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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애순무용단의 <백색소음> 리뷰 : 포화 상태의 세계에 그리는 무의미의 파편적 덧댐들
    REVIEW/Dance 2012. 4. 26. 15:04

    25일부터 26일까지 서울 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에서 공연되는 안애순무용단의 <백색소음> 첫 날 공연을 찾았다. 오는 5월 5일까지 열리는 제1회 강동스프링 댄스 페스티벌에서 현대무용 분야의 공연으로 초청받은 <백색소음>은 2007년 초연되었으며 2008년 앙코르 공연을 갖기도 했다. 지난 공연들에 비해 이번 공연은 전체적으로 대폭 수정이 따랐다.

    Intro : 전도된 평면 

    2007년 공연된 <백색소음> (사진 제공=안애순무용단) : 2012년 제1회 강동스프링 댄스 페스티벌에서 열린 이번 공연에도 개와 개 조련사가 함께 등장한다.

    이 백색소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무대를 감싸고 있는 대기는? 무대는 일종의 공백이지만 반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이는 ‘충만으로서 공백’이다. ‘보이지 않음이란 일종의 침묵’은 들림의 의식과 내면들로 전도顚倒된 평면으로 무화된다. 일차적으로 동기화되지 않는 사운드 지형을 그리고 있지만 움직임은 그 견고한 사운드 질서를 지우는 것에 가깝다. 움직임은 그렇게 더듬거리며 보이지 않는 ‘충만함 속의 공백’ 내지는 ‘들리는 것으로서 실상 들리지 않는 것의 주파수’를 찾아내며 성립한다. 결과적으로 움직임은 사운드가 전하는 ‘실상 아무 것도 전하지 않는 사운드 외부’로의 확산 지점에서 사라지며 그 사라짐의 지점에서 어떤 합치의 순간을 꿈꾼다.

    공백에서 탄생하는 이념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백색소음>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안애순무용단) : 2012년 제1회 강동스프링 댄스 페스티벌에서 열린 이번 공연에도 개와 개 조련사가 함께 등장한다.

    꿈틀거리는 무용수의 춤, 오프닝 신에서 춤은 단지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외부는 타자의 가치를 포기하기에, 깊이 없는 평면의 분자들로 익명을 선언하기에 이 낯선 움직임은 부분 신체의 분절 리듬의 지형을 그리는 그 자체의 탄력 있는 생기를 가져가기보다 오히려 이 의식 없는 주체 바깥에서의 어떤 분명한 의식에 대한 허망함, 이 공간의 외부에 대한 갈망이 스쳐 가는 가운데 흐릿하다.

    이들은 이들 안의 네모난 프레임 자신들의 외부, 한편 자신들이 잃어버린, 간극이 생긴 내부에 대한 분명한 윤곽선의 지형 아래 움직이는데 이로써 이들의 의식은 더 큰 보이지 않는 존재의 자리에서 그림자처럼 경계만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즉 드러나지 않는다.

    목소리 없는 움직임, 목소리를 끊임없이 그리며 외부의 시선과 이들을 외부로 만드는 이 바깥의 내부의 목소리 곧 사운드는 이 목소리에 대한, 존재자를 존재로 바꾸는 어떤 힘에 대한 호명을 갈망하게 하는데 여기에서 음악과 움직임 간 횡단은 ‘움직임의 내부로서 음악’, ‘음악의 외부로서 움직임’으로 각기 조우할 수 없는 평면을 그리며 경계를 그린다.

    현대인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백색소음>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안애순무용단)

    의식의 단초를 찾는 필연적인 나아감은 일상의 빛을 이들에게 수여하는 것인데 움직임은 훈련된, 구조화된 어떤 움직임으로 빚어지는 게 아니라 파편적으로 스쳐가는 것에 가깝다. 변죽만 올리는 몸짓은 분절의 리듬을 허락하는데, 제어되지 않음으로써, 알 수 없는 생기로 추동됨으로써 지배 받는 삶, 의식 없는 삶, 결코 온전한 주체의 자리를 가져가지 못하는 삶의 관성적 모나드들로 단독의 자리만을 점유한다.

    곧 이들은 절대로 섞일 수 없으며 한 명의 달려 나감은 이 충만한, 가득한 내부로서의 외부를 상정하는 무거운 발걸음이다. 이들은 이 충만함의 부피로 섞여 있지만 이 가로지름이 관계의 평면을 그리며 깊이의 차원을 새겨 넣는 것은 될 수 없다. 이들은 현대인이다.

    시선의 지배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백색소음>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안애순무용단) : 무용수 안영준이 남자 솔로로 당시 돋보이는 움직임을 선사했었고, 이번 공연에는 그 역할을 예효승 혹은 지경민이 맡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이들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알 수 없음으로 인해, 반면 어떻게든 이 움직임은 파편적으로, 또 파편(가령 부분 신체)으로부터 파생됨으로써 단지 무화될 뿐이고 중성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뿐이다. 이들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음악(일종의 음악이 외화면 목소리로 작용함은 무대라는 하나의 평면에서 음악과 움직임이 결코 서로를 벗어날 수 없이 결합함에도 오히려 이 음악 자체를 외부로의 확산적 표출로만 두는 데서 기인하는 듯 보인다)과 이들의 움직임을 어떤 표면 자체로 환원시키는 시선은 실상 이 네모난 프레임 바깥에서 움직이는 처음의 규칙에서 무대 외부의 구조물들이 솟는 장면에서 확실해진다.

    이 공간은 푸코가 언급한 판옵티콘Panopticon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어쩌면 이 공간은 수많은 감시의 시선이 하나가 아닌 다중으로 평면화되어 더 이상 하나로 수렴할 수 없는, 이 외부 자체가 내부가 되어 버리는 어떤 전도된 현실의 평면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이들의 시선은 그래서 다시 우리를 외부 속에 있는 내부, 보이는 대상으로 두고 이들의 살갗을 이 시선들의 중첩 속에 낯설게 매개되게 한다.

    그들을 보지만 보는 데 어려움이 있다. 아니 이 움직임은 너무나 한갓되다.

    현실 반영에서 어둠의 공백으로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백색소음>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안애순무용단),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에 특별한 오브제의 사용이 현격이 줄었다.

    이전 안애순 안무가의 백색소음은 매우 다채로운 사건들과 눈에 띄는 무용수들의 배치를 통해 잡동사니 같은, 그렇지만 선연한 선분들을 긋는 충격을 가시화하고 충격을 충격으로 감쇄하는 시각 기호들의 집합장 같았다는 기억인데, 이 속에서 가령 몇몇 무용수들은 그 바깥의 존재자들을 초과함으로써 시선의 응전에서 살아남는, 단독자로 기능했었다.

    반면 이번 백색소음은 어둠 속에, 하나의 평면에 목소리와 리듬, 제일 처음에 텔레비전의 전파 방출들의 반복적 구문과 치환들로 전개되는 가운데 어둠이란 공백 그 자체에서 머물며 이 가시화될 수 없는 어둠에 흔적을 더해가는 식이라는 생각만을 더할 뿐이었다.

    곧 움직임의 체계를 이루기 전의 몸짓들의 기호는 이미 더 새로울 것 없는 어둠 속에 목소리를 찾거나 전유할 수 없는 미끄러짐의, 떠다님의, 파편적인 주체로서 다만 지루함의 두께에 덧댐을 이어갈 뿐이다.

    가령 이 안에서 마치 어항 같은 공간 속의 끊임없이 부유하지만 빠져나갈 수 없는 갇힌 주체로서 물속에 헤엄치는 무대 바깥의 영상에 자신이 투영되는 한 무용수의 움직임은 그 외부를 관객석까지 확장하며 물속에 있는 스스로를 중첩시키고 또 무화시켰다. 이런 움직임의 시각화 작용의 흐름 속에 성립하는 인터액티브적 영상의 활용은 이 움직임을 대상화시키는 한편 매개되는, 중첩되는 시선들을 다시 상기시켰다.

    다시 상반신을 어둠 속에서 벗고 무대 상수 깊숙한 곳에서의 끝에 위치한 여자 무용수가 나타나 추는 춤은 에로티시즘이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그 빈 허울이 표면의 덧댐으로 나타나는 가운데 어정쩡한 위치로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생성되지 않는 덧댐의 층위

    2007년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백색소음>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안애순무용단) : 사운드가 아닌 존재자들의 백색소음의 상태, 사람들은 한데 섞여 있지만 개체에서 주체로 무대에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백색소음은 사실상 어떤 평형 상태, 무엇인가 더 더해질 수 없는 상태, 빠질 수도 없는 생성의 그침의 상태에 가깝다.
    이러한 중성의 공간은 외부와 내부의 전도된 평면, 시선들이 합산되고 또 그 시선이 더 이상 시선으로 기능할 수 없는 상태, 움직임의 도취가 허락되지 않는 파편적 발산의 스쳐지나감이 에너지의 덧댐 차원으로 무화되어 가는 상태로, 분자들의 집합과 운동, 그 무의미를, 주체의 자리하지 못함, 그 바깥의 주체가 이미 포화되어 있는 상태, 그로 인해 더 나은 주체의 자리를 바라지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덧댐의 작용을(때로는 아무 것도 안 하는 빼기의 작용을) 계속 하고 있었다. 사운드의 트랜스에, 또는 웅얼거림에 분절의 리듬과 파편의 분출로 응전하고 또 반응하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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