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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이온, 〈스와이프〉: 현존을 재정의하기 또는 재설정하기
    REVIEW/Theater 2026. 2. 4. 21:04


    1

    음이온, 〈스와이프〉리허설 장면{사진 제공=음이온](이하 상동).

    〈스와이프〉는 다이애나밴드의 “소리-사물”들이 극장 전반에 배치되어 단속적으로 소리를 내는 가운데, 네 명의 배우가 순차적으로 어떤 관념들을, 돌아가며 발화하며 잇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교환적, 교차적 놀이의 기저에는 무엇보다 네 명의 배우들이 말을 위임받고 수행하는 존재이며, 관계항으로서 역할들의 위상차가 아닌 이야기 전달자로서 단지 그 역할들을 임의적이고 임시적으로 ‘도입’하기에 동등함, 이야기 전달자로서 효율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기술적 차원에서 동등함이 전제된다. 

    디에게시스의 말하기 방식을 전적으로 구사하는 배우들이 독립적이고 특정적인 자기 자체로서 임하면서 일부 미메시스 차원에서 관계항의 연기가 가능한 지점을 삽입하는데, 이는 현실 차원에서 이 넷의 ‘자신’과 그 관계에서 묻어나오는 사전적 맥락 역시 희미하게나마 수용한다. 그럼으로써 연극의 자기 지시성을 드러내는데, 이는 이 역할 산출의 역능을 그 스스로 가진 이야기꾼의 위치성을 다시 한번 지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앞선 교차와 교환의 방식으로서 이들이 주어지는 부분은 특정한 가시화의 장치로서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카메라와 그로부터 투사되는 스크린의 활용에 의해 매개되고 증폭된다. 곧 앞면과 뒷면이 주요하게 자리하는 가운데, 옆면은 거의 예외적으로만 드러나는데, 관객의 뒷면에 자리하며 카메라의 시야에 들어옴으로써, 뒷면의 배우는 관객을 직접 향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앞면의 스크린에 나타남으로써, 앞면의 배우는 이미지 아래, 그것과 관계 맺게 되는데, 이러한 뒷면과 앞면의 상호 교차 작용의 일부로서 스크린-무대 속 배우들이 출현하고, 이는 앞면과 뒷면의, 무대와 스크린의, 존재와 이미지의 교환 관계를 성립시킬 뿐만 아니라, 상호 뒤섞임을, 교환을 촉발하는 것이다. 

    곧 확장된, 오지각된 권역 아래 들어오기를 통해, 오히려 그 나머지 영역은 국소적인 차원으로 하락하는데,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매체적 특정화로 인한 생성과 감축을 동반한다. 곧 뒷면이 순전히 비어 있더라도, 곧 객석 전체를 뒤로 민 평평한 극장에서 관객 앞에 선 배우는 그 텅 빈 객석이 쌓여 있음의 이미지를 기준으로 중앙 쪽을 선점하면서 그 이미지의 광경에 동조되는데, 그는 그렇게 무대에 이미 선다기보다 서야만 하며, 서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렇게 이미지에 포획당한다. 이들은 이 고정된 스크린으로서 확장되기 위해 스크린에 속해 앞면과 뒷면이라는 특정한 영역 안에 자리 잡아야 하며, 스크린이 그들에게가 아니라 그들이 곧 영속하는 스크린의 지지체인 듯 자리하게 된다―스크린-무대는 우리를 포획하는 시각 장치이다. 

    그러니까 ‘가상’이란 실재의 반대말로서 자리하기보다 실재를 비트는 어떤 매개가 함께함에서 유래하는데, 이들은 픽션, 미래, 인공지능, 마음, 의식 등에 대해 차례차례 이야기하는 가운데, 스크린 위의 반영을 위해, 또 그것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몸을 유동체로 두며, 마치 이 이야기가 지닌 허구의 성질을 형식적으로 부정하고 거부하며 부인하려 한다고 보인다. 곧 이야기의 매개체로서 몸이 그 내용을 순전하게 따르지 않음으로써, 또는 말하기의 부가적 몸짓을 초과하면서, 곧 자율적 실체로서 형식화되면서 강조되는 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거나 맞지 않을 옷을 입은 몸의 부적합한 현존이 아닐까. 

    여기서 중앙부의 관객은 그 앞뒤로 위치하는 배우들에 휘감긴 채, 말들과 소리-사물들의 코러스―또는 그 역의 관계―에 휩싸인 채 공연에 ‘포함’된다. 그것은 그 바깥의 것들에 의한 장악, 오염, 침투를 겪어 내야 함을 의미하는데, 특히 소리-사물들의 코러스는 단독적으로 주체적이며, 그것에 반응해야 하는 건 관객 이상으로 배우들이다. 〈스와이프〉는 『햄릿』을 모티브로 하나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상상하고 끌어오는 동력의 차원에서 희미하게 흩어지고 또한 결정적 차원으로 변환되어 두드러지게 된다. 

    2

    유령과 기억의 아버지, 곧 죽고 난 이후의 현존하는 아버지와 죽음으로서 기억에서만 현존하게 되는 아버지는, 『햄릿』에서 유령이 되어 나타난 아버지로 인해 번민에 휩싸이는 햄릿이 유령 아버지에 대한 현존의 심급에 고착되기보다 현실에 대한 재인식과 그가 감당할 운명의 파고에 대한 차원에서 히스테리 증상을 겪게 되는 것이라면, 〈스와이프〉에서는 AI가 일반화된, 더 고도로 인간화된 미래 사회에서의 곧 AI를 유령으로 등치시키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스크린으‘로서’ 무대가 주는 매개, 증폭, 특정된 감각으로부터 〈스와이프〉가 온라인으로 매개된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변환된 감각과 인식의 차원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고 있음에서, SF의 서사 양식으로 외삽된 것이다. 곧, 하나의 장소와 시간, 직접적 경험만이 가능했던 시대가 근본적으로 변환되었음을 보여주는 현재를 상정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로서 극에 속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서사는 죽은 이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변환된 AI 아버지와 아버지의 직접적 부산물로서 생체 뇌, 그리고 서비스 업체가 다음 단계로 제안한 생체 뇌를 변환한 전자동으로 살아 있는 전자 뇌라는 절차적 변환에 의해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이에서 오는 간극에 대한 질문으로 옮겨 가는데, 여기서 근본적인 문제는 『햄릿』과 마찬가지로 AI 아버지가 아버지와 같은 무엇이라는 감각을 수여하고 있음이 문제가 아니라, 생체 뇌를 “폐기”하며 동시에 “변환”한다는 것, 곧 변환이 폐기를 동반하며, 폐기가 곧 변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둘이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 것인가. 이는 언어적 혼란, 언어도단의 사태를 불러오는 것 같은데,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되고 있고, 또한 필연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어떻게 죽음이 단지 AI 아버지와 같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생명적인 것으로 변환될 수 있는가. 그 중핵의 차원에서 오로지 우리 신체 기관 중에 뇌가 선택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의 뇌를 온라인 세계로 확장하면 그 안에서 기관 없는 신체로 영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신체의 잠재성이 자율적이고도 온전하게 펼쳐진 것으로 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결과 역시 모호한데, 거기에는 어떤 미래 기술에 대한 무한한 희망의 알레고리에 대한 현재에 대한 정확한 대응이 있다.

    따라서 『햄릿』에서처럼 유령 아버지로서 AI 아버지가 마치 아버지인 것‘처럼’ 건네는 말 자체로부터 이 변환 과정에 대한 주체의 미심쩍음, 불쾌함의 잔여적 감정이 소소한 차원으로 남게 되는데―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서비스에 대한 것으로 치환되면서 그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피한다.―, 『햄릿』의 유명한 대사인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하는 대사를 장황하게 영어로 읊는 김중엽의 독백 장면은 철저히 부가적인 것으로 처리되는데, 그러니까 『햄릿』은 일종의 드라마 극의 잔재로서 끼워 넣어지는 것이다, 마치 재현의 욕구를 따른 대상적 지위로 하락하면서. 그렇게 『햄릿』을 죽이는 법, 불순물로 재처리하는 법, 불순물로 다시 떠오르는 법을 통해 〈스와이프〉는 『햄릿』이라는 유령을 소격화한다. 

    3


    〈스와이프〉는 햄릿의 환상을 다시 아버지의 맥락과 분절하며 컵에 대한 서사로 맥락화하는데―이는 물론, 유령의 물신화로서 뇌라는 전제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컵이라면, 컵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과 같은, 일종의 도착증적 증상은, 〈스와이프〉의 돌고 도는 교환의 놀이로서 공식 속에 반복되며, 아버지의 서사에 도착하는데, 이로부터 생체 뇌를 무언가가 담겨 있는 용기(container)로서 뇌에 대한 은유로 굴절시키는 데 사용된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컵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냐라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질문은 아무런 연장 없이 멈춰 있는 이 생체 뇌의 돌봄에 대한 지속이, 어떤 변용 절차, 곧 폐기, 활용되는 과정을 겪지 않고, 그냥 그렇게 자신을 자신으로 지칭하는, 담아내는 컵의 기능적 차원에서만 진정 머무르고 싶냐고 반문하는 것과 다름없다. 

    여기서 컵의 위상기하학적 전제는 컵의 신체 변환을 위한 사유의 매개 고리 정도이지만, 실은 각각의 서사가 지닌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그 서사의 어떤 단위들, 무언가를 담아내는, 도넛과 컵이 위상기하학적 차원에서 동등한 것과 같이, 분절되는 서사 단위들이 잠재적 변환의 흐름 가운데서는 등치된다는 것을 가리키는 하나의 대전제적 가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나의 서사의 돌림 놀이 같은 〈스와이프〉를 꿰뚫는 전제라면, 그리하여 그것이 이 작품에서 서사의 단위로서 서사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의 제목 ‘스와이프’는 이 연극의 정신분열증적 전환, 그 분절들, 연결들 자체를 지시한다고 하겠다. 

    곧 지금 화면을 다른 화면으로 넘기는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이 소거, 전도되는 것과 같이, 그러한 스와이프의 직접적 기능이 굳이 정의되지 않음에 따라, 일반적 용례의 차원으로 한정되지 않음에 따라, 〈스와이프〉의 모든 것은 일시적 현전의 차원으로 부상하며, 따라서 더욱 무용하고 산만해지는 것이 가능한, 무대의 용례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배우들은 화면을 넘기는 대신 자신들을 그 화면으로부터 넘겨지게끔 계속 전환하는데, 이 ‘스와이프’를 위한 아날로그적 행위, 곧 현존으로서 가정되는 움직임이 〈스와이프〉 전반을 꿰고 있는 것이다. 

    4

    〈스와이프〉의 마지막에는 검은 개가 등장하는데, 이는 자기 언급의 차원에서도 급작스럽게 어떤 내재적 분기 없이 동원되는 일종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 대상에 가깝다. 검은 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정의를 시험대에 올리는 AI 아버지에 대해 실재의 차원을 주장하기 위해 등장하는 아버지의 유령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소하지 못한 채, 때마침 등장한다. 그리고 이 미래의 아버지의 유령은 과거의 『햄릿』이 가진 진정성의 서사에 호소하며 마치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부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그가 하는 말은 그 전까지 자신의 모든 데이터의 연장선상에서 재기입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한데―그렇다면 반대로 AI 아버지는 진짜로 아버지의 죽음 이후의 존재인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진정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느냐의 물음도.―, 곧 그는 AI 아버지를 근본적으로 업데이트하지 못한다. 그리고 AI 아버지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AI 아버지는 아버지 그 모든 것이자 그것을 활용한 아버지의 잠재적인 모든 것이다.

    생체 뇌를 폐기하면 이 유령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거기에는 유령이 숨을 국소의 영역이 파괴됨을 의미하는가. 정작 그것을 반대하는 건 AI 아버지인데, 생체 뇌는 진정 아버지의 물신이기 때문은 아닐까. 곧 그는 그 신체의 가장 극단적인 차원에서 대구를 이루는 순수한 비물질의 영혼 자체이다. 반면, 이 뇌가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게 될 때 유령의 신체적 자리는 어느 곳에 속할까. 그것은 이 뇌 기관일까, 아님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것일까.

    이 아버지의 실체적 자리가 질문에 붙여지는 상황에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서 삼촌이라는 죄의 원인으로서 현실을 딛고서가 아니라, 곧 극복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 아버지를 대신하는 가짜 아버지와 그것을 흩트리는 진짜 아버지가 있다면, 그로부터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정초해야 하는 것이 과제로서 주어진다면, 그 안에서 바뀐 건 아버지의 위상이나 자격, 그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이 싸워야 하는 현실 대신에 가상의 나와 실체의 나 사이의 분열적 양상 자체로 옮겨왔음을 이야기하는 것.

    곧 〈스와이프〉가 계속해서 말하는 이 이물감으로서 존재가 실체로서 존재를 앞지르는 어떤 관념으로서 예시들, 가령 포르노를 시청함으로써 자위할 때 제 3자의 관점이 연장됨으로써 발기 부전에 이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계속해서 상대방과 채팅 앱을 경유한 온라인상의 대화가 무대상의 언어와 교직되는 부분이, 마치 무대 위 스크린과 무대 자체의 대화로 여겨지는 것 같은 착시와 함께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 이는 모두 앞선 김중엽의 ‘햄릿’ 연기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가볍고 휘발되는 세계의 양상으로부터 무대 위의 현존을 교차시켜 보려는 어떤 시대착오적 제스처는 아닐까. 

    5

    “아무도 없는 숲속”에는 “아무것도 없진 않”으리라는 건 서사에 대한 욕망일까. 아님 “살아있다라는 느낌”과 같이 우리가 감지하는 어떤 비가사회된 것의 실체를 뜻하는 것일까. 두 개의 아버지가 존재할 때 그리하여 화자가 혼동과 착시에 빠져들 때 나타난 최종 빌런인 ‘검은 개’는 실재의 차원을 담보하는 것처럼 보인다―마치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가시화되지 않지만 존재하는 무엇과 같다. 거기에는 단지 그것이 검은 개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밖에는 없다.

    검은 개는 가상의 또 다른 경로를 신체의 내부로 옮겨 오는데, 그런 점에서 검은 개가 되는 법은 하나의 방법론적 차원에서는 수월하다. 그로울링의 발성법 가짜 성대로써 진짜 노이즈를 만드는 것, 성대를 실제 긁지 않고 탁하고 긁힌 소리를 내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거친 하울링에는 검은 개와 같은 것이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성대가 아니라 ‘검은 개’‘라는 관념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 있다. 

    아무도 없음이 그것을 바라보고 지칭하는 또 하나의 시선을 가정하는 것처럼, 유령은 그 반대의 실체를 반드시 가정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피드백, 그것이 실체 같은 무엇이라는 감각의 차원을 수여한다. 그래서 유령은 우리의 감각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순수한 차원의 영점을 가리키지 않을까. 〈스와이프〉는 현존을 가상의 차원을 경유해 생기는 시차, 낙차, 오차를 통해 그것을 질문에 부친다. 우리가 갖는 현존에 대한 감각을 서사의 차원에서, 극장의 차원에서, 연극의 제도적 차원에서 비틂을 통해서.

    그러니까 〈스와이프〉는 서사가 성립하는 자리에서 수용자의 신체를 수면에 올리고, 극장을 하나의 가설되고 생성되며 통제되지 않은 곳으로 두고, 연극을 ‘안’에 두고 스크린을 통해 다시 연극 바깥으로 나가곤 한다. 거기에는 곧 경계의 존재가 있다. 그것은 곧 관객 자신이기도 한데, 관객은 서사와 서사, 무대와 스크린, 앞과 뒤, 소리와 목소리 사이에 낀 채 서사들을, 초점화되는 스크린으로서 무대와 잘려나간 무대 또한 잘린 채 엄습하는 무대를, 소리에 숨죽이는 또는 침범당하는 목소리를 마주한다. 

     

    김민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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