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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 한팩 라이징스타> 두 번째 편 리뷰 : 차세대 안무가 3인을 만나다...
    REVIEW/Dance 2012. 3. 29. 03:09


    <2012 한팩 라이징스타>는 한국공연예술센터(이하 한팩)가 선정한 무용계의 2012년의 라이징스타 6명의 무대를 가리킨다. 이는 한팩의 주요 추진 과제중 하나인 차세대 예술가 육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난주 3.16-17일 공연에는 황수현·윤푸름·금배섭으로 구성된 1팀이 무대를 선보였고, 이어 전성재·이재영·지경민으로 구성된 2팀이 지난 23-24일 두 차례 공연을 올렸다. 이번에는 지난 첫 번째 공연을 다룬 데 이어 두 번째 공연을 다룬다.

    전성재의 <서른 즈음에> : 과거를 감싸 안은 유행가들...

    ▲ 지난 3월 6일(화) 오후 5시경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에서 열린 <2012 한팩 라이징스타> 쇼케이스 모습, 여섯 작품이 십여 분간 짧게 본 공연을 압축해서 내지는 일부를 선보였다.(이하 상동)

    전성재의 <서른 즈음에>는 일상에서 무의식으로 횡단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구조의 양상을 보인다. 일종의 변화된 의식의 지점은 무대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의 몸짓들로 인한 잠재된 것들이 떠받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식의 지점은 우리의 일상의 습관적인 말들의 위용을 갖추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말에 휘감김은 우리나 저들 무용수들 역시 똑같다. 비록 이것이 즉흥에서 비롯되어 낙찰되어 재연습된 말이라고 해도 그 모티프는 그러하다.

    이 말들의 잔치가 삶의 공통의 토대를 만드는 데는 역시 말들이 필요했다고 보인다. 이는 시대의 무의식의 결을 따르는 그것을 짚어 주는 지나간 유행가들의 배치로써 가능해진다.

    첫 번째는 듀스의 <우리는>의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하는 정체성 짚기, 두 번째는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의 오롯한 나의 정체성 형성 단계, 세 번째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의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하는 이별의 흔적을 삶의 지층에 되새김해보는 노래다.

    처음 말들의 잔치가 이들 존재를 무대라는 공간에 따라 분화 내지 확장되는 게 아닌 그 자체가 하나의 무대를 뛰어넘는 현실 공간, 그래서 판타지적 측면의 살갗을 선사했다면 이들의 무의식과 무의식의 노래의 흐름은 깜빡이는 눈꺼풀과 같이 어둠 속에 조그마한 빛으로 단속적으로 드러나며 무대 내에 분포시키는 것으로 기능한다.

    이들은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어둠 속에 기능하고 군무로 집단 무의식을 실현한다. 이는 실상 음악에 흘려보내는, 어떻게 보면 매우 대중가요에 따른 대중적인 코드의 감정 소진의 몸짓들로 구가되는 것 같은데, 중요한 것은 이 음악이 배경음악이 아닌 하나의 목소리로 기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음악이 오히려 하나의 존재를 이루고, 몸짓들은 그 결을 드러내는 묘한 전도의 지점이 비롯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음악들은 이 음악에 반응하는 관객의 신체를 낳고 그 음악이 지닌 시대성과 시간의 축적에 대한 감응의 크기를 억누를 수 없는 가운데 흘러가는 신체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음악에 동화된 신체들의 감정선을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 전성재 안무가

    몸짓들은 가벼웠다. 반면 안무의 요점은 몸짓들의 저항 못하는 주체성의 드러냄, 그리고 목소리로서 하나의 음악이 갖는 존재성을 형성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인다. 물론 이는 안무가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뒤에 두 작품과 비교의 근거가 되겠지만 안무가는 지극한 현실주의자다. 반면 과거로써 그것을 전도시킨다. 잠재된 형태의 매질들이 기억이 아닌 오히려 음악과 같은 바람인 것은 몸에 남은 흔적들을 찾아 가는 안무에서 일종의 시작 단계를 거쳐 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까

    지경민의 <Animate> : '내 안의 기계'...

    지경민의 <Animate>는 비-인간을 구현한다. 기계비평가 이영준이 말하는 기계기(machinic stage: 기계의 매력이 인간의 심리적·신체적 존재 속에 각인되어 인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 기간)를 당시 우리가 로봇을 가지고 노는 것에 대해, 다시 초자아의 권능을 우리가 소유하려는 것으로 해석해 본다면, 실상 이를 더 직접적이고 투박하게 보여준 것은 이재영의 <기타리스트_guitarist>다.

    <Animate>는 단지 그 기계기에서 동화되고 빠져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개인주의적인 세계에 더욱 침잠하는 것으로, 상상계가 상징계로 이전되는, 곧 법을 따르는 내지는 현실 원칙을 고수하는 일반인의 모습에 대한 재현을 보여주기보다는, 상징계 이전의 상상계 자체를 더욱 확장하며 기계 되기를 통한 궁극적인 안무 확장의 경계를 두드리고 있다.

    즉 그들에게 ‘상징계의 법’도 ‘엄격한 초자아’ 역시 없다. 따스하고 은근한 시선-곧 음악-만이 무대에 자리하는데 이는 놀이터에 노는 아이를 굽어보는 엄마의 시선의 작동 아래 한없이 뛰어노는 아이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엄마의 모습이 무대에서 실제로 이전된 것은 단 한 명뿐인 여자 무용수의 모습인데, 이는 특이점을 지니는 게 지경민을 포함해 남자 무용수들은 비-인간이라는 총체적 분절의 움직임 원칙을 비롯하여 표정이 없는 로봇을 전유하고 있지만, 이 여자 무용수만은 한결같이 웃음 띤 기묘한 역설의 존재 형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타자의 만남은 단숨에 아이들의 놀이터, 로봇들이 이루는 상상계에서 성적 욕동의 무의식적 부분의 신체에의 기입을, 무대에 기입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만화적인 움직임이라고 해서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은 아니다. 일상적이면서 일상적이지 않은 움직임들을 찾아보자고 했었고,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가구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가 가구가 됐을 때 움직임을 만들어 보자.”(지경민, 지난 3월 6일(화) 오후 5시경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스튜디오 다락에서 열린 <2012 한팩 라이징스타> 쇼케이스 및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지경민의 몸짓들은 이른바 비-인간을 자처함으로써, 아니 그 이전에 비-인간들이 남긴 형국에 그 세계로 들어가 다른 단면의 자아가 됨으로써, 자신을 바깥에서 관찰하는 시선을 관객에게 이전함으로써 자신이 보내던 또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그 시선을 관객에게 이전하며 그 시선에서 자신의 영상을 소외시키고 낯설게 드러내며 확장하고 있다.
     
    분절된 몸들은 이 안무의 감각이 부분 신체에서 또 다른 마디들의 절단과 뇌와 시각 체계의 다른 감각의 대체를 통해 안무를 직조함을 의미하고, 이 로봇 신체는 인간의 바깥에서 인간의 경계를 다시 씀으로써 분포되지 않은 감각들의 되살아남 감각의 확장과 재편을 경험하게 한다.

    이재영의 <기타리스트_guitarist> : 말과 몸의 리듬 사이

    이재영의 <기타리스트_guitarist>의 춤은 역동적이다. 그렇게 보인다. 그는 안무를 비예측의 지점에서 현장의 불투명한 공기에 신체를 부분적으로 풍덩 빠뜨려 현재의 사건을 찰나적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조응이나 조화, 익숙해짐 따위는 없고 이 신체를 이 무대와 객석 간의 전체적인 파동에 따라 그 기대를 어긋나며 행사한다. 퍼포먼스와 같은 또는 재현의 코드를 따르는 것 같은 순간과 총보의 우발적 펼침 사이에서 어쨌거나 그는 순간을 형성하고 관객의 동의를 구한다.

    마이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신체에 대한 영향력으로 작용하며 자신의 신체를 그에 뒤따르며 목소리를 옮기는 식으로 실제적으로 작동한다. 즉 마이크의 위치를 분배하며 목소리가 그를 따라야 하는 원칙에 신체는 즉각적인 반응을 하고 이는 매우 순간적인 순간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순간성의 이전과 촉발은 빔 반데키부스의 안무를 일정 정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순간들의 놀이와 말 자체에 대한 의미 없음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신체를 품은 말과 말로서 신체 움직임과의 유희적 신체 놀음은 순간적으로 작동해도 안무를 완성하는 그의 매끈둥한 몸에 대한 주목의 시선을 부를 뿐인데, 안무가 스스로도 이 무대의 끝을 또한 어떤 결과에 대한 예측도 수여하지 않으려는 매우 자유로운 정신 태도를 갖고 감은 인상적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쉽기도 한 부분이다.

    초자아적 권능 스스로를 예단하고 지배하는 법이 아니라 그 법 자체가 되는 자아를 뛰어넘는 슈퍼맨이 되는 것, 상징권력으로서 팔루스phallus 자체가 되는 것, 어린 시절의 꿈들을 언설로 붙박으며 그 말의 덧없음에 사라지는 그 말들의 후줄근한 자취에서 그는 온갖 유희적 몸짓들을 작동시키며 관객들에게 안무는 어떤 완성태나 과정들의 유기적인 집합장을 이룸이 아닌 파편적으로 형성된다.

    또한 그것은 놀이로서 완성되며 순간으로서 사라지는 것이라고 이재영은 무대를 통해 메타 언명하고 있지만, 그리고 이것이 그가 보여줄 수 있는 ‘메시지 없음의 몸’과 ‘유희 사이의 최상급 표현의 한 정점’을 찍는 것이지만, 실상 초자아에 대한 진단과 그를 통한 현실의 진단 면에서 앞의 두 작품이 각각 과거에 감염되며 무의식의 결을 들어가거나(전성재의 <서른 즈음에>) 어린 시절의 욕망을 어떻게 보면 유아기적 몸짓들의 축적과 재전유를 통한 발현, 그리고 기계기의 비-인간 되기의 몸짓들로 안무의 층위를 새롭게 재편하며 잠재성을 끌어오는(이재영의 <기타리스트_guitarist>) 얕고 깊음의 두 방식을 보여준다면, 그와 달리, 말로 대부분을 이룬 이재영의 무대에서 그 말의 얕음은 실상 어떤 것도 재현하지도 상기시키지도 않는 빈 말로 기능함으로써 어떤 의아함 같은 것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이재영 안무가

    물론 그의 몸이 갖는 잠재성의 밀도는 이 순간적이고 의식적이지 않은 파편들의 흐름 속에서 충분해졌고 잘 드러났다. 그래서 실상 흐르는 듯했지만 어떤 단단한 안무의 짜임을 짰던 의 안무에 비해 그의 몸은 꽤 많이 빛나고 섹시했다. 물론 어둠이 아닌 빛 자체를 드리우며.
     

    ▲ 안애순 예술감독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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