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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먼저 생각하는 자 – 프로메테우스의 불> 읽기 : '시작 단계에서 던지는 몇 가지 질문들'.
    REVIEW/Dance 2012. 3. 31. 22:49

    "무용수의 정체성은 무대 바깥에서 재형성되고 있었다"

    ▲ <먼저 생각하는 자 – 프로메테우스의 불> 연습 장면[=LG아트센터 제공](이하 상동)

    정영두의 안무는 자연 보는 이의 정서를 움직이는 미묘한 감정 작용의 흐름, 정동(affection)을 일으킨다. 처음 조명 장치가 돌아가며 빛을 뿜는 환경에서, 불을 품어 올리는 것과 같은 몸짓들은 무시간적‧원시적 세계의 어떤 존재가 생명의 기로들을 빚어내는, 대기들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잠재성의 연금술적 발명에 가깝다.

    움직임은 하나의 신체로 정위되는 게 아니라 어떤 흐름에 파고드는 부분, 신체의 움직임이 길어내는 대기에 신체 자체를 합치시켜 가며 정서적인 흐름을 만드는, 묘연한 흐름에 침잠되어 가는 질서가 있다. 이는 우연함의 물질적인 것, 신체적인 것 대신, 순간적으로 뭉쳐지며 그것을 기다리게 되는 반복적인 의식의 직조와 그것의 확장에 가깝다.
    이러한 탄생의 시점, 탄생을 품은 시점에서부터, 존재가 되기 이전의 존재자의 형국으로서 집단이 출현한다.

    어둠 속의 반-나신을 전유하는 내레이션은 인간과 동물을 수치적으로 비교‧분석한다. 인간의 근원을 탐색하기보다 그것을 재발명하는 데 더 가까운 이 작업은 이 인간의 쓸모없음-무용함-연약함을 구역질 날 정도로 짚어낸다. 실상 그 말투 자체가 기계적이다. 이러한 자기-서술이 갖는 동물과의 비교에 관한 성찰은 일종의 자기 비하 성격으로 흐르고, 다시 자기 스스로를 비하하는 비하형 인간의 특성 자체가 인간만이 가지는 고도의 우월한 정신적 태도임을 역으로 반증하고 있음은 눈치 채기 어렵지 않다.

    이 말들에 대한 관객의 일부 웃음은 자신이 속한 인류 자체를 대상화하는, 그래서 동등한 평면의 공감에서 벗어나는 비-인간적 관점에, 오히려 인간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가깝다. 어쨌거나 이런 나약하고 비루한(?) 인간을 제시하는 데서부터 인간에 대한 동정, 집단을 이루며 삶을 나누는 필연적인 이유를 끌어내는 것으로 응당 이어지게 되어 있다.

    쭉 일렬로 무대에 서고 제일 앞 사람이 천천히 돌며 뒤에 사람의 물건을 받고 그 뒤의 사람을 한 바퀴 다시 돈 이후의 시점에 만나 다시 물건을 받고 자신의 물건을 건네주는 물물교환의 형태는 이 모든 사람과의 동등한 교류이자 한 사람마다의 존재를 추어 올려주는 것에 가깝다.

    무대에서 존재는 곧 현존이라면, 한 명의 돎은 불안정하게 바로 감각된다. 곧 단순한 동작이지만 탄탄한 장력도 현존의 잠재성의 영향력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 미약한 움직임에서부터 이 작품에 대한 시선의 분할이 일어난다.

    나올 때 사람들의 음성을 듣는다. ‘아 생각보다 잘하던데, 무용수도 아닌데 말이야.’ 이런 식의 언설은 결과적으로 무용수와 일반인의 간극을 상정하며 모호하게 그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선의 유추 작용이 있었다는 말이며 현존과 퍼포먼스의 우발적인 요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훈련의 체계(-훈련을 통해 무용수로서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는), 그럴듯함의 어떤 평면을 상정하는, 그리고 여전히 잘 추는 무용수라는 주체의 상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말일 뿐이다.

    실상 처음 무대를 채우던 잠재성의 분화와 팽창 이후, 물물교환의 의미를 획득하기보다 일괄적으로 동작을 분배하는 동일성의 나눔 정도로 차이의 분별이 정해지는 것 같은 인상은 오히려 이 주체의 구분 이전에 따르는 어려움과 쉬움의 움직임의 차이와 그 대입에서 나오는, 이 작업 자체의 (구현되지 않음의) 부족분일 수도 있다.

    계속된 의구심은 이제 멈출 수 없다. 이 작품은 피나 바우쉬가 자신의 무대에서 ‘개별적인 자아에게서 나눌 수 없는 분할체(individual)로서 특이성을 끌어내는 다양한 대화의 메소드 방식과 그로 인한 무용수들 자신으로부터의 잠재적 요구들의 외화로 인한, 명확한 차이와 개별적인 것으로서 현존의 양상의 이끎’은 이 작업에서 기대해 볼 수 없다.

    공통적인 안무의 나눔을 통해 갖는 그 움직임을 초과 달성하거나 부족분을 가져가는 개별 무용수들의 움직임의 차이를 보는 가운데 이들이 어떤 과정에서 그리고 함께 이 작업을 느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함은 있지만, 개별적인 차원의 시간과 사유가 무대 자체의 이야기와 합치되거나 그 이야기 자체가 되는 지점은 찾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정영두가 지난 LG아트센터에서 안무했던 작품인 <제7의 인간> 역시 앞서 말한 나약함의 인간에 대한 표상과 그것을 바라보며 우리의 나약한 모습을 보는 정서적인 감응의 측면, 그리고 집단의 춤을 통해 동일함에 대한 차이를 확인시키던 양상은 이번 안무와 동일한 지점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때도 개별적인 무용수 간 역량의 차이를 보던 불편함은 현재 역시 동일하다. ‘왜 개별 무용수들의 공통된 움직임을 만드는 것으로 모든 시간을 채우는 것일까, 왜 개별 무용수들의 안무적 움직임이 그 자신의 시간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지도록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는 것일까, 왜 그들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모종의 상 곧 어떤 움직임을 한정하고 있는 것일까’, 작품 속에 움직임을 바라보는 ‘분할의 시선’(가령 정해 놓은 안무와 그것을 채우는 움직임들의 간에, 내지는 애초에 무용수가 아닌 사람들이 그 정도의 차이만 낳을 뿐 여전히 무용수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로 바라보게 되는 시선의 모순 등)의 간극을 메우려는 사유가 낳는 이러한 물음들은 계속 진행된다(이 작업이 끝난 것이 아닌 이제 시작에 불과한 것이므로).

    앞선 나약한 인간에 대한 정동은 이들이 앞을 응시할 때 적확하게 발현되는 편이다. 이들은 우리를 나약한 인간으로서 바라봄으로써 하나의 대상도, 또 우리와 친숙한 하나의 영상도 아닌, 우리 자신이 가혹한 세계의 평면을 바라보는 곧 우리 자신이 되는 전도의 평면을 빚어낸다. 이 점은 왜 그들에게 공감하고 끌리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안무적 진단이다. 하지만 정정하자면 이는 앞서 말한 응시의 개념은 아니다. 응시는 나를 보는 너를 다시 보는 작용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곧 나를 보는 너를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단체로 누워서 펼치는 손짓을 보건대, 이러한 수신호적 기호 내지 제스처는 신체 자체를 완전히 풀어헤치거나 확장시켜 세계에 맞부딪치며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하는 것이라기보다, 이 흐름 자체에 시선을 가져가게 하며 그 대기에 스스로를 흐트러뜨리는 수용 과정에 더 가깝다고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이들이 가진 잠재성을 낮추고 단조로운 동작들로 한정하며 그것을 반복으로 질서화하는 측면으로 감각되는 것은 왜일까. 이 부족분은 오히려 더욱 움직임의 가능성을 줄임으로써 움직임의 밀도를 확장하는 방식으로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가운데 더 잘 움직이고 더 잠재성을 충만하게 추인할 수 있는 존재에게서 채워질 수 있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그런 부분에서 이 움직임의 가능성의 한정은 오히려 매우 나약한(여기서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 측면이 아닌) 부유하는 움직임들의 잠재성의 부족분을 확인하게 했다. 실상 감응은 각 무용수에 대해, 그리고 커튼콜에서 그의 삶의 확장으로서 그들의 친지/가족의 환호로 무대 바깥의 응원과 환호로 번져갔다.

    이는 일반적인 무용 공연에서 작품에 대한 경탄과 응원이 아닌 그 무용수 각자에 대한 과잉적인 환호의 양상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각자의 삶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곧 작품에서의 존재가 아닌 그 실제 삶의 징후들을 그 각자들의 삶을 아는 사람들의 예민한 포착에서 얻는 감응은 실재이지만, 이는 작품에 대한 감응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한 게 아니다.

    이제 시작이지만, 이후 11월 17-18일 공연을 앞두고 펼쳐진 일종의 트라이아웃 공연으로서, 다시 시작이지만 어떤 식으로 개체성의 발현, 그리고 과정이 드러나는 수행적 흐름, 공통된 것의 인간적인 나눔, 현존의 단단한 에너지 등을 이어서, 지속적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 물음들을 던지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덧붙이자면 유행적으로 번지는 커뮤니티 댄스의 이름은 정말 실재하는가. 어떻게 보면 커뮤니티 댄스는 각자의 존재(개체)들 간의 나눔을 만드는 것이라기보다 새롭게 존재자들(-아직 명명되지 않은)을 통해 개체들을 발명해 내는 것 아닐까. 이러한 하나의 가정은 교류의 차원으로 환원되는 게 아닌 공통의 새로운 감각들을 공유하면서 어떤 하나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가령 랑시에르가 말한 '무지한 스승'으로서 안무가란 어떤 것일까. 곧 커뮤니티 댄스는 개체 간의 분리가 아닌 횡단일 것이고, 횡단에서 오는 나와 너의 인접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감각의 접점들의 공유일 것이다. 여기서 안무자의 개념(안무자와 무용수, 안무와 연습)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언어적인(목소리의)‧사유적인(각자의 삶에서부터의 생각들의) 안무가 신체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안무의 방식 또한 요구되는 것 아닐까.

    이 작품을 커뮤니티 댄스로 한정 짓거나 정의할 수 있느냐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커뮤니티 댄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의 한 변형적 조류라는 것은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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