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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나훈 「되기되기되기」 리뷰 : ‘무대를 벗어나 다시 무대로 돌아오다’, 『2011 HanPAC 새개념 공연 축제』
    REVIEW/2011 HanPAC 새개념 공연 축제 2011. 9. 9. 13:33


    무대‧장르‧춤의 근원적인 ‘새개념’이라 함은 이것이 단순히 형식적 측면에서의 변화가 아님을 말하며 시작해 본다. 곧 새개념은 이것 자체를 완전히 또 새롭게 바꾸는 데 주안점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무대‧장르‧춤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바꾸게 하는 데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무대‧장르‧춤의 모습을 가져가되 이것이 이전의 것과는 다른 어떤 것 곧 그것과의 간극을 벌이고 그 간극을 가져감을 의미한다. 곧 이것(무대‧장르‧춤)이되 이것이 아닌, 이것 같은데 무언가 차이가 있는, 그래서 이것이 과연 이것이었나 하는 질문을 안기는 것.

    ▲ 두개의 문(2010 모다페), 사진 제공=박나훈무용단,

    박나훈은 자신에의 안무를 자신으로써 안무를 자신으로서 안무를 버림으로써 안무를 구현한다. 무대‧장르‧춤이라는 경계를 흔들어 놓으면서.

    무대는 인터미션 이후 무대 위에서 객석을 바라본, 거기에 프로젝터로 쏜 영상이 만드는 공간을 보며 무대(객석)는 완전히 환영 공간으로 저기에 있다. 우리가 근접/범접할 수 없는 곳으로 곧 우리의 지난 무대의 개념을 상기시키며.

    또한 극장 문 자체를 열어젖혀(이 같은 시도는 홍성민의 「오페라의 유령」에서 시도된 이후 몇 차례 더 시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적어도 본 것만도 몇 번이 있지만 그 빈도수는 절대적으로 희박하다) 무대를 바깥으로 확장한다. 이는 단순한 확장이라기보다 무대란 조건 자체의 균열을 선사하는 것이다.

    2부에서 관객은 연습실에서 등장하여(이러한 시도 역시 많지는 않았다. 내가 경험한 것은 두서너 번 되는 듯하다. 가장 최근에는 페스티벌 봄의 디륵 플라이쉬만의 작업에서 무대는 완전히 해체되며 새로운 시공간으로 쓰였다) 무대로 가며 무대 위에서는 배우와의 협업을 이룬다. 이들은 연기를 하는 느낌을 그대로 가져가며 분장과 과잉 몸짓으로 어떤 희극성을 무대로 침투시킨다. 이들은 박나훈이 애벌레에서 사람 되기, 일상으로 나오기, 이후 의식의 영향권 아래 있으면서 박나훈을 다시 무대로 끌고 오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은 바퀴 달린 플라스틱 원판만이 자리하는 의자에 앉아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며 무대를 누비고 무대 위에 제한된 조건 하에 움직임만을 갖는다. 여전히 관객임을 인지하며 무대를 누비는 주체, 스타, 빛이 되지 못 하며 다량의 무리에서 분자처럼 있다. 이들이 그리는 원 안에서 배우와 박나훈의 움직임이 펼쳐지는데 무대는 무대 그 자체가 된다.

    무대 위에서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성립하는 바깥은 여전히 열려 있고, 이 안을 침투하지 않는다. 이곳은 여전히 극장이고 다만 바깥의 소음과 공기가 흘러올 뿐이다. 이 환경이 만드는 극장이지만 극장 아닌 어떤 한 공간,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는 않는다. 이 집중되면서도 집중되지 않는 의외성을 여전히 수용하기는 어려운, 그 바깥까지 의식이 뻗어 있는 이들(퍼포머들)에게서 극장을, 이곳 전체를 아울러서 전유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가.

    그러니 과연 극장은 무대는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아니 그 한계는 오히려 얼마나 소중한가! 그 한계가 있기에 극장은 여전히 극장으로서, 무대는 무대로서 존재하며 의식을 집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무대/극장의 경계는 다분히 이 공간 자체를 열어젖히는 것을 시험하는 데서 그 불가능성이 현실화되면서 또는 포기되면서 또는 생략/간략화되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무대‧장르‧춤에서 박나훈은 무엇을 보여줬을 것인가, 명상 이후 참여무용, 관객무용(이후 협업으로 불리는 것의 참여무용의 함의와는 또 구분되는) 이후 그의 순식간의 춤 시간을 잊은, 춤이 흐르는, 땅 위에 물수제비를 날리는 가벼움으로, 날렵함으로, 허공중에 체류하는 춤, 그 한 순간의 연장/확장/전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은 박나훈이 정말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안무를 쓰고 누리는 거의 몇 안 되는 동시대의 국내 무용가임을 입증하는 것임은 흥미롭고도, 아쉽고도, 역설적이었다. 전체적인 문맥 하에서 보면.

    곧 그는 발을 뒤로 하며 유동적인 선분/움직임/속도를 만드는 시범적인 한 지점을 만든다.

    움직임은 뒷눈을 달고 양말의 마찰력을 감쇄시키는 재질로 미끄러지듯 무대를 흐른다. 또 비상한다. 가속한다. 숨은 그 흐름 속에 뿌려진다. 곧 그는 무대를 확장하면서 획정 짓지 않으면서 신체로 이 틈을 벌려 나가는 것이다. 순식간에 닫히는 이 틈을.

    되기를 생성, 그 된다는 것을 하나의 주체로 본다면(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의 독자성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되기는 이전과 다른 주체, 하지만 이것이 순일한 하나의 주체임을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변화된 주체(유식불교의 주체 개념과 비슷한 면이 있는), 이전은 재사유되는 지점으로만 있는 ‘차원 이동’과 같은 것이다.

    애벌레 벗기, 무대와 객석의 전환 등 몇 가지 차원 이동이 앞서 말한 새개념의 일면을 구현하는 점에서의 사건들 또한.

    제일 먼저 명상을 하기, 움직이지 않지만 사실 신체적인 것, 오히려 정신은 신체에서 유래함을 간단하게 증명하기, 사실 그 정신과 신체의 이분법이 실은 허구임을, 아니 그와는 다른 정신/신체를 내다보는, 더듬는, 은근하게 접촉하는 의식을 경험하게 하고 열린 신체로 숲 속을 상상하며 경험케 하고 무대 바깥의 공기는 자연으로 곧 다가오는, 그래서 결국 무대의 개념을 전환시키는 측면을 달성한다.

    이 열린 신체라는 것이 갖는 것, 무대에의 집중, 오직 주어주는 것, 주어지는 것의 붙잡음 이 신경증이고 강박증적인 것을 새삼 인지하게 하는 것일까, 관객이라는 의식의 상태를 해체시키는 수행적 행위, 어쩌면 이 처음이 가장 흥미롭고도 재미있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이는 오직 무대라는 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일종의 무대를 지우고 우리의 심상의 무대를 사유하며 우리만의 무대만을 만들었기에, 그 이유에서 특별한 무대에서의 관객으로부터의 수행적 행위가 촉발되는 것이다.
    평등하게 동시에 내밀하게 이 극장이라는 조건 하에 극장을 비우고 지움으로써 가능한 행위, 이는 다시 극장이 있었다는 전제 조건으로부터 성립된다. 곧 이것은 무대이다. 새로운 개념의 무대(극장을 재사유하고 재전유하고 그런 의미에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내지는 사유 속에서 모종의 극장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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