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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대컷 20p] 연극 '혁명일기' 리뷰 : '혁명은 지속의 윤리성으로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
    REVIEW/Theater 2012. 1. 13. 11:58

    일상의 균열을 내는 매우 일상적 장치들


    히라타 오리자가 작 ·연출, 일본 극단 청년단이 직접 공연하는 ‘혁명일기’가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다. 11일에는 작품 전막의 프레스콜이 열렸다.

    도시 근교의 평범한 주택가에 보통의 부부처럼 보이는 마스다 타케오와 마스다 노리코는 과격파 혁명 조직의 조직원으로, 어린 아들 준스케를 조직 활동을 위해 시골 처가에 맡겨놓고 있다. 어느 저녁 그들의 집에서 조직원들이 모여 테러 계획을 논의하는데, 곧 일반인의 방해를 받는 이야기가 전반을 이룬다.


    노동 전선에 대한 언급을 가볍게 전유하는 이들의 일상과 탈일상의 지점은 묘하게 중층 된다. 일종에 이들이 일상에 구멍을 내는 혁명 전선의 계획을 짜고 있다는 점에서 탈일상적 존재들이고, 보통의 사람이 이들의 일상에 탈일상의 균열을 내는 존재로 다가온다면 이 일반인은 바로 우리의 시점에 대입되며 이들의 탈일상에 매우 기괴한 일상의 존재로 간극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일종의 위치적 전복을 이루는데, 손님으로 찾아오는 이들은 소파를 점유하고 일종의 내밀하고도 신성한 회의 중에 있던 이들은 뒤로 돌아 무릎을 꿇고 예의 바르게, 표면적으로는 더 불편하게 그들을 올려다본다. 반대로 일반인들로 표상되는 손님들의 존재는 이들을 매우 활기차거나 힘이 세 보이고, 또 그 견고한 일상성의 구축으로 인해 기괴함마저 보여준다. 이는 영화에서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기법에서의 클로즈업과 흡사하게 보일 정도로 과장되게 느껴진다.

    가령 홍보지를 만들라고 끊임없이 찾아오는 여자와 그에 더해진 다른 한 여자는 곧 이곳에 함께 사는 주민으로서 주어지는 어떤 당연한 정체성은 매우 정상적인 것이지만 그래서 아주 매끈한 일상의 펼침 면과 그 장악력을 드러낸다.


    손님이 올 때 자연 비워두는 소파는 일종의 왕좌와도 같은 권위를 점유하고 진행하던 이들의 은밀한 이야기들을 멈추고 그것들을 완전히 차단하는 경직 속으로 이들을 연기하게 만들고, 곧 일종의 자기로부터 본모습을 연기하게 만들고 부자연스럽게 위치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이 혁명 전선은 일반인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고 부자연스럽게 만나며 이 세계는 은폐 내지 정상으로서 위장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대면하는 상대는 어떤 적의 개념으로서만 존재가 상정된다는 점, 극 중에서는 그리고 일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적임을 가정한 채 그 혁명 노선은 진행되고 있다.

    계속 나타나는 등장인물들, 일종의 침입자와도 같은 그들의 등장은 이 작품이 마치 소극과도 같은 가벼움으로 작품을 치환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 견고한 일상을 내재한 존재들에 대한 기괴함과 무겁게 돌변하는 한없이 나약해지는 이들의 존재들이 매우 대비적으로 두 축의 큰 전회의 순간들을 단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가게 된다.


    실제적인 혁명의 활동은 이 일상에서는 전혀 전개될 수 없고 나오지도 않는데 이 혁명의 노정은 이들 머리에서 시뮬레이션 되고 그 운동에 대한 이념과 의지가 이들의 논쟁과 나름의 치열한 이야기 속에 드러나고 있다.

    일반인은 이 작품에서 단순히 무서운 괴물 같은 타자, 경계 그어진 영역의 존재라는 초반 진행에서 나아가 ‘혁명일기’는 혁명 그 자체에 대한, 또한 혁명에 대한 자기 윤리적인 성찰까지 이르게 하는 균열의 지점을 소위 일반인이 가져가는 것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언니가 그렇게까지 매달렸던 것에 대한 것, 그 운동의 추동력·구심력 따위를 질문하는 여교사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술 취한 채 이들의 운동이 온건한 시민운동으로 알고 후원하는 사람들이 온 일행에서 얌전히 말을 아끼고 있던 한 사람.


    이러한 질문은 이 혁명에 대한 이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의 객관성으로서 물음을 제기하고, 이러한 응답들, 곧 ‘이것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는 게 맞는 건지’, ‘왜 해야 하는 걸까’에 대한 물음들의 지체된 과정들과의 연속적인 차원에서 다시 물음을 가져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애써 망각했거나 피했던 진실 같은 물음으로서 어쩌면 그 움츠러듦과 같이 다시 은폐해야 할 것이 될지도 모른다. 이 혁명이 자신에게 갖는 의미가 새롭게 부상 또는 재부상하는 가운데, 객관성을 차단한 채, 물음에 대답하기보다 이 혁명을 이루는 것에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 약해지는 마음은 혁명과 마주해 나약한 인간이 되고 마음을 의미하는 가운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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