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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톺아보기] 이중적 기호로 전개되는 <햄릿6>
    REVIEW/Theater 2012. 11. 12. 00:17

    역할이 아닌 존재

     

     

    붉은 빛을 띤 공간 아래 위스키, 와인 등의 술 종류가 진열되어 있고, 커피메이커, 주방을 가려 놓은 커튼, 나름 모던한 분위기로 연출한 지금은 구식으로 감각되는 어느 풍광이다.

    여기서 오필리어는 낭만주의적 떨림을 한가득 안고, 대사를 외고 있는 것만 같다. 철저한 말들의 잉여로 점철된다. 80·90년대 시대 배경에서 이러한 역할 놀이 속에 드는 기시감은 재현보다는 사라진 것에 대한 정취를 도출해 낸다. ‘연기가 주는 과잉의 진지함은 그 시대의 무게’이다.

    오필리어의 이름은 무엇일까. 사실 이 극에서 오필리어의 이름을 알 수 없다.
    이 진지함은 실상 역할이 정체성이 된, 진지한 대사를 삶의 의문으로 치환할 수 있었던 시대의 무게까지 재현되는 가운데 출현한다. 따라서 우리의 옛 젊은 청춘이 오필리어의 역할을 맡은 “국화 옆에서”라는 카페 종업원이 오필리어라는 서구 연극의 아우라가 덧씌워진 가냘프고 가혹한 운명의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며, 아니 그 사이에서 불분명하게 드러나며 오필리어는 메타 측면과는 다른 차원에서 제시된다.

    여기서 카페 종업원은 그저 하나의 주어져 있는 신분이라면, 오필리어는 그녀의 연기될 수 없는 정체성에 가깝다.

    안경 끼고 노트북을 펼쳐 놓고 미동 없이 앉아 있는 작가 호레이쇼는 이 재현의 층위에서 한발 물러나서 3자적 서술자로서 거리 두며 연출자의 시선을 매개하거나 극 바깥에 중첩되는 식의 메타 층위를 상정한다.

    망령에서 좀비로의 전환

    일종의 역할 놀이는 특수한 시대의 역할-되기이다. 햄릿 아버지, 곧 원작의 망령은 전봇대 밑에서 발견되는데, 구천을 떠도는 망령으로, 또한 부패한 시체로 묘사된다. 그는 햄릿을 향한 발화 층위로 햄릿과 조우하기보다 서술 층위가 덧붙여지는 가운데, 극은 시대의 진실에 다가서는 데 한층 주안점을 두게 된다.

    이 아버지는 일종의 좀비와 같이 머뭇대며 영혼 없는 움직임을 갖는다. 또한 뒤가 아닌 전면에서 등장하며 뒤에 위치한 햄릿과 거리를 두게 만든다. 호레이쇼는 망원경을 들고 시체 대신 ‘환영’이라는 발견을 하고, 이내 가까이 가서 ‘청진기’를 대보고 시체에서 숨이 띔을 확인한다. 곧 ‘실재적 환영’임을 강조한다. 연출이 농담을 건네는 것이다.

    이 유령은 ‘가까이’로 그 거리를 압축하고, ‘내밀하게’ 진단한 후에야 이는 망령이 아닌 좀비(undead)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이전된 신체는 신체와 영혼의 분리 따위를 상정하지 않는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신체에 저당 잡힌 영혼이 햄릿의 시대를 가로지르는 것이다.

    사지가 와해된 고통을 느끼는 시체들이 덩어리로 지나가고 현실의 인물들에게는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 죽음의 열기가 그의 몸에서도 솟구쳐 간다. 여기에 헬리콥터 바람이 무대를 뒤덮고 인권 탄압의 광경이 중첩된다.

    죽음 이미지, 유동하는 현재, 가늠할 수 없는 의식이 한 덩어리를 이룬다. 이 죽음은 분명 원작의 햄릿이 아닌 시대감각에서 온 것이다.

    편집증과 분열증

    신체를 유기하는 두 기관원은 살인 이후 겪는 트라우마를 전한다.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다.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두 눈이 몸서리쳐진다.”

    따라붙는 죽음 이미지, 환시적 육체로 인해 일종의 분열 증세를 겪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햄릿6>는 피해자 가족과 역사의 상흔 이전에 일종의 청부를 받은 중간자 입장에서 그 죽음을 직접적으로 겪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원작 햄릿에서의 부왕을 죽임은 이제 정부의 고용된 살인청부업자들의 숙명으로 바뀐다.

    이 와중에서도 추상적인 담론의 심급을 이루는 두 기관원 간의 차이가 드러난다. 곧 이 둘은 ‘벽’과 ‘들판’이라는 두 상반된 기호를 가지고 대립한다. 각각 바깥이 없는,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는 편집증과 멈출 수 없는 분열증으로 대칭되는 것이다. 전자가 폐쇄적으로 갇혀 있어 소통이 불가능한 채 망령들의 무게가 점점 가중된다면, 후자는 완전히 자아가 열려 버린 상태로 우발적으로 타자들(여기서는 망령들)과 관계 맺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 카페 안에서의 연극은 민중에 초점이 맞춰짐 저항의 기제로서 기능을 한다. 메타 층위에서 햄릿과 시대의 실제 사이의 간극을 조율하는 과정이 곧 연극이 된다. 오필리어는 역할을 하고 나서 역할에 대한 자신이 느낀 바를 이야기한다.

    햄릿은 카페 마담이 맡은 거트루드를 강제로 범하려 하는 연기에 몰입하고, 아버지 유령이 나타나고 햄릿은 이를 보지만, 마담은 극의 연기로 보고 이를 잇는다. 극중극이 실제와 섞이는 부분이다.

    공동묘지에서 인부들이 무덤을 판다. ‘죽음의 늪 앞에서 씨를 뿌린다’, 죽음과 삶이 극명한 이미지로 대비된다. <햄릿6>는 죽음에서 삶이 태어나는 아이러니함을 인생으로 본 것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생전 했다는 경구를 차용하기도 한다.

    잠과 꿈

    이윽고 또 하나의 대비가 출현한다. 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잠든다’와 ‘꿈꾼다’란 양자택일의 문제가 새롭게 제기된다. 전자는 비극에 무지하게 되는 것이고 후자는 비극의 현실을 인식해야 하므로 비극 자체에 휘말리는 것이다. 바보가 되느냐 고통에 휩싸이느냐의 양 갈래에서 제 3의 선택의 가능성이 없다.

    여기서 잠과 꿈은 중의적 의미이다. 동시에 변증법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잠들어도 여전히 악몽이 다가올 것이고, 꿈꾼다면 비극으로부터 저항이 가능할지 모른다. 잠들면 역설적으로 무의식의 상흔이 작동하며 진정 꿈꾸게 될 것이고, 꿈꾸면 '이 악몽의 잠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의 꿈의 도취에 또한 잠들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비극이다.

    끝으로 ‘아름다운 강산’이 들려온다. 꿈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에서 달콤한 꿈을 머금었다고 생각되는 노래. 상흔의 무의식을 덮고,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무의식을 또한 드러내는 노래. 상처와 민주화의 간극을 봉합하는 노래.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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