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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똥자루무용단, 「움직이는 프리젠테이션」 리뷰 : ‘무용은 언어의 이해로 환원되는가!’, 『2011 HanPAC 새개념 공연 축제』
    REVIEW/2011 HanPAC 새개념 공연 축제 2011. 8. 29. 09:25


    언어는 상징계의 일환, 법과 질서적인 성격을 띠고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전제를 단다. 반면 언어는 실재로 바로 내닫을 수 없고 치환될 수 없으며 모두가 의미하는 것 역시 두루뭉술하게 그렇다고 각자 생각될 뿐이다.

    반면 춤의 언어란 어떠한가, 그러고 보면 굳이 춤에 언어로 설명을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어를 벗어나는 사운드 실험의 측면이라면 몰라도.

    ▲ 똥자루무용단, 「움직이는 프리젠테이션」(2006,첫번째 돌출춤판)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똥자루무용단은 MC를 둠으로써 그의 설명 이후 공연을 보는 식으로 presentation의 형식을 차용한다고 하지만, 실은 ‘보여주기’, 직접적으로 맞닿는 게 아니라, 중개를 통해 중간의 과정으로 보여주는 re-presentation재현의 형식을 띤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사실상 공연으로 보이는 것은 두 개 정도의 중간 과정에 불과하다. 이들이 보여주는 말이 없음의 공연과 말을 집어넣은 뒤의 공연과 차이점을 분간하는 그래서 말로 설명할 때 움직임이 명확해진다는 가정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되는 부분을 굳이 독립된 공연으로 이야기하기는 힘들다.

    사실상 이들이 작은 인형을 무대 전면에 거꾸로 돌려 마치 관객인 것처럼 상정하고, 그들을 바라보면서 움직임을 분절적으로 만들 때 마치 이는 요셉 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 할 것인가?」를 생각나게도 하지만 그만큼 소통의 층위가 달성되기 힘들다는, 그 전에 통상의 공연들은 아마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패러디적인 성격도 차용되는 듯싶지만, 일단 이는 느리게 몸의 구분적 동작들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무엇인지 어떤 동작인지 그리고 어떤 언어와 서사로 연결되는지를 생각하기 용이하게끔 지정해주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는 공연이 되지 못 한 장치 차원으로 도입된 움직임들에서도 순일하다.

    기쁨이라는 콘셉트로 표현했다는 부분은 역동적인 두 존재 간의 관계를 통한 전개가 눈에 띄지만, 기쁨을 표현했다는 것은 쉽게 동의하기는 힘들다.

    반면 마지막 여러 장들이 합쳐진 공연은 하나의 공연을 이루는데, 이에 대한 설명을 담은 팸플릿을 사는 것은 이 공연 이후 주어지는 것으로, 관객의 어떤 선택의 문제로 맡긴다. 어떤 판매‧권유가 아닌 선택의 문제.

    손을 내밀고 또 다른 층위에서 손을 내밀어 이 둘의 관계가 어그러지는 존재의 엇갈림, 그리고 타악에 맞춘 여자의 불같은 빠른 움직임, 그리고 나뭇가지를 들고 세차게 휘두르며 괴로움을 표현하는 남자와 인형을 무대 중앙으로 끌어와 그것을 보고 그리움에 젖는 남자, 앞서 나온 남자 간의 인형을 놓고 벌이는 갈등, 음악이 나오고 존재의 움직임이 비로소 생기를 띠고 빚어지며 두 존재들이 접촉의 양상을 빚는 시간이 만들어지고, 다시 인형을 등 뒤에 꽂는 사투가 벌어진다.

    인형을 꽂음으로써 신체의 형상이 기괴해지는 순간, 그리고 꽂은 인형을 뗌으로써 피가 솟구치는 것 같은 신체의 분출이 일어난다. 이러한 시퀀스들의 조합은 그야말로 음악의 다름을 통한 그에 맞춘 안무의 구성이다.

    그러니까 움직임에서 분화된 움직임으로 뻗어 나간 춤 자체의 연속성을 띠지 않고 일련의 서사의 단위들로 묶인, 그래서 그 서사 부분-시퀀스들을 가져가며 인위적으로 연결,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다. 이는 하나의 큰 이야기(콘셉트)가 있고 이에 부분들의 서사 콘셉트가 사전에 있음을 전제하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실은 이들이 커튼콜이자 정말 마지막 부분으로서 또는 보너스로 전개하는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음악에 맞춘 춤은 그 춤의 리듬과 순간마다의 박동을 체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치 그 음악 안의 덩어리들을 보여주듯 그것들의 분자들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듯.

    이들이 또 하나로 건 무용 이해의 키워드는 ‘상상’인데, 공교롭게도 이는 상상계와의 연결을 떨쳐 버릴 수 없다. 무용은 몸‧실재‧감각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곧 어떤 정답을 내리려는 게 아니라 처음 말한 그냥 받아들이는 것, 그렇다면 이들이 만한 전제들이 실은 그 이해 방식이 이야기나 서사, 그리고 말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간과하고 있다는 말인가, 곧 무용의 이해는 몸 그리고 말과 다른 어떤 현실, 실재 이런 것 아닐까!

    그 결과 자체(언어)가 그렇다면 이는 언어가 이해라는 식의 매우 예술적이지 않은 방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그렇다면 이는 어불성설 아닐까.

    이해시키지 않는 방식으로써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춤이 굳이 말의 이해라는 식의 이해 방식이 불가하고 불필요하기에 이해라는 방식을 굳이 강요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기존 예술계의 비판을 하려면 오히려 몸의 관성화된 움직임, 그리고 움직임 자체만을 위한 움직임(이 역시 완전한 비판의 대상으로 모두 치부할 수는 없는 부분이지만), 움직임과 굳이 서사를 연결 지으려는 방식, 움직임에 개념과 서사‧말이 전제된, 움직임 자체로 움직임을 빚는 무모한 시도와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거나 또는 그런 말에서 비롯된 너무 쉬운 몸의 언어(실은 이것이 정확치도 분명치도 않은 것이지만), 그 말과 몸의 언어가 설명이라는 방식으로 뒤늦게 도입외어 진정한 이해의 괴리를 남기는, 그러한 측면이 오히려 더 비판받아야 할 부분 아닐까.

    [공연 개요]
    - 제목 : 「움직이는 프리젠테이션」
    - 공연일시 : 8월 19일(금)~8월 21일(일)  
                평일 8:00pm / 토 4:00pm 7:00pm / 일 6:00pm
    - 공연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 제    작 : 똥자루무용단(대표 이성재)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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