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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풍찬노숙’ 리뷰 : 신화와 역사의 알레고리
    REVIEW/Theater 2012. 1. 22. 18:38

    ‘왕을 죽여야 근대가 온다.’ 풍찬노숙은 현대적 신화인 동시에 신화적 현재이다. 또한 개념적이다. 그런데 이 개념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뚜렷한 개념으로 차용됐을 때 갖는 그 개념의 가벼움, 곧 개념이 하나의 유희 차원에서 개념의 무게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메시지의 강박이 아닌 그 말 자체의 강박이 되며 그 스스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풍찬노숙 안의 현실은 과거와 현재에 한정되지 않는다. 영속적인 신화를 띠면서 거기에 근대와 현재를 구겨 넣는다. 이는 익숙한 신화의 기시감을 안기면서 한편으로 인공적으로 주어진다.

    네 시간에 육박하는 공연인 만큼 등장인물들의 무대를 점유하는 축의 전환 역시 많다. 기본적으로 영계와 인간계가 나뉘고 왕과 민중의 삶이 나뉘며 일상과 도래할 혁명의 미래가 나뉜다. 왕은 운명으로 점지되어 있고 이는 시련과 끝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왕이 되는 자는 비극의 양상을 갖는다. 한편 이 왕은 국가의 환유, 민중의 염원의 체화와도 같기에 그 결말은 작품의 비극으로 상승한다. 반면 이 결말은 소멸이자 다시 시작의 터가 된다는 점에서 신화에 흡수된다.

    무대는 푸른빛이 감도는 무대 후면과 지하를 상정하는 이단 레이어의 무대 아래쪽이 상응하게 디자인되었고 언덕의 일상과 유동하는 다리가 객석의 위로 상정되어 현재(관객)에 미치지 않는, 언덕 위의 사람들은 멀리 내다 봐야 하는 공간으로 남겨져 기능하는데 무대의 환경 자체가 넓게 직조됐다고 볼 수 있다.

    언덕이 있고 여기서 한없이 굴러 떨어지며 극의 처음에 등장하는 삼형제는-엄밀히 말해 두 형제가 그러하고 뚱뚱한 셋째 동생은 여기서 소외되며 그 둘과의 차이로 인해 작품의 정보를 드러내게 된다- (강태공과 같이) 시간을 낚는 혁명 없는 현실, 곧 변동 없고 고여 있는 일상을 드러낸다. 일종의 고고와 디디이지만 영원한 형벌을-물론 유희로 치환하지만- 받는 프로메테우스의 가혹한 슬픔을 상기시킨다. 시간은 암흑으로 나아가 보편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부재 안에 있지만 한 가닥 희망과 이 희망의 반대편에서의 진부함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무대의 가장 중요한 상징 기능을 하는 장치인 북-이 북은 낙랑 호동의 북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모든 것은 일종의 은유이자 진부한 것의 새로움으로 뒤섞여 있다-이 있고 이 북을 쳐서는 안 되는, 곧 소리는 두려움으로 이 북 자체가 금기의 대상인 가운데 이 북 안에 갇혀 있는 민중은 이 세 형제의 도래할 미래를 기다리는 것에 대비한 현재의 진부함과 속박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누군가 북을 쳐야 하는, 두려움 없는 누군가의 도래가 필요하다는 현실은 앞선 왕이 죽어야 근대가 온다는 말의 강박과 상응한다.
    풍찬노숙을 이렇게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왕이 죽는 현실이 와야 하고 그 결말은 반드시 도래해야 하고 그것이 최종 목표이며 그래야 극이 끝날 수 있다. 그래서 거기까지 극은 전개될 것이다라는 것, 결말은 주어져 있고 결말은 한없이 예고되어 있다. 그럼으로써 풍찬노숙은 인공적 신화를 역사-인과적 시간을 따르는-로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자 동시에 신화를 현재로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다.

    혁명을 차용하는 방식 역시 개념적이다. 이 용어는 분명 레닌의 그것이다. 또는 사회주의 계열의 연장선상이다. 그러니 이 혁명은 특정 시대의 재현에 따른 극 속에 속하는 게 아니라 현재에 무의미한 의미-더 이상 혁명이란 없다-를 갖는 용어를 사유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전유하고 있다. 배경은 옛날이라도 용어는 현재의 사용을 따른다(아파트, 시스템 같은 단어들도 사용된다)

    북이 쳐지지 않는다는 것은 일상의 진정한 진동이 시작되지 않음을 의미하고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삶을 의미한다. 북은 영계의 어머니를 잇는 바보 같은 왕의 표피적 등장이 주는 신화적 폭력이 신적 폭력으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 혁명은 안온한 삶을 제공하는 대신 삶을 파괴하고 되돌리며 다시 시작하는 계기를 줄 뿐이다.

    세 형제가 스스로를 이름 없는 존재, 기록되지 않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이 목소리 없는 주체인 현실 밖의 사람들은 역사에서 기입되지 않았던 존재와 동일한 궤에 속하며 왕과 피치자의 상하 관계를 엎고 새로운 역사의 주체가 되기를 아마도 염원하고 있다.
    반면 이 북 속에서(물론 북 속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에서 그러하다) 일상에 종속되어 있는, 두려움에 대한 환각이 가득 차 있는 인간들은 니체가 말한 최후의 인간이기도 하다. 새로운 왕은 일종의 초인이며 한국적 색채를 입고 도인이자 기인의 모습으로, 사통팔달한 지식과 삶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되어진다.

    재밌는 것은 그가 입은 옷이 카우보이 청바지처럼 느껴지는 푸른 색 바지에 수술이 달린 것 같은 상의로 보헤미안으로 느껴진다는 것 내지는 체 게바라와도 같은 머리 스타일에 수염이 강조되어 있다 볼 수도 있을 것.

    이 새 왕의 이름이 응보로 인과가 빠진 응보이다. 이 왕은 시대적 염원에 따라 왕이 되고 또 죽으므로 자신의 죄과에 따른 응보를 받는 게 아니다. 곧 인과응보에서 인과를 지움으로써 응보란 이름을 얻는 것은 독립적인 존재로 운명을 선택하고 죽음에의 결단을 내린다는 차원에서 인과(응보)를 지운 근대적 인간(동시에 전근대에 속하면서)을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풍찬노숙이라는 말은 바람에 불리면서 먹고, 이슬을 맞으면서 잔다는 떠돌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가리키는데, 이 노숙이라는 말의 함의(기표)가 신자유주의 세계에 속한 현재로서는 새삼 다르다. 시간을 낚시하는 초인이 설 수 있는 근거는 있는 것인가, ‘풍찬노숙’은 이 신화를 역사로 바꾸며 다시 유효한 현재로 잇기 위해, 그래서 이 북이란 실재의 파열음을 들려주기 위해, 그것을 누군가는 들을 수 있고, 또 그때를 염원해야 한다는 의식을 돌려주기 위해 신화를 혁명의 역사의 순간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일까.

    [공연 개요]
    공  연  명  :  <풍찬노숙>
     일      시  :  2012년 1월 18일(수)~2월 12일(일)
              (*1월 23일(월) 설 당일 공연없음) 평일 7시 / 주말 3시
     티 켓 가 격 :  일반 25,000원 / 청소년 15,000원
     공 연 장 소 :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작         :  김지훈
     연      출  :  김재엽
     스  태  프  : 드라마터그 김주연, 무대 정승호, 조명 피예경, 의상 오수현, 분장 이지연,                     안무 김형남, 음악 최정우, 소품 권보라, 조연출 박효진, 이시은, 무대감독 김지현
     출      연  : 윤정섭, 이원재, 김지성, 고수희, 김소진, 지춘성, 장성익, 조정근, 한갑수,
                   김효숙, 황석정, 하성광, 유병훈, 윤종식, 이혜원, 이정수
     러 닝 타 임 :  3시간 50분 (인터미션 15분 포함)
     공 연 등 급 :  14세 이상 관람가
     홈 페 이 지 :  남산예술센터
    www.nsartscenter.or.kr
     S   N   S  :  페이스북  facebook.com/nsartscenter  트위터 @nsartscenter
     주     최   :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주     관   :  서울문화재단, 서울시창작공간 남산예술센터
     제     작   :  서울시창작공간 남산예술센터
     공 연 문 의 :  02.758.2150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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