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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레 <스파르타쿠스> 읽기 : 발레를 완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REVIEW/Dance 2012. 4. 17. 12:35

    음악의 안무와의 조응 관계

    ▲ 12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스파르타쿠스>의 프레스콜 장면(이하 상동),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은 발레리노 이동훈

    <스파르타쿠스>를 이해하는 첫 단초이자 가장 중요한 자리는 그 움직임 이상으로 오히려 아람 하차투리안(Aram Khachaturian)의 음악의 라이브 연주이다. 이는 음악 자체만의 이해로의 소급과 음악에 대한 상세한 이해의 필요를 요구로 이어진다기보다는 ‘악단석 음악’의 청각의 시각화 작용을 인지할 필요가 있음을 가리킨다. 참고로 작곡가는 니콜라이 볼코프Nickolai Volkov가 만든 대본에 흥미를 느끼고 1940년대 초반에 작곡을 시작하여 1954년에 <스파르타쿠스>의 발레 음악을 완성하였다.

    음악은 부분 악곡들로 이뤄져 있고, 일종의 내러티브와 시각적 평면을 가정하는 효과음들이 중점이 되어 개별적인 음악으로 자리하지 않고 오직 이 움직임에 부과되는 것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하나의 순일한 흐름을 통한 차이의 반복을 이뤄내는 대신 악곡들의 부분 접합을 통한 각기 다른 단위들의 이어짐이기 때문에 이 음악에 대한 이해, 즉 그것들을 음악적인 기억으로 인지해 놓고 비교를 통해 음악의 상이한 차이와 반복의 즐거움으로까지 이해를 확장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즉 음악은 움직임에 대해 즉각적이다.

    움직임과 음악은 조응한다. 중요한 것은 이 악단석 음악이 움직임에 따르는 것이라기보다 움직임이 그것과 일치된, 곧 그로부터 안무의 철저한 훈련 체계와 습득의 반복과 그로부터 음악과 일치됨이 청각의 시각화 작용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 <스파르타쿠스>에서 크랏수스 역을 맡은 발레리노 이재우

    이 점은 이 음악이 더 생생한 차원의 살아 있음으로 여겨지게 만드는데, 이 음악의 살아 있음은 다시 이 안무들을 판타지로 때로는 스펙터클로 치환하여 순수한 음악적 인지 작용에 대한 사유를 잊고 더 큰 시각적 만족으로 유도하는 기능으로 가려진다.

    악단석 음악이 극장의 여러 곳에 설치된 스피커의 확장으로 인한 사운드로 확장되기보다 오히려 은근하게 스피커를 그곳에서부터 확장되어 울려 퍼지게 장치해 놓음으로써 이 음악이 오로지 무대로 수여되고 확장되는 것으로 느껴지게 하는 것은 일종의 장치의 기술적 효과에 다름 아니다.

    한편 음악의 악곡의 완성(사실상 완성보다는 단절과 사라짐에 가깝다)과 다른 악곡으로의 이어짐은 어떤 예측된 범위를 벗어난다. 이것은 순전한 영화나 연극이 아니기에 내러티브의 중단된 효과와 접합으로 인한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이 음악은 안무에 앞서 주어진 것, 선행하는 것, 끝없이 펼쳐지는 것으로서 속성을 지님을 의미한다. 음악은 언제나 안무를 감싸고 초과한다.

    ▲ <스파르타쿠스>에서 프리기아 역을 맡은 발레리나 김지영과 스파르타쿠스 역을 맡은 발레리노 이동훈

    음악 안에 포섭되는 안무는 그럼에도 그 음악의 정신없는 스펙터클의 화려함을 넘어 안무의 배면이 되는 것 같은 또 다른 동기화synchronizaion된 순간을 남기거나 때로는 비동기화된 순간을 낳기도 하는데, 가령 발레가 땅을 상정하지 않는 꼿꼿이 땅으로부터 일어나 그것을 숨기고 도약하는 날갯짓을 통해 천상을 지향하는 예술이라면, 극단의 점프는 순간적으로 정적을 빚어내는 동기화되지 않는 떨림과 다시 땅으로의 강한 두드림을 낳음으로써 이 바닥이 실재적으로 존재함을 의도치 않게 알리게 된다.

    빛과 어둠의 자리

    1막에서 화려한 군사들의 복식과 무대는 연주 역시 요란하게 그것들을 시각화하는 움직임으로 빚어지게 된다. 크랏수스 역의 이재우의 움직임은 어떤 사건으로서의 한 부분을 형성하기보다 부대가 자리하는 장면에 단단하게 부착되어 있음, 그 안에 녹아 있음을 가리킨다.

    3막에 이르러서는 크랏수스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욕망을 깊숙하게 드러내는 예기나의 어둠 속 자취에서 그녀의 개성이 두드러지고 화려한 빛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비해 <지젤>에서 지젤이 실재의 순간을 낳는 순간에 근접하는 프리기아의 장면을 남기게 된다. 곧 음악이 채 동기화시키지 못하는 지점, 내면이 파열하는 순간.

    ▲ <스파르타쿠스>에서 예기나 역을 맡은 발레리나 이은원

    주인공의 몫은 제목과 같이 오직 <스파르타쿠스>에게 맞춰져 있고 그 배면에 프리기아가 대칭을 이룬다. 크랏수스와 예기나는 어떤 화려함의 세계, 뚜렷한 현실에 잠겨 있으며 장식적인 움직임들에 가까운 무대를 형성한다면, 부분 신체와 정적을 형성하는 움직임은 스파르타쿠스와 프리기아에 의한 것이며 이때 음악은 끝없이 펼쳐지는 이야기의 흐름을 펼치거나 움직임을 초과하는 역할 대신에 숨을 죽이고 현재에 시선을 고정시킨다. 곧 화음의 확장 대신 내면을 반영하며 움직임 자체를 빚어내는 데 음악의 역할이 전환된다.

    청점聽野을 어디에 두느냐는 이 음악의 조절에 따른 것이기도 한데, 화려한 복식들과 전체적으로 밝은 조명이 확장과 초과의 이어짐으로 객석에까지 전이되는 세계에 대한 감각으로 번져 간다면, 이 숨죽인 음악의 경우는 이들 내면을 반영하는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여기에는 부분 조명만이 쓰이고 전체적으로 어둡게 채색된다. 청각의 시각화는 비로소 시각에 대한 청각의 조응 같은 동기화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럼에도 <스파르타쿠스>의 안무는 음악의 가파른 능선을 타고 큰 활갯짓과 음악과의 적확한 동기화를 달성하는 움직임의 낙차와 큰 스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객이 완성하는 발레라는 세계

    전체적으로 <스파르타쿠스>는 시청각 평면의 동기화 작용은 관객의 환호성의 터뜨림을 서서히 달궈 나가는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특히나 막의 정점을 치달아 갈 때는 이동훈의 단독적인 장면에 맞춰지고 파열하게 되는데, 은근한 음악과 안무의 조율과 일치는 여기서 그 세계를 벗어나는 그 세계를 실재로 바꾸어 인지하게 하는 경계를 그리게 하고, ‘스파르타쿠스’가 아닌 ‘스파르타쿠스’를 완벽히 전유하는 이동훈의 연기, 이동훈의 테크닉 자체가 하나의 동기화된 시각화의 평면을 벗어나 안무 그 자체로 두드러지는 순간에서 객석까지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게 된다. 여기서 음악은 초과되지 않는 순간을 만든다. 어쩌면 음악과 움직임의 동기화는 무대와 관객과의 반응과의 동기화를 예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곧 이 인물 간의 대립, 외부와 내면의 대립, 두 가지 평면에서의 음악과 움직임의 차이가 크게 존재하고 있고 안무는 음악의 재잘거림의 효과음(재치 있는 안무들이 이에 구현된다)과 화려함의 스펙터클(군무 신)에 대립되어 멜로디 라인이 강조된 내면의 표출(어둠 속의 인물 개인에 초점이 맞춰질 때)과 움직임이 정점을 찍으며 객석으로의 파열을 부를 때 곧 테크닉 자체가 실재화될 때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인물들의 개성

    <스파르타쿠스>가 지배와 종속의 단일한 평면을 깨뜨리고 탈영토화하는 자유의 욕망과 목소리를 지닌 인물로서 매력을 지닌다면(관객이 온전한 하나의 영상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는 인물이라면) 크랏수스에게는 실질적인 권력의 빛의 영도 아래 머물지만 그의 정의와 욕망의 분출, 능력을 따라가지 못한 채 결핍을 잠재화하는 히스테리적인 인물로 분하고 있는데(결과적으로 안무와 개성 모두 호응을 얻기 어려운 캐릭터가 된다), 오히려 욕망을 현실로 온전히 작동시키는 존재로서 <스파르타쿠스>와 비견되는 예기나는 그보다 오히려 하나의 캐릭터로서 힘이 있다. 

    처음 고개 숙이고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형상화한 스텝을 밟으며 등장하는 노예를 첫 표상한 프리기아는 이런 현실의 권력과 욕망의 주체적 자리를 점유하는 다른 세 인물에 비해 연약한 하나의 인간, 노예의 지위로 격하되기보다 아감벤이 이야기한 ‘호모 사케르’와 같은 벌거벗은 신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전체적으로 남성적인 안무로 상정되는 <스파르타쿠스>에서 예외적인 평면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감정에 도취된 듯한 눈빛을 내리깜의 제스처(대개 발레리나의 표정은 힘든 안무를 내색 않는 미소로의 화응의 평면-대개 앙상블의 경우에 해당-이거나 개별 주체로서 주인공의 경우에 어떤 연약함을 표상하는 밑으로부터 정서를 길어 올리듯 특유의 표정-제스처의 평면이 있다)는 더욱 아래로의 시선으로 확장되며 닿을 수 없는 신체-존재를 나타낸다.

    프리기아의 연약하고 부드러운 움직임들은 <스파르타쿠스>의 죽음 이후 절망을 전유하는 강력한 힘으로 분하게 되는데, 이는 1‧2막의 크랏수스를 위시로 한 군대의 힘찬 안무가 정점을 찍었다면 이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애도하는 목소리들의 무대 뒤의 악단석 음악이 최초로 무력화되고 정적의 사태를 빚는 현실의 목소리들이 가시화되는 순간과 이어지며 슬픔을 오롯하게 간직하는 하나의 순간을 만들게 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스파르타쿠스>의 남성적인 것의 배면에 여성적인 것이 있고(이는 딱딱함이 아닌 유연함과 부드러움의 안무로 발레를 구원한다), 이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는 파우스트 박사의 말에 빗댄 괴테의 이념이 <스파르타쿠스> 내 역사의 종말이라는 단편을 슬픔의 정서적 차원으로, 뜨거운 신화의 이야기로 완성하는 차원을 띤다. 여기서 프리기아는 스파르타쿠스를 대신해 주인공의 유일한 몫을 가져가게 되는데, 오로지 독특한 움직임만이 ‘발레’에서 현재의 삶의 주체적 영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또한 스파르타쿠스의 배면에 남성적이어야만 했던 그의 삶의 한 부분을 보완하고 또한 대칭적으로 구성하며 절망에서 절망적인 희망의 한 가닥을 선사한다. 이 점은 앞선 효과음이나 음악의 초과로서의 동기화가 아닌 목소리의 출현과 함께 발레로서 <스파르타쿠스>의 장점과 특이점을 동시에 고양시키는 장면이기도 하다.

    [공연 개요]
    일시: 2012년 4월 13일 (금) ~ 2012년 4월 15일 (일)
    장소: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제작진: 음악 | 아람 하차투리안/안무 | 유리 그리가로비치 / 무대․의상 디자인 | 사이몬 바르살라즈 / 무대․의상 제 작 | 러시아 그라스나다르 프리미에라 극장
    연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지 휘: 마르지오 콘티
    출 연: 국립발레단
    예 술 감 독: 최태지
    관람등급: 초등학생이상
    주최: (재)국립발레단
    문의: 02)587-6181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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