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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페라 <팔스타프>, '팔스타프'의 볼록한 배란?
    REVIEW/Theater 2013. 3. 25. 13:57

    인트로: 부재의 유형




    ▲ 19일 오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오페라 <팔스타프> 드레스 리허설 장면(이하 상동)


    팔스타프에는 특기할 만한 아리아가 보이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레치타티보 형식의 주고받는 대화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그에게는 특별한 주인공만의 자리가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고 음악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비장해지거나 극적인 고양의 흐름이 결코 크게 급격하지 않다. 


    희극적 기조



    이 작품을 구성하는 것은 희극적 정서이며 앞서 영웅의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얻는 식의 비극에 관련된 관람자의 의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그간 접해 왔던 여러 비극의 양식과는 궤를 달리함을 의미한다. 


    약간은 애매한 부분이 단지 팔스타프가 제일 먼저 등장하지 않고, 그 제목을 ‘팔스타프’로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팔스타프라는 제목이 팔스타프를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벗어날 수 있다면 팔스타프는 별로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내세우는 위세는 단지 처음에 자신들의 부하에게 엄포 놓는 것에서만 성립하는 듯 보일 뿐이며 이후 그는 조롱과 파국의 위기를 가지고 올 주변사람들의 관점 아래 우스꽝스러운 위치로 놓이게 된다.


    팔스타프의 볼록한 배



    팔스타프의 볼록한 배는 그의 터무니없는 자신감과 자기만족을 성립시키는데 이 부푼 배는 그의 신체 일부만이 아닌 일종의 욕망의 저장소이자 그 자신의 잉여물로서 의도적으로 설정한 극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자랑스러운 배”는 그가 특별히 내세울 것 없는 현실에서 결여를 은폐하는 동시에 늘 자신보다 더 대단한 무엇, 더 갖춰진 무엇이 있음을 보증하는 과잉의 자의식과 일치한다.


    동시에 이 배는 외부적으로는 곧 그의 헛된 계획으로 판명 나는 계략들이 풍선처럼 터져 버리는 헛된 가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첫 장면에서 팔스타프의 쪼들리는 생활고에서 그의 파국을 부를 계략들이 탄생하는 것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결국 구애와 거절의 부정의 부정적 인과과정의 표면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랑의 감정보다는 일단 그의 배가 가리키는 위신을 돈으로 채울 요량에서 그의 가짜 구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곧 그는 자신의 신분이 귀족이라 떠벌이지만, 돈이 없기에 그만큼의 격식을 차리기 힘든 볼품없는 천민 같은 귀족 신분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기를 치려고 하는 포드와 같은 신사는 부르주아 계층의 튼실한 사업가로 그 둘의 대립은 포드의 아내이자 팔스타프가 유혹하려고 하는 알리체의 진정한 사랑의 확인이란 공통된 목표에 겹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두 상이한 계층의 대립, 정확히는 극단적인 대조는 베르디가 살았던 19세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싶다.


    무한한 낙관의 자세, 팔스타프




    중요한 것은 자아도취와 자기만족으로 자신의 그 뚱뚱하고 볼품없는 위용과 신세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운 듯 보이며 오히려 자신의 도도함을 내세울 수 있는 팔스타프에게 실패는 아무 의미가 없으며 좌절은 아주 작은 순간에 불과하며 근원적으로 그에 대해 외상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배가 만족시키는 만족감은 앞서 그 자신의 잉여물이라는 점에서 끝까지 그 자신을 긍정하는 낙관의 자리에 그를 위치시킬 것임을 나타내는 듯싶다. 


    그래서 “최후에 웃는 자 결국 승리하리!”라는 그의 말은 엄밀히 말해 실패를 딛고 성공하는 자의 웃음을 이야기한다기보다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웃을 수 있는 자가 승리한다는 말에 더 가까워진다. 


    팔스타프는 자신이 만인의 웃음거리가 됐을 때도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여타의 사람들이 빛을 봤다는 입장을 호기롭게 내세우는데, 그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잠깐의 탄식 후에 포도주로 뱃속에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자 한다며 긍정의 자세를 취할 때 그의 배는 그의 일차적인 쾌락충동이 잠재하는 자리로 되새겨 봄이 가능할 것이다. 곧 앞서 ‘웃는 자’는 그저 어떤 상황이건 ‘웃을 수 있는 자’에 가깝다.


    팔스타프는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별 생각 없는 주인공을 주인공이라 할 순 있어도, 아무리 희극이라지만 주체라는 호명이 가능할까. 오히려 아리아는 난네타 그리고 펜톤 사이에 성립하는 사랑의 속삭임에서 거의 대부분 나온다. 또는 팔스타프의 미사여구의 알리체와 메그에게 똑같이 보낸 사랑 고백을 그대로 감미롭게 동시에 비웃으며 부르는 알리체에게서 나온다. 


    아버지의 반대를 뛰어넘어 순수한 사랑을 일관되게 보여주며 성취하는 이는 난네타와 펜톤이며(그렇다면 이들이 더 주인공 같지 않은가) 팔스타프의 아리아는 그저 비웃음의 재현 텍스트로 삽입될 뿐이다. 


    앞서 팔스타프의 동기가 바보 같은 쾌락의 추구에서부터 시작하는 돈의 갈망에서 연유한다면, 그리고 그 동기가 그의 풍부한 자기만족이 돈 없는 귀족의 추락과 같은 시대상의 비판적 시선을 묘하게 벗어나며 성립한다고 할 때, 나아가 ‘사랑의 구애가 실패한 것 같은’ 다른 문제의 차원으로 나타날 때 팔스타프는 그저 자기만족의 상태로 회귀하고 만다. 곧 그를 둘러싼 해프닝이 그의 의도를 비껴나가며 계략의 실패자라기보다 그저 ‘뚱뚱한’, 그래서 매력 없는 존재로 치부당하면서.

     

    그는 마지막에 강력한 외부 집단에 의해 회개하고 속죄하지만 자신의 배만은 살려달라고 한다. 잉여물로서 자신의 모든 삶의 초월적 동력이 되는 배의 자리가 한층 더 그리고 새삼스레 다시 부각되는 것이다.


    앞서 그에게 어떤 피해도 입지 않고 바로 그 계략이 들통 나는 데서 우리는 그가 위험에 처할 것을 또한 걱정하지 않게 되는데(이는 무엇보다 팔스타프가 추락하리라는 결과는 예측 가능해졌고 그 과정에 별다른 우연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의 입장에 완전히 동조해서 보기에도 그다지 큰 유인이 없는 게 사실이다. 


    3막, 비극의 변주 



    팔스타프가 어리석음으로 점철되어 있는 존재라면 그래서 별로 실패의 자의식조차 없는 인물이라면 그를 관찰하고 골탕 먹이는 존재는 절대자적인 위치에 서 그를 조종하게 되는데 이는 거의 신과 인간의 질서로까지 비유될 정도이다. 이미 이막에서 완전히 팔스타프를 궁지에 몰아 승리를 거둔 팔스타프 이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다시 한 번 골탕 먹이게 되는데, 정령들로 분해 그의 죄를 벌하는 절대자적 위치를 팔스타프에게 안긴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베르디에게 <맥베스>의 자취를 일부 느끼게 되는 요소도 등장하는데 나무숲이 움직이면 그가 패망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이 현실로 입증되는 것과 같이, 뒤에서 숲의 일부로 분한 정령들이 나타나자 그의 패망이 팔스타프로서는 운명적인 체감으로 다가오게 되는 부분이 그렇다. 


    이 정령들이 나오는 숲의 3막은 2막의 잉여이자 작위적인 덧댐으로 보이는데 그다지 매끄러운 흐름을 형성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최후에 웃는 자 승리하리라는 구문을 팔스타프의 선창과 뒤따르는 모두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마지막 장면은 일렬로 하나 된 모습을 보이는데 곧 팔스타프의 긍정이 축제적 제의의 광경으로 확장되며 모든 해프닝을 하나의 쾌락적 도취로 봉합하는 광경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 곧 팔스타프의 생각 없는 쾌락 충동이 모두에게 전이된 하나의 순간이라고나 할까 


    이 3막에서 역시 요정으로 분한 난네타의 아리아가 그리고 두 그룹으로 나뉘어 떠드는 가운데 중앙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펜톤의 강한 의지의 산물인 아리아가 또한 그 가운데 자리한다. 이 난테타와 펜톤의 관계는 다소 서사의 주요 흐름에서 겉돌고 있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또 다른 판본을 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팔스타프의 주체적 자리는 참 요원하기만 하다.


    희극으로 인도하는 매개자, 팔스타프



    팔스타프는 시련이 될 만한 것들을 덥석 물고 속는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트릭스터의 인물상을 보여주고 있다. 트릭스터는 통상 매개자의 입장에 서는데 중요한 인물이지만 주인공은 아닌 것이다. 팔스타프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빛을 봤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 거짓은 아닌데 그의 어리석음이 모두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속에서 결과적으로 펜톤과 난네타의 고귀한 사랑을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팔스타프의 마지막 말은 여기서 다시 결국 자신으로 인해 웃을 수 있었던 여인들을 최후의 승리자로 두는 대신 그저 웃음으로 모든 것을 축제의 장으로 수렴이 가능한 무한한 긍정의 장으로 모두를 초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그의 자신을 향하기보다 모두에게 하나의 긍정적 전망을 전하며 모두를 승리의 한 궤로 엮는 말이다.


    <팔스타프>의 매력



    이 작품을 보면서 엄숙하고 뻣뻣하게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모든 부분이 팔스타프에 대한 조롱이고 또한 무겁지 않게 음악 역시 진행되며 아리아를 부분 부분만 도입한다. 숨겨져 있는 유머를 읽고 박수보다 웃음으로 대처하는 것이 더 나은 감상법 같다. 국립오페라단은 크게 커다란 유리 구조물의 실내 풍경과 이층 집 내부를 오가며 그 변환 과정에 음악을 두지 않음으로써 곧 기계의 작동 소음이 생경하게 다가오게 놔둠으로써 스펙터클을 새삼 확인시킨다. 


    팔스타프로는 앤서니 마이클스 무어 이상으로 한명원이 이미지적으로도 더 과장된 힘을 드러내는 데 있어 굵직한 성량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팔스타프는 계급의 대립과 신과 인간의 시차 등 비극의 관점과 다른 여러 오페라의 판본들과 유사한 지점을 가져간다. 주인공 같지 않은 독특한 주인공 팔스타프라는 인물의 배라는 잉여물과 그로부터 펼쳐지는 긍정의 세계로 모든 것을 소급시키며 축제의 장으로 만드는 꽤 독특한 전개 양상을 거쳐 우리는 최후에 웃는 자가 되어 아마 이 작품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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