우리에게 이전되었다는 것) 아닐까. 곧 〈하리보 김치〉가 가장 결정적으로 실패한 지점이 쓰이는 지점 말이다.
김민관 편집장'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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