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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다페 2009] 무용에서 ‘언어의 발설’이 갖는 의미
    REVIEW/Dance 2009. 6. 15. 17:12

    국내초청공연 안무가 이혜경, 김형남, 유호식

     

     전체적으로 세 편의 작품들을 보면서 왜 춤은 몸을 드러내지 못하는지 고스란히 몸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지 하는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마지막으로 펼쳐진 <꼭두질>은 색다르고 재미있었다. 놀라운 것은 어떻게 무용수들이 이야기의 구조에 적합하게 안무적인 몸짓들을 체화했는지와 천연덕스러운 역할 되기였고, 언어 사용에 있어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실험적인 시도의 평가나 장르의 파기에 대한 사고를 가져오더라도 굳이 연극적인 공연으로서 춤의 언어에 어떤 새로움을 보여 줬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역할이 완벽히 되어 춤을 추는 것, 언어를 배제하지 않는 노력, 춤으로써 이야기를 전하는 데 따른 노력과 시도는 그것들이 주로 배제되는 측면이 없지 않은 가운데 새로운 시도로서 긍정적인 요소는 있었다.

     

     인상적인 부분들로 붉은 옷과 뺑덕어멈의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를 통한 캐릭터 만들기, 코러스 역할이나 판소리와 같이 추임새를 넣는 언어, 심청이 뛰어들고,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에서의 극적 고조와 결말의 치환이 임팩트를 줬음이다.

     

     심청의 이야기를 어찌 보면 낯설게 재구성된 느낌, 캐릭터를 존재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무의지적 인물로 툭 튀어 나오면서 현현시키며 음절이나 음소로써 언어를 코러스나 추임새로 가지고 노는 것(단지 정확히 이야기나 말을 한다는 차원과는 다른)이나 정신없이 진행되던 차에 막바지의 결말이 생경하면서도 생생함, 희극이 아닌 비극적 차원에서 다른 결말을 끌어 낸 듯한 느낌이 작품의 개성적 특질로 다가왔다.

     

    김형남의 <아프다(hunt)> : 아픔의 몸짓들...

     

     
     절름발이처럼 남자가 걸을 때 내면을 향한 몸짓과 정서는 한 꺼풀 메시지를 담은 모습을 드러냈다. 소통에의 욕망과 외로움 등은 이들에게서 공통된 것이었다.

     

     그러다 돌연 언어를 발화했을 때 이는 그러한 균열의 조짐에서 완전한 하강이었다. 왜 무용에 그것의 상위 구조에서 내지는 의식적인 지점에서 메시지의 전달 차원에서 언어를 삽입하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모호함의 움직임은 그 몸짓 자체에 강밀도가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체로 명확하거나 자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지점에서 언어의 발설은 곧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지점'이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삶의 고통과 아픔, 실존적인 차원의 그것은 결국 완전한 힘의 소진으로 그들을 이끈다. 하지만 그것은 쏟아냄 이후의 자연스런 소진의 과정이기도 하다.
     즉, 육체는 자연스레 메시지에 맞춰 생리적인 작용으로서 굴복하는 것이다. 곧 그것은 연습실에서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주축이 됐던 여성 무용수의 얼굴은 많은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극에서 보면 안타까운 지점이 많다.

     메시지 자체에 속박되거나 몸의 한계 자체를 인식적으로 뛰어넘지 못하거나 언어의 굴레를 벗지 못하거나 하는 지점, 그것은 비단 언어를 끌고 오지 못하는 무용의 한계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지점에 닿아 있다.

     

    유호식의 <무거운 순환> : 환영과 현실 사이에서

     

     한 남성은 여성을 현실로 추켜올리려고 한다. 
     여자는 과거에 집착한 듯 보이고, 새로운 현실의 차원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자는 계속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는 과거에 있는 여자를 현재로 붙들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불일치된 시간의 궤적에서 그녀와 몸을 마주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단파라디오로 보이는 소형 기계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따라 정신은 그에 얽매여 있다. 결과적으로 세뇌작용처럼 들리는 말은 실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자신이 확신과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다. 어쩌면 무의식 차원에서 내지는 로고스의 언어로 정박되어 있는지 모른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따라다니며.

     

     익명성과 의미 없는 시간, 이는 무용의 세계와 정확히 일치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공연을 비추고 있었고, 그들의 문제의식을 대변했다.

     

     결국 무화된 시간 내지는 흘러가버리는 시간, 무위의 몸짓으로서 그리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로 그 속에 남아 있는 존재로서 그들은 선택하거나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노력을 하며.

     

     한동안 남자가 여자를 향하고 여자는 빛을 향해 있는 응시의 이중 구조를 띠고 이후 계속해서 최소한의 움직임과 숨만으로 지속하는 공연은 그와 같은 물음에 궤를 같이 한다.

     

     관객을 비추는 빛, 즉 관객에게 돌려진 빛과 지점 문의 상정은 우리에게 다른 출구를 인도한다. 귀결되는 것, 선택의 차원 답이 있는. 그러나 미래는 현재와 긴밀한 결합을 이루는 현재의 빛으로 제시된다.

     

    사진제공_@모다페

     

    관람일자 및 장소 : 6월 3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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