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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2서울국제공연예술제 개막작 (아)폴로니아 리뷰 : 현재에 대한 연기(延期)
    REVIEW/Theater 2012. 10. 9. 13:45

    (아)폴로니아, 나치에 의해 거행된 유대인 학살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국이었던 폴란드에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비극-되기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그 과거의 한 비극적 지점에서의 끊임없는 되돌아가기를 감행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현재에 대한 연기(延期)는 스크린 매체의 반영과 반투명 스크린 구조물의 경계, 역할 되기와 현재 인물의 간극들 등에 의해 발생한다. 여기서 현재란 과거가 중첩된 시선에서만 유의미하며 따라서 현재는 다시 사고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이 갖는 신화라는 프레임은 역설적으로 신의 질서를 벗어나기 위한 측면에서 사용되었다.

    하나의 우화 같은 동화들 들려주는 가운데 이피게네이아란 전쟁 중 희생된 신화 속 인물을 투영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이 둘로 상정되는 인형은 지하철 의자에 물론 침묵하고 앉아 있는데, 이를 가깝게 비출 때 인형은 사람을 아주 많이 닮은 그저 인형일 뿐이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언급한 언캐니, 곧 친숙하지 않은 것이 주는 기이한 느낌과는 조금 다른 이 인형은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는 대신 일종의 배우들이 이를 앞에 감싸고 인형극을 펼치는 데서 미세하게 조각되는 부분들의 움직임에서 살아나는 측면이 있다. 아련한 동화와 신화라는 상징적 과거, 실재의 트라우마적 사건들은 마치 인형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는 것과 같이 과거를 되살리려는 시도에서 연관된다.

    무대 바깥의 영상 매체는 무대와는 다르다. 이피게네이아 소녀는 무대 끝과 끝을 마구 뛰어가며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무대 바깥에서의 타자를 향한 시선을 상정한다. 음향 효과와 마이크, 무대 인물들을 찍는 영상의 결과 이를 들고 찍는 남자의 떨림이 더해지는 가운데 미세한 현실과의 차이로 반영되는 스크린은 현실을 다르게 조감하는 하나의 장치에 가깝다. 이는 보지 않는 면을 보이게 한다기보다 보이는 면을 더 과장되게, 다른 이미지로 번역하는 작업에 가깝다.

    중심의 자리에 밴드는 갑작스럽게 스크린 앞에 다가서며 노래를 하고, 무대 음악으로 또 빈 시간(無)으로 채우며 그것들을 재현의 지나간 흔적으로 되새김하며 흘려보내는 한편, 또 다른 시작과의 시차를 생성한다. 노래가 진행되는 가운데 무대는 작업 중에 있다. 무대의 재현은 메타적인 층위에서 접근되는데, 무대가 다시 세워지고 시작되며 이러한 몇 개의 분절된 시퀀스들이 접합되는 식으로 드러나며 ‘연극의 구성됨’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시퀀스들의 사이에 일종의 무를 전면에 내세움은 연극이 비워질 수 있음을, 정해진 구조에 얽매이는 기승전결과 같은 하나의 ‘연극에서의 신화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 군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은 전쟁에 관해 자기 지시적 물음을 던진다. 무대 전반에 핀 마이크가 설치되어 울림을 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마이크를 대고 이야기하며 그의 목소리가 하울링과 같은 매체적 변용의 효과를 얻기도 한다. 전쟁으로 죽은 이들의 피상적인 숫자로 상정되는 ‘메마른 통계’는 파토스적으로 분출된다.

    신화는 현재와의 연속성에서 출발한다. 이미 인물들의 결정은 운명적이고, 정해져 있는 결론인데, 그리스 신화와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인물들과 연결시키는 가운데, 사유하는 비판이 아닌, 이 고통이 체화되어 있는 기억들로 제시된다. 자조적이고 냉소적 자기물음들은 가해의 인정과 그에 대한 비판의 수용까지 포함하며 스스로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측면에서 아주 절절한 사유로 소환된다. 일종의 담론 연극의 측면을 띠고 있는데, 그의 말 자체에 자기변호의 역설과 궤변의 논리로 진릿값을 얻는 데서 오는 균열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성 인물의 신발을 벗는 행위는 뭔가 의식적이고 수행적으로 비춰지는데, 말이 출발할 때를 비롯하여 다시 걸어가는 등의 무언가를 시작할 때 신발을 신음은 인물을 멈춰 서게 하고, 벗고 나서는 한결 가벼워진다. 어머니 그리스 신화 속 남편 아가멤논을 죽인 클리템네스트라는 정당하게 죽었다고 그의 아들 오레스테스는 이야기한다. 배우들은 역할에 대한 현재의 시선에서의 이야기를 꺼낸다. 거리두기를 통한 관객과의 매개적인 사유를 발생시키다 갑작스런 역할로서 몰입과 파토스를 토해 낸다.

    태양(빛)의 신 아폴론은 우쭐거리고 장난기가 넘치며 재간을 부리는데 근엄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아폴론의 목소리는 공중 전파음(on the air)으로 울려 퍼진다. 속 빈 말들이 마치 공중에서 분해되는 형식이다. 아폴론은 자신이 은혜를 입은 아드메토스를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듣는다. 여기에 희생을 자처한 사람은 아드메토스의 아내, 알케스티스이다. 이피게네이아에 이은 두 번째 신화 속 여성의 희생이다.

    미국 서부영화의 스타일을 전유한 힘센 영웅 헤라클레스가 나올 때, 식탁에서는 검은 의상과 배경 아래 알케스티스의 죽음을 건조하게 또한 무기력하게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다. 이는 다시 모호하게도 이피게네이아의 죽음과 겹쳐지는데, 이천 년대 이후 컨트리 가수 정도의 정체성을 보이는 오레스테스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와 오레스테스 등이 다시 무대에 출현한다.

    두 개의 컨테이너 박스 크기 정도의 기다란 투명 구조물을 경계로 그 안에서 또는 그 앞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는 이 바깥에서 목소리가 이 구조물 안의 인물을 향할 때 닿을 수 없는, 절절함과 외로움의 경계가 그려진다. 오레스테스와 클리템네스트라의 혈연적인 운명 공동체의 관계는 이미 태어남 자체가 죄악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전쟁과 죽음 자체가 모든 운명의 시작으로 소급되며 현재는 과거로부터 다시 사유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운명을 보여준다.

    한편 신화가 인간의 세계로 전유됨으로써(사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신의 가치는 상정된 것이고(곧 신이 인간이므로 인간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은 없다), 신이 없는 상황들에서 우리가 아는 신의 신비한 무형적 존재의 지위에서 고뇌하고 고통 받는 신화를 통해 운명으로서 과거와 악전고투하는 현재형 인간의 모습만이 남게 된다.

    2시간 30여 분의 일막 이후 이막은 여성 박사의 모습을 전유한 인물을 통해 렉처 퍼포먼스 형식으로 진행된다. 나치의 ‘도살’이 언급되며 죽음은 단지 한명만의 죽음을 체감할 수 있을 뿐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앞선 통계치의 죽음은 부정된다. 그러한 도살은 독일 국민(과 사실상 많은 주변 국가의 암묵적 수용과 간접적 도움)의 자발적 무지의 수용 속에서 이뤄졌고, 나치의 죄악이 가해진 유대인 피해자들이 동물로 비유된다. 타자와 자신과의 완전한 다름이 전제되며 합리적으로 동물들을 재단할 수 있음의 사고방식의 전유에는 분노의 일갈이 섞여 흐른다. 곧 앞선 통계치의 언급에서 볼 수 있는 자조 섞인 분노는 여기서 연장되고 있다. 이러한 복잡하고도 분노의 파토스와 사건에 대한 거리두기식 사유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적 논증은 꽤 기나긴 시간을 지나고, 각 시퀀스로 분배되는 인물들은 빠르게 중첩되며 섞이기 시작한다. 이는 이미 두 여성의 희생이 중첩되면서부터, 곧 장례식을 준비하는 듯한 모습들에서 감지됐었던 바다.

    모든 이들이 한 명씩 들어와 경계를 허물고 투명 구조물 안에서 밴드의 노래함에 함께 즐기는 모습은 꽤 평온하다. 앞서 막과 막의 사이 공간을 채우던 노래는 위로의 차원에서 무대를 채우기도 했다. 이 노래라는 형식은 가수의 역할과 연기로 규정되기보다 그저 하나의 부가되는 잉여의 노래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무대를 비우는 노래는 이 모든 논증과 치열한 갈등들을 뛰어넘는 아니 다시 잠재우고 새롭게 시작하는 시간으로 작용한다.

    아폴로니아라는 인물은 19세기 러시아 통치에 저항하는 뜻으로 사용된 폴란드의 여자 이름이자 한느나 크랄(Hanna Krall)의 동명 작품에서 25명의 유태인 어린이를 구하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여자로 작품의 전제가 되고 있다. 재밌게도 Polonia는 스페인어로 폴란드를 뜻하는데, 실은 이 아폴로니아에서 a가 부정 접두어로 쓰이는 관례로 비춰볼 때 (아)폴로니아(Apollonia)는 아폴로니아라는 여성의 희생, 곧 아폴로니아의 부재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쓰였다고도 보인다. 곧 잔다르크와 같은 숭고한 희생을 통한 나라의 보존이란 사실이 폴란드에 각인되어 있는 한편 그 사실이 은폐되어 있음, 또는 망각되어 있음을 들추는 데서 아폴로니아는 출발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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