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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한팩 라이징스타> 첫 번째 편 리뷰 : 차세대 안무가 3인을 만나다...
    REVIEW/Dance 2012. 3. 20. 23:59


    <2012 한팩 라이징스타>는 한국공연예술센터(이하 한팩)가 선정한 무용계의 2012년의 라이징스타 6명의 무대를 가리킨다. 이는 한팩의 주요 추진 과제중 하나인 차세대 예술가 육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주 3.16-17일 공연에는 황수현·윤푸름·금배섭으로 구성된 1팀이 무대를 선보였다. 이어 전성재·이재영·지경민으로 구성된 2팀이 3.23-24일 두 차례 공연을 올린다. 한팩은 ‘젊은 무용인들의 활발한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자 2011년에 이어 <2012 한팩 라이징스타> 제작을 기획하였다.

    황수현, <Co-lab : Seoul-Berlin> : 과정적·관계적 리서치

     

    ▲ 지난 3월 6일(화) 오후 5시경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에서 열린 <2012 한팩 라이징스타> 쇼케이스 모습, 여섯 작품이 십여 분간 짧게 본 공연을 압축해서 내지는 일부를 선보였다.(이하 상동)

    두 안무가(임지애, 황수현)는 창작의 과정, 워크숍 메소드, 리서치 자료들을 그대로 무대에 펼쳐 놓는다. "real(실재)"를 묻는 질문, 자신들의 행위가 곧 실재인지를 묻는 메타 질문은 무대를 관통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제4의 벽에 의한 환영적 세계를 창출하며 관객이 여기에 동화될 것에 대한 철저한 대립으로써 작품을 구현해 낸다.

    이들은 사르트르의 견해를 빌리자면 영상(image)이 아닌 대상(object)으로 위치한다(처음부터 이들은 관객이 들어오는 것과 맞물려 관객을 바라보고 대상으로 서 있다-기실 이것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무대 전체의 개념에서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반면 이 역할로서 어떤 동화가 아닌 신체 자체에 대한 자각과 생성의 몸짓들은 관객의 감각에 체현되는 바가 크다. 곧 우리의 신체는 여기에 감응하며 크게 보면 우리라는 하나의 영상으로서 실제적으로 그들은 무대에 위치하는 것이라고도 바꿔 말할 수 있다.

    움직임을 정의하는 것보다도 그 거리 안에서 만나질 수 있는 방법들을 찾고 있는 것에 더 크게 방향을 잡고 있고, 더 구체적인 공통적인 몸짓들이 만들어질 때 다시 한 번 해보자 하는 것이다. 몸짓·움직임이 어떻게 구분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개념 자체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가야 할 것 같다.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어두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이 둘의 관계망을 형성하는 측면에서 공연을 바라볼 수 있는데, 자신들이 튼 영상을 바라보며 서로의 배에 손을 갖다 대고 있는 모습은 서로에 대한 감응을 유도한다. 이 둘이 갖는 질문은 각자에게서 (상대방의 몸을 타고) 오는 목소리의 메아리를 이를 자신에게 다시 보내며 공통의 자장으로 수렴되는 가운데 의미를 얻는다. 이 질문은 무대 자체에 대한 관습을 깨는 자각적인 물음이지만 그 이전에 서로의 몸을 감각하며 함께 하는 과정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는 둘의 실제 겪었던 삶의 경험이 무대에서 발현되는 안온함의 분위기를 낳는다.

    이 둘을 추동하는 것은 그래서 '어떤 하나 되기로서 불가능의 소통'을 안무로 바꾸려는 이들의 시도 아래 몇몇 자의적인 말의 규칙들이고, 또 하나는 '매체적인 성찰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영상들과의 조우'이다.

    ▲ 황수현 안무가

    "언어를 사용한 것은 다른 형식으로 들여다보자는 것. 어떤 미디엄을 써서 상대방을 움직일 수 있을까 라는 것.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어떤 결론을 내기는 어렵고 이제 공연을 끝내고 어떤 것을 더 열어서 들여다봐야 하는지, 곧 무브먼트인지, 소통인지, 어떤 것을 더 끌어와야 하는지 시간을 두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결론을 열어 뒀던 지점이 다음 지점을 가야 하는 것이다."(황수현, 지난 3월 6일(화) 오후 5시경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에서 열린 <2012 한팩 라이징스타> 쇼케이스 및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우선 움직임이 아닌 순간적인 몸짓들에 그치는데, 이는 처음에는 황수현의 마이크를 타고 자의적으로 형성하는 목소리의 규칙들을 따라, 다음에는 이미 녹음되어 있는 목소리에 따라 두 사람의 몸짓들로 분해 간다. 이는 안무라고 할 수 있는가의 물음은 자연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농당스(Non danse)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고 그 순간적이고 정교하지 않은 몸짓들은 오히려 그 몸짓들을 구가하는 말들의 무한한 생성의 과정(-거의 무의식적인) 동시에 그 단순한 몸짓들에 그치는 말들의 표현력을 통해 비언어적인 춤의 영역과 그 경계를 시험하는 것에 가깝다.

    두 번째 안무의 작동 방식은 이들이 채집한 영상들과 무대에서의 관계 맺기의 양상에 있는데 여기에 나르시시즘의 전도된 시선이 눈에 띈다.

    곧 영상 속에 거울이라는 일종의 스크린을 보며 자신의 영상을 확인하며 모방의 관계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에서 그 영상(거울)의 존재가 먼저 모방자를 벗어날 때 이는 단순한 거울이 아닌 두 일치되지 않는 것의 비동시성을 띤 움직임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곧 움직임의 일치라는 수렴이 아닌, 차이의 발생은 환영을 성립시키는 법칙에 대한 전복적인 지점을 가져가는 것과 같다.


    한편 동시적으로 벌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이 안무를 거리를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에서 주고받는 장면의 영상은 무대에서 두 개로 나뉘어 틀어지고(이는 안무가 차이를 갖고 또 다른 세계의 평면들에서 구현되며 이것이 동시적으로 구현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여기에 다시 무대에서 움직임이 더해지기도 한다. 또 다른 예는 영상을 틀고 영상 바깥의 무대에서 움직이는 것을 동시적으로 구현하기도 한다.

    이들이 매체를 활용하는 방식은 단순히 무대의 부가적인 장식물의 차원에 그것을 둠에 있지 않은데 영상은 그들 스스로를 반영하는 하나의 흔적이자 현재 그 속에 들어 있는 안무를 펼쳐내며 또 다른 하나의 평면으로 성립하며 그 경계를 인식하게 하는 분명한 부분으로 자리한다. 이는 그래서 역시 하나의 대상 차원의 존재로 자리하고, 그것과 동등하게 이들 역시 자리하는 것이다.

    자신으로부터의 거리 두기, 스스로들을 대상화하기, 동시에 불가능성의 소통을 몸들을 인접하게 하는 말의 구문들과 삶에서 채집한 영상과 질문들 가운데 이뤄 냄은 이들의 몸을 재현 층위의 환영이 아닌 몸짓들을 발현하는 대상으로 객관화하는 동시에 각자의 상대방 곧 타자와의 간극을 시험하며 그 극단까지로 치닫는 과정 아래, 스스로를 확인하는 자기 정체성의 확인 내지 자기 몸에 대한 탐구로까지 이어진다. 마지막에 이들이 한 몸으로 뒤섞여 치열하게 무대 바깥을 이탈함은 그 삶의 영역이 다시 무대 바깥을 넘어 계속해서 뻗어나감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는 무대로 다시 순환함까지를.

    금배섭  <보이는 것에 대하여_About being seen> : 우리의 시선에 대하여


    금배섭의 안무는 일종의 대위법의 구문이다. 두 개의 프레임(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 구조물이 무대에 존재하고. 한 여자가 눈을 껌벅이며 무대 하수에서 상수 쪽으로 걸어가고. 여기서 연결된 동시적인 장면이 무대 상수에서 펼쳐지며 높은 구조물에서 맨다리만 보인 채 이를 문지르며 자살을 하려고 버둥거리는 듯도 보이다가 양말을 벗어 던지는 것으로 일종의 해프닝과 같은 장면을 낳으면. 이를 TV화면처럼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무대를 뒹굴고 나면 무대 하수 방향으로 무대 하수 프레임에서 앞서 등장한 여자가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가고 이내 맨 팔들이 양 옆에서 수신호들을 만들고 나면 닭(무용수로 비-인간을 구현한다)이 출현한다. 이와 같은 장면이 수차례 반복되고 그 절단면에 암흑과 소리가 가로 놓인다. 가장 처음에는 암흑과 욕설로 이 공연은 시작되었었다.

    이 동시적으로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장면들은 실제 서로 다른 세계의 평면들이 비동시성의 측면에서 동시적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연관 없는 각자의 평면이 객관화의 평면 아래 하나로 수렴되며 세계의 어떤 동시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들을 배치한 것은 제가 보는 게 다르기 때문에 놔둔 것이다. 제가 보는 것들은 다 보지 않고 일부분만 보고 일부분만 듣고 제 3자의 말에 의해 생각하고 평가하는 것 같다. 스스로 진짜 이성적으로 본다는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금배섭)


    각자 나오는 사람들은 우리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영상의 측면이 아니다. 부분 신체들로 이뤄진, 그리고 비비는 것이나 눈의 끔뻑거림, 곧 전체적으로 닭의 움직임을 닮아 있는 이들의 움직임은 현실의 균열(이를 라캉의 '부분 대상 타자'와 결부된 욕망과도 연결 지을 수 있을 듯하다)을 나타내는 어떤 대상의 측면에 가깝다.

    장면들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무대 하수에서 상수 방향으로 가던 여자는 그 시선이 무대 바깥을 위치하고 있어 관객과 만날 수 없는 시선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평면을 의미하고, 맨 다리만 내놓고 살을 비벼 대던 사람은 실제 그 앞에 위치해 이를 무심하게 보고 있던 소녀에 의해 영상의 부분에 인접해 있다. 그리고 이 소녀가 무대 상수에서 하수로 가로 질러 움직이자 무대 하수의 평면들이 다시 작동한다(두 다른 평면은 연결된다). 그리고 닭은 다시 하수에서 상수로 움직인다. 곧 현실은 어찌 됐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좌우로 순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공간에 특별한 소리를 삽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평면은 의도적인 것이고 시각적으로 현실을 절취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 닭, 곧 비-인간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무용수의 모습

    목소리는 다시 시각적인 잔상을 아예 없앤 상태에서 놓임으로써 또한 사운드만을 절취한 감각들과 관객을 맞닿게 한다. 처음의 욕설 그리고 대중가요 그리고 그 암흑의 유사한 시간 크기만큼의 적막 등은 소리가 거세된 인위적으로 보이는 현실 풍광만큼 그 독자적인 영역으로 관객의 감각을 시험한다. 사건들의 병치 더 크게는 시각과 청각의 교차는 인위적인 횡단면을 통해 구현하는 명확하고도 지루한 작가의 안무법이다.

    ▲ 금배섭 안무가

    세상을 그저 객관적으로 보고(여기서 이 현실을 보는 어떤 유일한 시선으로서 소녀는 우리가 TV를 보듯 현실을 무심하게 보고 흘려보내는,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 무력한 주체로서 우리 모습의 영상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 시선에 대한 어떤 각성 측면을 부르는 차원에서만 영상으로서 그 소녀를 제시한 합목적적인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또 시각 차원을 배제하고 온전한 듣기 차원을 제시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듣기의 내용은 암흑을 제외하고는 어떤 스테레오타입화된 부분들인데 이 부분은 우리 자신의 영상을 보여주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윤푸름  <존재의 전이>  : 만나지 않는 기억과 관계들

     

    세 명의 무용수의 존재에는 할머니와 소녀의 세대 간 간극이 묻어난다. 

    앞선 두 개의 작품이 각각 안무가 자체를 만나는 시간과 현실 자체를 보는 시선을 제시했다면 이 작품은 다시 무대의 심연을 온전히 파고든다. 세 명은 삼각 구도를 이루며 대칭적인 관계 쌍을 만든다. 기억의 징후들이 묻어나는 존재자들은 오롯한 하나의 주체로 자리하기보다 늘 다른 존재자의 사라짐 뒤에 등장하며 어떤 존재의 흔적들을 가져간다.


    무대에 셋은 따로 놓이며 한 명이 무대 앞에서 움직임을 펼쳐 놓되, 뒤에 있는 다른 이는 그 앞선 존재자를 대상으로 품어 낸다. 이 사유하는 존재가 관객의 시선을 대리할 때 즈음 그녀는 무대 뒤로 사라진다. 움직임은 계속해서 유예되고 주체로 존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즉 심연은 떨어져 나간 몸의 흔적들로 채워지고 모호한 영상으로 남는다. 신체적인 것을 작동시키는 몸의 더듬음과 생채기 나는 듯한 몇몇 움직임들은 매우 부분적이고 확장되지 않는다. 음악의 사용은 고요하고 명상적인데 이 음악은 시선의 붙듦이자 작품의 고유한 아우라로 자리한다. 마지막에 그 음악의 반복이 주는 고양은 크게 치닫지 않는 움직임들과 순환 구도와 사유와 신체의 흔적들로 뒤덮는 가운데 해소되지 않는 자장을 남긴다.

    ▲ 윤푸름 안무가

    작품은 무대 내 시간을 하나의 심연이자 기억으로 전이시키며 이를 기억으로 또한 남긴다. 여기에 물리적 시간은 없고 환영과 같은 떠도는 흔적의 시간들만이 자리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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